제16장 프래그머티즘과 과정의 철학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변화의 개념에 초점을 둔 두 개의 철학이 생겨났다. 프래그머티즘과 과정의 철학이 그것이다. 두 철학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 대신 그것들은 변화하는 경험과 형이상학적 과정의 입장에서 사물을 이해해야 했다.


프래그머티즘은 미국의 철학 기조를 마련하는 데 가장 주도적인 공헌을 했다. 프래그머티즘을 처음 주장한 철학자는 찰스 퍼스이며, 윌리엄 제임스에 의해 대중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또한 존 듀이는 이 철학으로 미국의 제도상 여러 문제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이 세 철학자의 핵심적인 주장은 일생생활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키지 않는 철학은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즘은 형이상학적 체계라기보다 문제 해결 방법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철학이다. 


과정의 철학은 사물의 본성에 관해 특수한 견해를 제시했다. 과정의 철학을 주도한 두 철학자는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과 영구의 화이트헤드였다.


1.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한 운동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19세기 두 부류의 차별적인 성향을 가진 철학을 중재할 목적으로 생겨났다. 하나는 과학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중심적 사상이다. 과학은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인간의 본성에 위협을 가했다. 과학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세계는 단지 기계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고 믿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데카르트의 이성론에서 시작되어 칸트, 헤겔에 이르는 인간 중심적 전통이 있었다. 과학적 전통과 인간 중심적 전통은 서로를 배척했다. 경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성주의가 객관성이 결여된다고 비판했고, 이성론자들은 과학이나 경험론이 도덕적 신념, 종교적 신념, 목적의식이 결여된다고 비판했다.


프래그머티즘은 이 두 전통 사이를 중재하고 이들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선택하여 결합하고자 노력했다. 퍼스, 제임스, 듀이는 각자 다른 측면에서 프래그러티즘을 주장했다. 퍼스는 논리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제임스는 심리학과 종교에, 듀이는 윤리학과 사회사항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모두 동시대 사람이었으며 뉴잉글랜드 출신이었다.


2. 퍼스


찰스 퍼스(1839~1914)는 1839년에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수학 교수였다. 그 역시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1861년부터 1891년까지 30년 동안 미합중국 연안 측량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그의 명석함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다. 대학의 정식 교수 생활도 못해봤으며 철학자로서 확고한 위치도 점하지 못해 살아생전 출판된 저서도 거의 없었다. 그가 살아있을 땐 큰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지 수십 년 후 그의 저술들이 수집되어 몇 권의 책으로 편집되었고, 그것들이 경이적인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2. 1. 의미론

퍼스는 단어의 의미가 여러 가지 행동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어의 pragma(행위, 행동)로부터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퍼스의 기본적인 입장은 <어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곧 그 사물의 감각 가능한 결과에 대한 관념이다>. 다시 말해 만일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우리는 <A면 B다>와 같은 형식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형식이 의미하는 것은 특정한 대상이 현존할 때 그에 따르는 특정한 결과가 예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단어가 어떠한 실제적인 결과도 생각할 수 없는 대상을 지칭한다면 그러한 단어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는 외부 환경과 사물들을 참조하지 않고 단지 관념에 근거하여 타당성을 주장하는 이성론자의 이론에 반대했다. 우리의 사유는 주변 상황과 분리되어서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어떤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의미는 직관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도출된다. 이런 이유로 의미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이다. 


3. 제임스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1842년 뉴욕의 교양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9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를 취득한 뒤 1872년 생리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의학에서 심리학, 철학으로 관심을 옮겼으며 1890년에는 [심리학 원리]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프래그머티즘 원리들을 여러 분야의 비범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3. 1.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

윌리엄 제임스는 만일 이러한 세계 해석도 옳고 저러한 세계 해석도 옳다면 <우리의 한정된 삶 가운데 여러분이나 나에게 어떤 뚜렷한 차이를 가져올 수 있을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 철학의 모든 기능이다>라고 생각했다.

제임스에 의하면 프래그머티즘은 단지 방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으로서 프래그머티즘은 인간의 삶이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 사물과 주위 환경을 이해하고자 할 때 비로소 철학적 사유가 시작된다. 


제임스는 퍼스와 마찬가지로 이성론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단적이고 삶의 문제를 다루지 않은 채 세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프래그머티즘은 독단적이지 않다. 제임스에 의하면 과학, 신학, 철학에서 어떤 이론도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론의 모든 체계는 단지 근사치에 불과하며 완벽하지 않다. 어떤 이론의 가치는 그 이론의 일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단순한 일관성 대신 실용적인 현금 가치(cash value)를 이끌어 내야 한다. 즉, 우리는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론이 실제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은 무의미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폐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면 프래그머티즘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다. 대신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제임스는 항상 어떤 관념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실용적인 방법을 <그것이 작용하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그 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일련의 방법론적인 장치며 <항상 개체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유명론의 장치고, 실제적인 면을 강조할 때에는 공리주의의 장치며, 말뿐인 해결책이나 무익한 문제들, 형이상학적인 추상을 배격할 때에는 프래그머티즘의 장치가 된다.>

3. 2. 프래그머티즘의 진리관

앞서 말했던 것처럼 프래그머티즘에서는 진리가 관념의 현금 가치여야 한다. 실제 행동에 대한 지침을 주는 것 이외에 무엇인가가 참이다 또는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동기가 있을 수 있는가?


제임스는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진리는 우리의 성공적인 행동에 의해 만들어진다. 성공적인 행동이 많은 만큼 진리도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말이 진리는 변덕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프래그머티스트에게 진리 추구의 이유를 묻는다면 제임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건강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건강함으로써 그만큼 돌아오는 게 있기 때문인 것처럼 <진리를 추구해야 할 우리의 의무는 대가를 지불해 주는 일을 해야 하는 우리의 일반 의무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중략... 집단들이 제각기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만 주장한다면 논쟁들은 해결이 나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는 어느 이론이 실제 생활의 사실에 합당한가 물어볼 것이다. 여러 시대를 거쳐 오면서 철학자들에게 문제가 되어 온 논쟁은 자유 대 결정론의 문제다.

3. 3. 자유 의지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운지 결정되어 있는지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의지의 자유 혹은 한계에 대해 논쟁을 할 때 양측 논거가 모두 받아들일만 하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실용적인 가치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인간의 행동이 결정되어 있다면, 즉 자유 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후회를 할 수 있을까? 이미 기계적인 톱니바퀴처럼 인간의 자유 활동이 없다면 모든 사건은 엄격히 정해져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후회를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설득시켜 어떤 행위를 하게 하기도 하고 금지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기도 하고 상을 받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인간의 의지가 강제되거나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의 프래그머티즘은 <우리가 행위 A를 한다면 사건 B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공식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한다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행위 A를 하도록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희망, 공포, 후회를 느끼는 인간이 있을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실용적인 질문이 중심 역할을 해낼 것이다. <나에게 더 유익하고 현명한 선택은 무엇인가?>


3. 4. 믿음에의 의지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고, 실용적 가치를 떠난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임스에 의하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논증할 수 없는 사실들을 믿을 때 종종 실용적 이득을 얻곤 한다. 이것은 약간의 지적 모험이 따르지만 해볼 만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어떤 숙녀가 자기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청년은 숙녀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는 회의 때문에 고백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경우 그는 <진리를 잃는> 것이다. 그의 믿음에의 의지는 결코 그녀의 사랑을 창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 청년이 진리를 알게 되기 전에 증거를 얻고자 한다면 그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찾는 증거는 단지 그가 믿음 위에서 행동한 후에 비로소 유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이성적인 믿음은 사실을 발견한다기보다 사실을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예컨대 내가 승진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내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 그 신념 위에서 단호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4. 듀이


존 듀이(1859~1952)는 프래그머티스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92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기 전까지 미국의 많은 제도, 특히 학교 제도와 여러 정치적 사안에 영향을 미쳤다.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노선은 개인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에 있었던 관계로 그의 저서는 교육, 민주주의, 윤리학, 종교 및 예술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4. 1. 방관자 대 경험

듀이는 이전 철학이 지식의 참된 본질과 기능을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론자든 경험론자든 그들은 인간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정신을 통해 본질을 고찰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과 본질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듀이는 지식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너무 기계적이라고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여 인간을 생물학적 유기체로 간주했다. 인간은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듀이의 중심 개념은 <경험>이다. 정신과 지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또한, 사유는 실용적인 여러 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행위가 아니다. 그 대신 사유는 <문제 상황> 속에서 생겨난다. 사유와 행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도구주의>라고 명명했는데, 그것은 문제를 해결할 때 사유가 항상 도구적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경험론과 이성론이 사유와 행위를 분리한 반면, 도구주의는 사유란 언제나 실제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정신은 단순히 개별 사물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로서 인간과 환경 사이의 매개자로서 행동하게 도와준다. 


그러므로 사유 작용은 마치 진리를 사물에 내재하는 정태적이고 영원한 성질인 것처럼 여기는 그러한 진리의 탐구가 아니다. 사유 작용은 인간과 그의 환경 간의 조정을 이루고자 하는 행위다. 듀이의 말을 빌리면 철학의 가치를 검증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경험과 그것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가지게 되는 결론에 의해 경험과 상황이 우리에게 좀 더 유효하고 분명하게 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다룰 때 더 이로운 결과를 가질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그의 도구주의는 일종의 문제 해결식 인식론이다. 

4. 2. 사실의 세계에서의 가치

모든 사람은 선택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한다. 가치에 대한 문제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경험을 할 때 생긴다. 


듀이에게 성공적으로 끝나는 행위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다. 예를 들어 물이 새는 지붕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어떤 사람은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누수를 막기 위한 여러 방법을 재빨리 생각할 것이다. 지성의 기능은 여러 선택에 대한 결과를 평가하는 데 있다. 지성은 결과를 평가할 때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사용한다. 이때 정교한 이론이나 사물의 본질, 선험적 진리는 필요 없다. 가치에 대한 탐구는 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지성적으로 분류해 내는 것이다.


듀이의 관심은 가치의 문제를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 정치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궁극적인 목적이나 소위 가치 체계의 문제를 고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분명히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목적은 물이 새는 지붕을 막아야 하는 경우처럼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성은 어떤 문제와 그 해답 사이의 간격을 연결해 주는 매개자이므로 그는 이 같은 실험적이자 도구적인 접근 방식에 의해 개인과 사회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인간이 전통적인 도덕과 규범을 포기한다면 어디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듀이에 따르면 <자연 과학의 발견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원리적으로 가치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의 만족에서 구해져야 한다. 과학에 의하면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고, 이 욕망이 여러 방식에 의해 만족될 수 있다. 듀이의 이론과 공리주의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있지만 듀이는 공리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대부분의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이 쾌락을 욕구하기 때문에 그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듀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듀이는 평가의 과정에 엄격한 요소를 추가했다. 그에게 욕구는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선택하기 전에 반드시 비판적 탐구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택은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욕망은 지성의 비판적 검토를 거쳐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어떤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최선의 수단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삶은 너무 역동적이고 행동의 결과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5. 과정의 철학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과학은 자연이 공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가정을 중시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만물은 궁극적인 재료인 어떠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도 물질적, 기계적 용어로 설명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우주적 기계의 일부로서 더 이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는 이런 가정에 철학적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자연이 불활성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우주가 꽉 짜인 기계 조직과 같다면 어떻게 새로움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불활성적인 물질은 정태적 상태를 극복하고 진화할 수 있을까? 


화이트헤드는 새롭게 생겨나는 물리학의 수많은 의미들을 들추어내면서 과학 안에서 자신의 형이상학으로 이동해 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도 과학을 거부할 의사는 전혀 없었지지만 그 대신 형이상학과 과학이 서로를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6. 베르그송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1859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학계에서 베르그송의 성장을 매우 빨랐다. 그는 22세에 철학 교사가 되었으며, 1900년에는 근대 철학 분야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여러 저서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각국의 학자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6. 1. 분석 대 직관

베르그송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첫 번째 방식은 <우리가 대상의 주변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두 번째 방식은 <우리가 대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첫 번째 방식에서 비롯되는 지식은 우리가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얻은 지식이므로 지식의 양태도 관찰자마다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첫 번째 방식에 의한 지식은 상대적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방식을 통해 얻은 지식은 절대적이다. 이 경우 우리는 대상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특수한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대상을 파악한다.


예를 들어 공간상의 물체의 운동을 생각해 보자. 물체가 움직일 때 우리가 그저 옆에서 관찰을 하게 되면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물체가 달리 보인다. 단지 기호로써 물체의 위치나 운동을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물체 내부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점과 거리의 단위에 대한 기호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우리는 기호가 아닌 대상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곳, 즉 나의 정지된 위치로부터 운동을 파악하는 대신에 나는 대상이 있는 곳, 즉 내부로부터 그 대상의 운동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운동은 대상 그 자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부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즉 사물을 기호로써 파악할 때 그 사물이 우리에게 주는 정보는 다른 사물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 사물에게 고유한 속성이 아닌 점뿐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결코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본질은 사물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호에 의해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기호는 항상 불완전하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야에서 파리의 사진을 찍든가 또는 영화 필름에 담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파리에 살고 있을 때 느끼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은 대상의 주위를 맴도는 것을 <분석>이라 불렀고, 대상 안에 들어가는 것을 <직관>이라고 불렀다. 


직관에 의해 베르그송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대상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 대상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 즉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합일하는 <지적 공감>이다. 과학과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분석>과 <직관>의 차이에 있다.

6. 2. 분석이라는 과학적 방법

베르그송에 의하면 과학이 분석에 기초한다면 결국 그것은 분석하고자 하는 모든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왜냐하면 분석은 이미 알고 있는 요소로 환원하는 작업, 즉 기호로 표현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장미를 분석하기 위해 장미를 뽑아 구성 성분을 분석한다고 하자. 실험실에서 아무리 장미에 대해 자세히 분석해도 이 장미는 더 이상 공원에 있는 살아 있는 장미가 아니다. 베르그송은 이런 분석적 지성이 아이러니하게도 대상의 본질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본질은 역동적이고 번성하며 생동적이고 연속적인 존재, 즉 지속이다. 그러나 분석은 이러한 본질적인 지속을 방해하며 삶과 운동을 정지시킨다. 또한 참된 삶 안에서 통합되고 유기적이며 역동적인 실재인 것을 여러 개의 독립적이고 정태적인 부분으로 분리시킨다.

6. 3. 직관이라는 형이상학적 방법

베르그송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즉 <직관>이 있다고 말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직관은 일종의 지적인 공감이다. 직관에 의해 우리의 의식은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분석은 정태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기껏해야 병치되어 있는 부동적인 것들을 가지고 운동을 재구성한다. 이와 달리 직관은 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실재 자체로서 단정하거나 지각하며, 정지 속에서는 우리 정신에 의해 찍힌 스냅 사진처럼 단지 추상적인 순간을 본다. 보통 분석적인 사유는 새로운 것을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배열로써 묘사한다. 아무것도 잃은 것은 없지만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진 것도 없다. 그러나 성장인 지속과 밀접하게 관련된 직관은 지속 안에서 전혀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중단 없는 연속성을 지각한다. 

이어 베르그송은 철학의 기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직관은 지성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운동을 정태적인 상태들로 보기 때문이다. 직관은 운동이 연속적이며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고 생의 약동에 의해 생성된 창조적 과정은 불가역적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러한 비환원성과 불가역성에 대한 개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정신에 폭행을 가해서 지성의 자연적 성향에 반(反)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곧 철학의 기능이다.>

7. 화이트 헤드


화이트 헤드(1861~1947)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분석적 사유에 반대했다. 그의 주제는 <연결성이 모든 사물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과학이 분리하려고 한 것들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과학에 의해 무시되어 온 것들은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즉 직관과 삶 자체 같은 것들 말이다.


7. 1. 단순 위치의 오류

화이트 헤드는 뉴턴의 물리학이 오류에 빠져있다고 주장했다. 그 오류는 단순 위치(simple location)의 오류다. 뉴턴은 사물이 공간상에 존재하는 개별 조각들의 물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화이트 헤드는 이러한 뉴턴의 주장에 반대하여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인식되는 자연의 기본 요소들 가운데에는 결코 이 단순 위치의 성격을 가진 요소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원자는 지적인 추상의 산물이다. 시간상의 순간들, 공간상의 점들, 물질의 개별 입자들, 이러한 사물들은 과학적 사유에 도움을 주는 개념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우선 화이트 헤드는 <원자 atom>라는 단어를 거부했다. 그 대신 <현실적 실체 actual entity>나 <현실적 사건 actual occasion>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불활성적인 원자와 달리 현실적 실체는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고, 주위에서 요동하고 있는 생의 전 영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화이트 헤드의 <현실적 실체>라는 개념은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하게 한다. 


7. 2. 파악의 이론

우리는 단일의 고립된 현실적 실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실체들의 집합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화이트 헤드는 현실적 실체들의 집합체를 <사회>나 <상호 관계 nexus>라고 불렀으며, 그 안에서 실체들은 그것들의 <파악 prehension>에 의해 결합된다. 

화이트 헤드는 현실적 실체들이 어떻게 상호 관계를 맺는지 기술하기 위해 <파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세계 내에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적 실체들은 창조적 과정에 의해 집합이나 사회 아니면 상호 관계로 결합된다. 이러한 생성 과정 속에서 현실적 실체들은 <파악>을 통해 형성된다.


제17장 분석 철학

20세기 영어권 국가에서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은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분석 철학자들은 언어 분석을 통해 개념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그들에 의하면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는 데 있다. 대표적인 분석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 철학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학의 목적은 사상의 논리적 명료화에 있다. 따라서 철학의 성과는 철학적 명제의 수가 아니라 명제의 명료화다.

이런 분석 철학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선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분석 철학에 의하면 철학의 과제는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도, 우주를 설명하는 것도, 행위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철학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다. 그것은 어떠한 윤리적 명제도 낳지 않는다. 철학자는 자기 스스로가 세계에 대한 고유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사실들의 발견은 과학자의 몫이다. 과학자가 그 과제를 모두 완료하면 철학자에게는 남아 있는 사실이 아무것도 없다. 다음으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 분석 철학자들은 언어의 부정확한 사용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은 해결함으로써 철학을 수행한다. 따라서 잘못된 추론이나 무의미한 가정을 하는 식으로 언어를 오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헤겔의 방식을 본떠 방대한 사상 체계를 제시하거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은 이미 철학자의 기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기능은 언어 안에서 모호성의 원인과 의미의 기초를 발견하기 위해 언명이나 명제를 분석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