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들은 처음에는 레버퀸이 자신의 기괴한 작품을 신비화하기 위해 짐짓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생각한다. 가령 레버퀸의 얘기가 '멋지다.'라고 감탄하는 다니엘 추어 회에라는 시인의 반응이 그렇다. 그런데 이 시인은 평소 독일인이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확고한 소신을 떠벌리는 인물이다. 이 야만적 정복욕과 탐미주의 결합을 통해 토마스 만은 휴머니즘과 이성을 부정하는 극단적 탐미주의가 폭력적 야만의 쌍생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젊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 역시 그 나름으로 탐미주의자였다. 2차 대전 패전 직전,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 벙커에 숨어 있으면서 죽기 전날까지도 "독일이 승리하면 린츠라는 도시에 문화 단지를 건설하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망상에 빠져 있었다.)
-<파우스트 박사> 해설
파시즘은 대중으로 하여금 결코 그들의 권리를 찾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구1원을 찾고자 한다. 대중은 소유관계의 변화를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파시즘은 소유관계를 그대로 보존한 채 그들에게 표현을 제공하려고 한다. 파시즘은 정치적 삶의 심미화로 치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다. (...) 정치의 심미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한 점에서 그 정점을 이루는데,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 파시즘은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라고 말하면서 기술에 의해 변화된 지각의 예술적 만족을, 마리네티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에서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술지상주의의 마지막 완성이다. 일찍히 호메로스의 시대에 올림포스의 신들의 구경거리였던 인류가 이제 그 스스로 구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의 상황이다.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광수는 여기에서 인생을 개조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도덕적 방면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개조’가 하나라면, ‘자연과 인사’를 예술과 같이 대할 수 있도록 하는 ‘심적 태도의 방향 변환’에 근거한 ‘예술적 개조’가 다른 하나다. 그가 ‘인생의 도덕화’와 ‘인생의 예술화’를 주장한 것은 이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예술적 개조’가 ‘내적 개조’보다 인생을 ‘더욱 적극적이고 건설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모든 문화의 영역 중에서도 특히 ‘예술’을 이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광수가 ‘예술적 개조’를 주장하는 근거가 현실이 고통에 찬 불행한 삶으로 가득하다고 본다는 데 있다. 바로 불행에 찬 현실의 삶을 예술품과 같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심적 태도의 변환’을 통해 불행한 삶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예술적 개조’에 내포된 중요한 의미이다. 즉 현실적인 고통에서 나오는 온갖 감정들을 억누르고 인생을 예술로 바라보야 한다는 것이 ‘예술적 개조’의 요체일 터인데, 이러한 이광수의 주장에는 예술과 인생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에 함축되어 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다시 읽기>
사회주의 리얼리즘 vs 파시즘적 탐미주의는
문학에서 흥미로운 지점같음
벤야민이 제시한 정치를 미학화하는 파시즘 vs 미학을 정치화하는 사회주의 구도는 참 매력적임
재밌는건 같은 미래파의 세례를 받은 단눈치오나 마야콥스키의 행보는 극과 극이었고 프랑스 초현실주의 분열 과정도 작가마다 가지각색이었던
좋은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