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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릴리가 하는 고뇌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는데



첫번쨰는 예술적 자기확신에 대한 문제. 퐁스포르트 씨의 방식대로 (주류 예술 사조대로) 그림을 보기 좋게 꾸며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눈에 선명히 새겨지는 인상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지만, 정작 왜 자기의 시도는 거듭 실패하고 엉망진창으로 휘갈긴 흔적만 남는지.


이건 기존의 사실주의 문학이 더 이상 인간의 본질을 담아낼 수 없다고 여겨 관습을 거부하고 모더니즘 소설가로써 새로운 소설의 방식을 끊임없이 탐구한 울프의 문학적 여정과도 연결되고



두번째는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 여성은 글도 못 쓰고 그림도 못 그린다는 탠슬리의 말을 듣고 분노하고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왜 그 좌절감에서 다시 일어나기가 이토록 어려운지.


이건 울프가 자기만의 방 같은 에세이에서 수도 없이 언급한 여성 예술가로써 직면해야했던 장애물과 과제와 연결되고



세번째는 (사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본질적 소멸성에 대한 문제. 모두를 부드럽게 조화시키던 램지 부인도, 촉망받던 앤드루와 프루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자기가 그린 그림은 결국 어딘가에 쳐박힐텐데, 모든 것이 소멸하고 덧없이 스러지는데, 그 안에서 뭔가를 시도하는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이건 유년 시절에는 가족들의 죽음을 겪고, 성장해서는 1차 세계대전을 겪고, 격동의 세대 속에서 구시대적 가치가 붕괴하고 모든 것이 덧없이 스러지는 걸 보며 느낀 울프의 회의와 연결됨.




그래서 사실상 울프의 일생에 걸친 주요한 고민들이 모두 이 소설에 녹아있는 거고, 3부의 릴리는 그 문제에 대해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는 거임


"릴리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게 답일지도 모른다. '나'도, '당신'도, '그녀'도, 모두 지나가고 스러지며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해버리지만 글은, 그림은 그렇지 않다. 다락방에나 걸릴 거야, 릴리는 생각했다. 둘둘 말려서 소파 밑에 처박힐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설령 그런 그림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휘갈긴 흔적에 불과하지만, 그림 자체가 아닌 그것이 시도한 바 만큼은, '영원히 남는다'고. 그렇게 말하고자 했지만,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오만한 듯하여 그저 조용히 삼키고 암시하기로 했다."


"재빨리, 마치 무언가가 저편에서 불러내기라도 한 듯, 릴리는 캔버스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 그녀의 그림이 있었다. 녹색과 청색으로, 가로세로로 그어진 선들이, 무언가를 향한 시도였던 그 그림이. 다락방에나 걸리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결국은 사라져버릴거야.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다시 붓을 집어들었다. 계단을 바라보았다. 비어 있었다. 다시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흐릿했다. 갑작스러운 강렬한 집중 속에서, 한 순간 분명하게 보인 듯, 그녀는 그 중앙에 선을 그었다. 됐다. 완성됐어.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붓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드디어 보았어."


결국 본질적 소멸성 앞에서도 의미를 찾고 영원을 남기고자 하는 인간 시도를 긍정하는 작품.


정말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