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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괴상하고 불규칙하게, 그러나 무언가 생기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는 체계는 흔하다. 위 링크는 유체 시뮬레이션에서 의도치 않은 실수로 탄생한 일종의 촉수를 보여준다. 바닥에 흩뿌려지고 뭉쳤다가 위로 솟구치고 다시 찢어지는 과정의 연속.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하이더와 지멜의 1944년 실험1)이 보여주듯 사람은 온갖 곳에서 사람 같은 행동을 찾는 데에 매우 익숙하며, 이로 인해 동식물을 비롯한 다른 생물을 볼 때도 그 행동을 사람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일이 허다하다.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이면 한번쯤 이 동물의 감정을 언급하곤 하는데, 동물이 감정을 갖지 않는다는 주장이 비현실적인 것과 별개로 우리가 기쁨, 슬픔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감정이 정말 이 동물에게서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수 실현 가능성multiple real1izability은 유물론과 의식의 문제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수많은 세부사항을 융단 아래로 밀어넣기에 가능한 꽤나 허술한 이론에 가깝다.
덕분에 의식이라는 용어는 꽤나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동물도 고통이나 감정을 느끼느냐는 질문에는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도 의식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조심스럽게, 개나 고양이처럼 우리에게 친근한 포유류는 그렇지 않을까 답변한다. 그 범위를 벗어나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리 논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듯하며, 식물까지 나아가면 애초에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대꾸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여기에는 통속적인 믿음과 양심을 위한 방책이라는 두 기제가 작용하는 듯한데, 미물에 가깝거나 거의 생동감도 없는 것이 사람 같은 방식의 느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의인법이라고 여기거나, 만약 정말 그렇다면 물고기나 야채를 채취하고 먹는 방식이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인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라면, 수조에서 횟감을 직접 고르거나 산에서 별 생각 없이 나뭇잎을 떼어내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질까? 이러한 의식, 혹은 감응력sentience의 문제는 사실 사람에게도 논쟁적인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가 식물을 마취2)시키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걸 테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식이 스스로에게만 고유한, 외부에서 어떻게 관측하더라도 그 느낌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는 흑체처럼 여기곤 한다. 그런 사람조차 마취 상태에서 자신의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잠잔 것처럼? 필름이 끊긴 것처럼?-끊어져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식물이 마취되는 것을 보면, 그리고 비슷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생명체가 마취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사실 거의 모두일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반례야 있기 마련), 이 인간에게 '고유한' 의식이 근본적으로 외부의 조작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것을 재차 떠올리는 동시에, 의식 경험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모종의 의식이 저 동식물들에게도 제각각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그리 해야 한다는 연역 논리는 없다. 그저 유비 추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유비 추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낳는다. 기존에 보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지식일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저자는 이 기존의 관점을 일종의 "식물맹"이라고 표현한다. 동물을 비롯한 다른 체계에서 관측되었다면 평범하게 의식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할 만한 성질을 식물의 움직이지 않는 특성 때문에 간과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왜 움직이는 것에 훨씬 더 주목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게 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겠지만-발달 과정, 진1화2심리학, 인지과학 등등-확실한 것은 식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지능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어떻게 퍼뜨려지거나 어디에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성장할지, 뿌리가 어떤 곳을 향해 뻗어나가도록 장기적 관점에서 파악해 분석하여 생장할지, 덩쿨손이 어떤 막대를 지지대 삼을지 관찰하고 빠르게 움켜쥐거나 이를 포기하고 다른 막대를 탐색할지 등등,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대부분의 식물은 목표를 달성한다. 이는 단순히 수많은 씨를 흩뿌려 생존한 식물만 관측할 수 있기에 보이는 생존 편향 이상이다. 그리고 식물의 '현상학적' 의식을 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뇌>가 식물의 지능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여러 식물 간의 네트워크, 한 식물 개체의 생장 과정, 심지어 굴성 같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물리적인 피드백 체계까지 전부, 식물의 감정이나 의식보다는 이것이 식물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 체계는 분명히 목표를 초과달성하고 있으며, 그 체계의 구성 성분에는 식물의 체관과 원형질 연락사를 타고 흐르는 전기와 물질의 교류가 있다. 식물에는 뉴런 같은 신경 세포는 없지만 대신 뉴런에서 전위차를 형성하고 상호작용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전해질 펌프-아마 가장 익숙한 것으로는 사람에게도 핵심적인 나트륨-칼륨 펌프-가 있다. 이 전기 신호 체계는 식물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작동하며, 그 기능을 통해 식물이 지능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어조가 녹아 있다. 하나, 지능은 목표 수행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둘, 생각을 논하기 위해 지능 이외의 요건은 불필요하다.
이 어조가 흥미로운 것은 식물의 생각을 논하는 옛 문헌과의 차이점인데, 저자가 속한 민트 연구소의 식물 지능 연구를 비판하는 글들을 비롯해 그보다 한참 전의 여러 글은 '식물 지능'이란 개념이 불필요한 의인화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은 무언가를 의식하거나 느낄 수 있는 데에 있지,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느냐의 문제는 지능 같은 거창한 개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의 확산이, 확산을 원하는 잉크 방울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해준다는 말 같은 넌센스.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시절의 목적론을 부활시킨다는 극히 냉소적인 평까지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60년대 뉴에이지 열풍과 함께 찾아왔던 동식물 및 무생물의 감정, 범심론에 대한 반발이 녹아 있다. 식물이나 물에게 음악을 들려주면 좋아한다는 '유사과학' 이론이 난무하고 실제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과 진지한 과학 사이의 거리두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일 테다. (그리고 실제로 이는 합당한 반응이다.) 저자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굳이 더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지능에 대한 인식이 총체적으로 뒤바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점차 목표 수행 능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산업적인 이유일지-기계화는 늘 그렇다-아니면 애초에 그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기에 목표 수행 능력에 집중하는 것인지-분명 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AI 제작은 자주 시도되는 것이었고, 현재도 AI가 마치 감정을 느끼듯 행동한다는 글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모은다-는 불분명하다. 인간 지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다방면에서의 분석이 그 단단한 지반을 흔들어놓는 과정 속에서, 지반 사이의 틈 사이를 뚫고 식물들의 싹이 싹트는 것을 보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대규모 벌목이 이 벌목 주체의 삶을 위협함으로서 나무에서 손을 떼도록 만든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해석을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인 상상력이, 혹은 비인간적일 정도로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할 테다. (마치 석유가 지각에서 나와 지구 전역에 흩뿌려지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괴상한 이론을 설파하는 <사이클로노피디아>처럼.)
그럼에도 <뇌>를 읽고 난 뒤에 가끔, 나는 아직 자라나고 있거나 심지어 지각 밑에서 여전히 싹을 틔울 시간을 판단하고 있는 괴상한 종의 나무가, 서서히 헐거워지는 인류 문명 아래에서 자라나며 싸늘하게 식은 건물 시체 위로 그 몸체를 드리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나 많은 계산이 필요하지는 않을 테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동작을 기계적인 움직임을 위한 지능으로 옮기는 것조차 버거워한다는 건 우리가 그렇게나 복잡한 동물이라는 것을 시사하기도 하지만, 각각의 물리적인 체계에서의 지능이 전혀 다른 체계로 옮겨지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능은 요약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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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4년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Fritz Heider)와 마리안 지멜(Marianne Simmel)이 수행한 실험으로, 참가자들은 큰 삼각형, 작은 삼각형, 원이 그려진 짧은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이 도형들은 특정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였는데, 일례로 큰 삼각형이 작은 삼각형과 원을 쫓고, 원은 도망가며 작은 삼각형이 이를 돕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그 시나리오 이상으로 각 도형을 의인화해서 표현했다. 이것이 사람이 본질적으로 의식적이지 않은 것을 의식적인 것으로 해석하는지, 아니면-애초에 영상을 제작할 때 의인화가 반영되었을 수 있듯-목표지향적 움직임을 보여주거나 해석하려고 할 때면 필히 의인화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2)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는 19세기에 마취 현상이 어떻게 사람들의 의식이라는 개념을 구축하는 동시에 해체했는지를 설명한다. 곧, 어떤 일에 충분히 또렷하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상태가 최면이나 마취 같은 외부 조작으로 쉽사리 형성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있는데, 무언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광고는 주의가 집중될 수 있는 상태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고, 따라서 광고는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외적인 유혹 이상으로 우리의 주의를 창출한다. 광고를 보지 않았을 때의 우리의 주의는 본디 분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물건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소비 자본주의 비판이 자연스럽게 옮겨간 결과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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