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탄탱고 (1994)’ 중에서)
유신론적 이미지는 교리를 위한 은유의 집합인 성경에 입각하여 만들어지기에 늘 환상적이다. 반면에 무신론적 이미지는 그런 환상적이거나 영적인 현상을 납득하지 않는 유물론적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실재적이다. 유신론-환상적, 무신론-실재적. 이러한 각 관계식은 뒤섞거나 떼어낼 수 없이 고정된 두 쌍의 인과, 혹은 진리로서 우리에게 받아들여진다.
성서는 신 존재의 전제 다음, 그에 따른 초현실적 현상 발현을 드러내는 형태이고, 그 반대인 무신론적 입장은 그 실재성이 관념 자체의 증거로 귀속되는 형태이다. 두 가지의 모습이 약간 다르다고 볼 수 있으나, 작문의 용이함을 위해서 그 부분은 각자 다르게 정의한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겠다.
소설 '사탄탱고'는 상술한 성서의 형태는 결코 아니고, 유물론적 무신론의 형태 또한 아니다. 아주 독특하게도, 작품에서는 무신론적 시각을 환상성으로 증거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작가는 그런 형식을 독자에게로 유연하게 설득시키는데에 성공한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다.
‘사탄탱고'는 언젠가 희망이 실현될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헝가리의 망한 어느 집단 농장의 주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끝없이 호우가 내리고, 발목까지 진흙이 잠기는 음울한 그곳에 주민들은 어느 날, 한 해하고도 6개월만에 돌아온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의 등장과 함께 고대하던 부흥의 날이 왔구나 하고 들뜬다.
일단 글꼴 겉으로 드러나는 소설만의 특징은 한 장(章)이 끝날 때까지 문단을 거의 나누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속에서 바로 느낄 수 있는 작가의 신묘한 기술적 면모는 아주 다양한 군상의 시점 적용이 매우 유려하다는 것이다. 마치 조그만 어항 속의 열 마리 남짓한 금붕어들을 차례차례 관찰하듯이 전지한 작가의 위치에서 각자의 사소한 욕정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대범한 희망을 만일 등장인물들이 알면 매우 불쾌하게 느꼈을 정도로 과감하게 뜯어본다. 그러나 그것이 딱딱하게 굳어있지 않고, 이리에서 저리로 옮겨가는 그 찰나가 거의 느껴지지 않으리만치 섬세하다. 완만한 미끄럼틀을 내려가는 듯한 안정적인 미끄러짐. 종착은 없고, 벽에 부딪치면 다시 다른 벽을 향해 휘는 마술적인 술법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희망에 미쳐 이리미아시를 따라 도시로 달려가고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홀로 영문을 모르고 농장에 있었던 의사는 이미 전쟁 때 무너져 들릴 리가 만무한 종탑의 종소리를 듣게 된다. 떠난 사람들은 그것을 이리미아시의 등장과 함께 성공의 영적 전조라고 생각했지만, 의사의 방문으로 그것들은 모두 무화되어 버린다. 모두들 성경 속의 부활이 지난 영광의 되삶으로 실현될 것이라 믿었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한 미친 노인이 종을 다시 탑의 꼭대기에 올려 울렸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이 소설이 무신론-환상적으로 성립되는 관계식을 지닌다고 했다. 종장에 다가선 부분에서 이리미아시가 자신의 동료 페트리너와 소년과 함께 사업을 펼칠 마을로 향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일전에 자살했던 소년의 여동생인 에슈티케의 형상이 내려오는 것을 보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그들이 느끼는 것은 결국 영적 고양감이라던가, 성공에 더욱 다가선 자신들의 모습이 아닌, 무기력함 내지 탈출 불가능에 대한 절망이다. 소설에서 적용되는 환상성은 작품 속 신 존재 증명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버둥칠 수 없는 완고한 세계 속 자위행위의 조소이며, 아무리 무엇을 잡고 흔들어도 신으로 대변되었던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무기력함만을 더할 뿐이다. 쇠똥으로 성을 지을 수 있어 뵈던 천하의 이리미아시조차 모두와 같이 착각 속에 있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소설은 비춰낸다.
의사가 종소리의 비밀을 알아냈을 때, 의사의 수기를 통해 소설의 서사는 다시 첫 단락으로 돌아가고, 이리미아시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볼썽사나'워진' 군상극은 매듭을 짓는다.
상술했던 전능한 불특정의 화자는 어쩌면 그러한 세계 자체일지도 모른다. 내부는 본래로 악마적이고, 끝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만일의 탈출구를 위한 바깥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치밀한 유한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조감도는 아름답다와 동행하는 궤를 가지지는 않고 단지 마술적이거나, 환상적이다. 언제나 낭자한 것을 보는 것보다 완고한 것을 보는 것은 안심되는 일이다. 사방에 물이 가득하다면, 내가 금붕어라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노벨상 기념으로 라슬로 대표작 ‘저항의 멜랑콜리’도 조만간 읽고 리뷰 올려보겟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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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존나 어려운 책이라는건 알겠다
난 읽는데 한 달 걸릴듯 - dc App
영화에서는 에슈티케 영혼이 안보이더라? 그건 아쉬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