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소리를 구성하는 데 논리적으로 필요충분한 조건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떠한 의견도 어느 정도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우선, 개소리라는 표현은 종종 꽤 느슨하게, 글자 그대로의 특수한 의미와 관계없이, 단순히 욕설을 가리키는 일반용어로 사용된다.


다음으로, 현상 자체가 매우 광범위하고 일정한 형태가 없기 때문에 뚜렷하고 명쾌한 분석은 무리한 획일화가 되기 쉽다.


하지만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말이 결정적인 것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사실 개소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고 예비적인 질문들도 대답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기되지도 못한 채로 끝날 것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6, 8-9.)

 


위 대목에서 프랭크퍼트는 개소리”(bullshit)라는 말이 매우 광범위하고 느슨하게 사용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bullshit”이라는 말은 욕설에서부터, 기만적이거나 불분명한 의사소통,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시스템이나 절차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사용된다.

 

그래서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대한 "뚜렷하고 명쾌한 분석"은, "무리한 획일화"가 되기 쉽다고 말한다. 

 

여기서 “무리한 획일화로 번역된 부분이 원문에서는 “being procrustean”인데,


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연쇄살인범을 가리키는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지 침대보다 크면 댕강 자르고, 작으면 자기 침대 길이에 맞춰 강제로 키를 늘여서 죽여버렸다.

 

그러니까 저 맥락에서 “being procrustean”은,


개소리에 대한 명확한 분석은,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자의적으로, 다른 엄연한 개소리들을 잘라버린다, 제외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프랭크퍼트 자신이, 바로 얼마 안 가서 개소리의 본질(essence)이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개소리'가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용어라고 바로 얼마 전에 말해놓고는,


특정 유형의 개소리만을 분석하겠다고 미리 말하고 분석 범위를 한정한 것도 아니면서,


갑자기 개소리만의 공통된 속성이라도 있는 양 '본질'을 논한 것이다.


실제로 


G.A.코헨이라는 철학자가 이상과 같은 취지로 비판한 바 있다.


<Cohen, Gerald A. "Deeper into bullshit." Contours of agency: Essays on themes from Harry Frankfurt (2002): 321-339.)>


코헨에 따르면, 프랭크퍼트의 개소리 분석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실린 bullshit의 여러 뜻 가운데 일부분에 대한 분석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틀린 부분이 있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를 그 발화자의 정신 상태(진실에 대한 무관심 또는 불성실)과 결부시켜 정의한다.


즉, 황소똥(bullshit)에서 황소(bull)에 초점을 두고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bullshit에는, (화자의 마음 상태와 관련된 <무성의한(insincere) 말>이라는 뜻도 있지만)


넌센스(nonsense), 쓰레기(rubbish)라는 뜻도 있다. 


화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 결과물이 똥(shit)인 개소리도 엄연히 있다. 


이걸 빼놓고, 별 다른 부연설명도 없이, '본질'을 논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리고


프랭크퍼트의 거짓말과 개소리 간 차이에 대한 분석에도 문제가 있다.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거짓말쟁이는 시종일관 진실에 대응하면서, 바로 그 진실을 숨기려고 하고, (진실과는 다른) 거짓을 믿게 만들려고 하는데,


이에 반해 개소리꾼은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으며,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거짓말쟁이는 진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어디까지나 게임의 틀 내에서 활동하는 자이지만,


개소리꾼은 아예 근본적인 게임의 규칙 자체를 무시하는 자다.


프랭크퍼트는 (화자가 진실에 무관심한) 개소리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광고와 정치를 드는데,


문제는,


실제 현실의 광고주와 정치인들은 단지 진실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우리를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프랭크퍼트가 (화자가 진실에 무관심한) 개소리의 대표라고 한 광고주와 정치인들이


실제로는 그가, 개소리꾼이 아니라, 거짓말쟁이의 목표(진실에서 멀어지게 하기)라고 규정한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코헨은 이 문제의 근원이 프랭크퍼트가 다음 두 가지 차원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광고주는


    (1) 전술(tactic)의 차원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남성적 매력이 높아진다>라는 광고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2) 목표의 차원에서는, 그 광고를 본 소비자들을 진실(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엄청나게 신경 쓴다.  



실제로 담배 회사 중역들은


담배가 건강에 매우 나쁘다는 점이 명백한 진실로 밝혀진 시절,


그 진실을 늘 염두에 두고,


소비자들을 그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즉, 소비자들을 오도하기 위해,


회사의 사활을 걸었다.


프랭크퍼트는 이 비판에 대해서 광고주의 그 목표는


(일반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동기가 아니라는,


심리적 추측에 기댄 궁색한 변명을 한다. <Frankfurt, Harry. "Reply to GA Cohen." (2002).>


담배가 무척 해롭다는 그 명백한 진실을 마주한 그 담배 회사들이


광고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가장 근본적인 동기가 


소비자들을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가 과연 아닐까?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그저 진실에 무관심할 뿐일까?


후자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설문조사라도 돌려야 하는 것 아닌가?








2.


프랭크퍼트가 무시한, 그 결과물 자체가 똥인 개소리 중에 코헨이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한 것은


학계의 도저히 명료화할 수 없는, 불명료한 텍스트인 개소리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자본이 사회적 관계를 비교적 동질적인 방식으로 구조화한다고 이해하는 구조주의적 설명에서 권력 관계가 반복, 수렴, 재구성의 대상이라고 보는 헤게모니 관점으로의 변화는 시간성의 문제를 구조적 사고로 가져왔고, 구조적 총체를 이론적 대상으로 삼는 알튀세르 이론에서 구조의 우연적 가능성에 대한 통찰력이 권력 재구성의 우연적 장소 및 전략과 관련된 헤게모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개시하는 이론으로의 변화를 나타냈다.” 

(Judith Butler, ‘Further Reflections on Conversations of Our Time’, Diacritics, Vol. 27, No. 1, Spring 1997, p. 13.)


이러한 텍스트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오히려 매력으로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해당 텍스트가 난해한 이유를 그것이 너무 심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오랜 시간 공부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리고 일단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그 텍스트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따르는, 괴로운 인지부조화 때문에


어떻게든 진실을 외면하려 한다.


상기 논문에서, 


학계에 저런 개소리가 만연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폭로하면서 코헨은 자기 얘기를 하는데,


처음에 프랑스 알튀세르 학파의 난해한 글들을 읽으며 코헨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 책임을 해당 글의 저자가 아니라 자기에게로 돌렸다.


유명 학자들이 쓴 텍스트가 의미 없는 개소리들로 가득 차 있을 리 없다는 순진한 믿음 때문이었다.


코헨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난해한 글들과 씨름했고, 마침내 그럴듯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하나 찾아냈을 때,


자신이 쏟아부은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 때문에,


그 아이디어를 그것의 '실제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대단한 것으로 과대평가했다.


코헨은 이것이 학문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어떤 난해한 텍스트에서 얻어낸 통찰이 사실은 몇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일지라도,


그것을 얻기까지의 고된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그 의미를 부풀리게 된다는 거다.


다행히도 코헨은 그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결정적 계기는 알튀세르 학파가 다른 곳에서는 '개념적 엄밀함'의 가치를 끊임없이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글 자체는 전혀 엄밀하지 않다는 모순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의 이론은 얼핏 보기엔 심오한 것으로 느껴졌지만,


면밀한 분석을 거친 후에는 결국 두 가지 해석만이 가능했는데,


하나는 모두의 동의는 얻을지언정 전혀 새로울 게 없는 '흥미롭지 않은 진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큼 '흥미롭지만 명백히 틀린 주장'이었다. 


예를 들어,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 이론은,


길거리에서 경찰관이 "어이, 거기 당신!" 하고 외쳤을 때 우리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미 국가 이데올로기의 부름에 응답하는 '주체'가 되어버린다는 그 예시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개인들에게 내면화되는지를 잘 해명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피상적인 매력은, 결국,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해석 사이를 와리가리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첫 번째 해석은 '호명'을 '사회화 과정'에 대한 은유적 묘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알튀세르의 주장은 '개인은 학교, 가정, 국가와 같은 사회 제도를 통해 특정한 역할과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성장한다'는,


사회학의 기초적인 명제들을 현학적으로 재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모두의 동의는 얻을 수 있을지언정 전혀 새로울 게 없는 '흥미롭지 않은 진실'이다.


두 번째 해석은 '호명' 이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데올로기적 부름이 있기 전에는 여하한 '주체'나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우리의 자율성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흥미롭지만',


어떠한 사회적 언어나 규칙도 학습하지 않은 아기가 배고픔, 고통, 추위, 따뜻함, 편안함을 느끼며 자아가 있다는 점과


사회에 저항하는 개인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거짓'인 주장이다.


여기서 독자는 한편으로는 사회화 과정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참이지만 흥미롭지 않은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아가 전적으로 구성된다는 파격적인 주장(흥미롭지만 거짓인 해석)이 주는 지적 스릴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결국, 평범한 진실과 흥미로운 거짓이 하나의 개념 안에서 뒤섞임으로써,


독자의 마음속에는 '심오하면서도 흥미로운 진실'이라는 환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3.


프랭크퍼트는, 코헨의 상기 비판들에 대해 응답한 논문 <Frankfurt, Harry. "Reply to GA Cohen." (2002).>에서,


자기가 일정 부분 프로크루스테스 같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학문의 영역에서의 '도저히 명료화할 수 없는 불명확한' 개소리>보다 


'화자가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개소리를 자신이 왜 집중적으로 분석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화자가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개소리보다


    (1) 학계의 '도저히 명료화할 수 없는 불명확한' 개소리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제한적이고 간접적이다.


    (2)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는 널리 읽히거나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3) 이해할 수 없는 글은 그 자체로 결함을 뻔히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상술한 학계의 개소리들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 결국 사회로 진출하고, 아침 조회에서, 술자리에서 개소리를 전파한다. 개소리는 전염된다.


그리고 상기 코헨이 보여준 생생한 메커니즘에 의해 개소리에 인생 건 사람들이 무시 못할 만큼 많이 있다.


그래서, 상술한 다른 문제들과 더불어, 이처럼 위험한 개소리 유형을 누락했다는 점에서, 프랭크퍼트의 개소리 분석은 문제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