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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운명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까? 아니면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존재일까? 인간이 운명 지어진 존재인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은 삶의 태도와 지향점의 차이를 명확하게 가른다.

 



우선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리처드 로티는 인간을 구속하는 객관적이고도 절대적인 실체,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우연성’을 기점으로 논의를 펼친다.

 



인간은 우연한 존재이고,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 사용하는 언어, 인간에게 발생하는 상황 이 모든 게 우연하다.

 



일단 우연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상사 벌어지는 것들로부터 조금 더 초연해진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언제든지 뒤바뀔 가능성이 열려있으며, 나 자신 역시 반드시 어떤 존재여야만 하는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세계는 우연하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그렇기에 나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자기 창조의 정신 또한 긍정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 개념이 등장하는데 로티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아이러니와는 의미가 다르다. 인간은 우연을 인정하고 절대적이고도 객관적인, 동시에 확실하고 불변하는 절대적인 진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유무형의 실체들이 없다고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한 사람들을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이라 명명한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를 파괴하고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아이러니스트들은 우연성에 기반한 자유를 토대로 자기 창조를 행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러니스트들은 기존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마지막 어휘를 찾아 헤맨다. ‘새로운’ 언어로 자기를 ‘표현할’ ‘마지막 어휘’를 찾는다는 건 기성의 사고체계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창조한 사고체계를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닐까 이해된다.

 



이때의 자기 자신을 서술하는 방식 역시 고정된 하나의 일련체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술하고 수정하면서 다시금 자신을 써내려가는, 자기자신을 파괴하고 재창조해내는 재서술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엄밀한 논증을 통해 하나의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으려는 철학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이 필요한 문학적인 과정이다. 따지고 보면, 한 인간의 삶을 원인과 결과, 주장과 논증으로 묶는 것은 지독히도 학술적이고 비일반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로티가 꼽는 훌륭한 아이러니스트 중엔 나보코프가 있다. 나보코프는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적인 관점을 수립하고 그 관점으로 소설을 집필했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매혹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내 떨림을 가져다주는 작품을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로티는 나보코프를 훌륭한 아이러니스트로 꼽는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를 다시 정의하면서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들에게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다듬고 써내려가면서 자기를 창조하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사적인 영역에서 통용되어야 할 삶을 살아가는 지침과 공적인 영역에서의 제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무한정 자유가 허용되지 않으며, 설령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만들어가는 아이러니스트들에게도 그렇다. 그들은 자기창조란 미명하에 다른 사람에게 잔혹하게 굴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안되며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이 지켜야 할 최후의 선은 잔혹함에 대한 공포심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 누군가가 타인에게 잔혹한 고통을 가할 때 다 같이 두려워하는 것, 그 두려움을 토대로 다 같이 연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특히 인간에게 가해질 잔혹한 고통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주로 상상력에 따르며, 탁월한 상상력은 인간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데,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인간을 연대하게 하는 위대한 작가가 바로 조지 오웰이라 평한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세기적 수작 <1984>에서 오브라이언이라는 상상적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에게 2 더하기 2는 4다 라는 발언을, 좀 더 근본적으론 그런 발상조차 잔혹한 고통을 통해 윈스턴 스스로 거부하게 하면서 고통에 잠기게 한다.

 



우리는 조지 오웰의 작품을 통해서 오브라이언이란 잔혹한 존재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통해 고통스러워하면서, 고통을 혼자만 감내해내지 않고 타인과 그런 경험을 공유하고 상상을 공유하면서 결의한다.



 

단순히 우리가 우연하게 인간이라는 같은 종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다른 인간에 대한 공감하거나 연민을 느낄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품성이나 기질 따위의 것들에 무언가 공통점을 느끼고 종이라는 차원을 뛰어 넘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즉 ‘우리’라는 존재라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공감 또는 연민을 느낄 수 있고 이 감정만이 연대의 발판이 된다.



 

리처드 로티에게는 인간을 ‘우리’로 묶어주는 바로 그것이 잔혹함이란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품성이고, 그 두려움은 인간을 ‘우리’로 묶어준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로티는 니체의 자기창조 정신은 긍정하되, 형이상학적인 부분은 배척하고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도움을 받아 니체의 한계로 지적받는 관점주의를 보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그리고 잔혹함을 감각하는 능력에서 인간은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관점도 일응 타당해보이지만, 아이러니스트의 태도와 관련해 과연 공사를 명확히 나눌 수 있는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서 예술을 위해 타인마저 수단화하는 주인공 스트릭랜드를 떠올려본다면 굳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나누어야 하는지, 그리고 나누어야 한다면 그 한계점은 어딘지 판단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설령 로티가 언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덧붙여 잔혹함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에 대해 우리는 연대한다하여도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의문 역시 남는다. 우리는 잔혹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잔혹함을 발본색원해야하는가? 우리와 같이 연대할 수 있는 기초감정을 강제로 심어야 하는가? 생물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는 남은 생을 재사회화란 명목 하에 어둠 속에 홀로 보내게 해야 하는가?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로티가 자신의 삶을 새로운 어휘로 재서술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상상해보며 그 즐거움을 같이 맛볼 수 있다는 점, 또 다른 시야를 얻었다는 점에서 즐거운 경험이었으며 결정론에 굴복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또 다른 근거를 얻은 셈이라 개인적으론 굉장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