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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에 공부를 하며 짬짬이 읽을 문학 작품을 고르려 했다. 시집 정도면 일정에 무리가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별 계획 없이 도서관을 헤매다가 「알코올」을 빌렸다. 시집 제목이 알코올이라니, 시에서 술 냄새를 풍기던 보들레르의 작품과 결이 비슷하려니 생각했다. 책을 펴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오판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문장 부호가 '하나도' 없는 본문, 그리고 그 본문보다 두꺼운 해설과 주석을 마주하니 당혹감이 밀려왔다. 시험이라는 더 급한 일이 있으니 바로 반납해버릴까 했지만, 그래도 살펴나 보자는 마음에 첫 시인 「변두리」를 읽었다. "마침내 넌 이 낡은 세계가 지겹다"라는 첫문장이 머리를 빡 때렸다. 정신이 아찔해진 나는 이 책을 반납할 생각을 뇌리에서 쏟아버렸다. 그렇게 일주일동안 「알코올」을 감상하는 일에 공부 못지 않은 시간을 쏟았다. 내 생에 가장 위험천만한 독서였다. 공부 빼고는 모든 것이 재밌는 시험기간의 법칙을 배제하더라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직 성적은 나오지 않았다만 성적이 부진했다고 해서 괜히 기욤 아폴리네르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기로 한다.
「알코올」을 관통하는 정서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알코올이라고 하면 쾌락주의가 떠오르고, 그런 정서를 담아 쓴 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코올」은 철저히 기욤 아폴리네르 개인의 이야기다. 해설에서 각 시마다 그와 관련된 시인의 경험을 하나씩 대응시킬 정도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썩 행복한 것들은 아니었다. 불우한 출생과 가정 환경, 실패한 사랑, 이해받지 못한 재능. 어떻게 보면 드라마 속 불우한 인물의 클리셰를 모두 박은 듯한 삶을 그는 실제로 살았던 셈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시 「메를랭과 노파」의 변형된 멀린처럼, 그를 파묻어 얻은 양분으로 시가 꽃피게 도왔다. 좋은 꼴보다 흉한 꼴을 많이 봤지만, 어떤 경험도 시의 거름이 됐다. 시인이 씁쓸히 삼키는 그의 삶이 곧 「알코올」의 주제며, 취중의 고백이 갖는 솔직함이 「알코올」을 관통하는 정서다. "그리고 너는 네 삶처럼 타오르는 이 알코올을 마신다 / 화주처럼 네가 마시는 너의 삶"
「알코올」만의 매력이 또 하나 있다면, 시 자체를 주제로 삼는 시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을 시로써 개혁하려는 혁명가는 아니다. 자신의 모든 굴곡을 담는 '시'라는 수단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할 뿐이다.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 살면서 겪는 모든 것들은 결국 삶 속으로 들어온다. 이미 잃어버린 과거도 시를 통해 추억으로 남는다. 경험의 조각들이 콜라주를 이룬 것이 시다. 그리고 모두는 아무튼 인생을 살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든 존재의 감각이 시의 기원이 될 수 있다. 어떤 구별도 없이 세상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기욤 아폴리네르가 생각하는 시의 의의였다. "민족들이 쌓이고 내 자신이 나타났다 / 모든 인간의 육체와 모든 인간사가 형성한 나" 나는 이게 참 멋진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미술만큼은 아니지만 시 또한 언젠가부터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된 감이 있다. 시는 솔직히 밥을 먹여주는 도구로는 썩 유용하지 않다. 그래서 현대에서 시는 읽는 사람만이 읽으며 나머지에게는 어떤 가치도 못 느끼는 취미의 영역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살면서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안에는 부지불식 간에 시의 소재들이 쌓인다. 자신이 본 것을 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시인이다. 나도 문학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아니지만, 실용성이라는 잣대에 밀려 예술이 경멸까지 받는 이 세상에 문제의식을 느끼고는 한다. 삶이 곧 시이므로, 시야말로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위안과 열망의 그릇이다. 부디 이 점이 노벨문학상을 시상하는 기간에만 주목받지 않기를,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시가 평등하게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좋은 시들이 참 많았다. 기억해두기 위해 여기에 몇 개를 기록해두려 한다. 「변두리」는 윤동주의 「서시」 다음으로 내가 그간 읽은 서시 중 최고였다. 20세기를 비행하는 예수와 비행기 떼의 이미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미라보 다리」는 짧으면서도 감성이 진하게 느껴졌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라는 반복구가 특히 좋았다. 「죽은자들의 집」, 「도둑」은 설정이 재밌는 서사시들이었다. 기법적으로도 참신했고, 각각 추억과 신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륄 드 팔트냉」은 자기위로를 매우 고상한 표현으로 나타낸, 그래서 대놓고 좋아하기는 어렵지만 내심 마음에 들었던 시였다. 시에 관한 시인의 철학은 「행렬」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말그대로 웅장한 시였다. 가장 강렬했던 시는 「잉걸불」이었다. 시를 쓰고자 자신의, 그리고 세상의 틀을 깨려는 시인의 의지가 제목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상테 감옥에서」는 시인의 슬픈 심정이 정말 잘 담겨 있었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구금된 소감을 드러낸 시라는데, 사건 자체는 코미디 같지만 실존의 위기를 겪는 시인의 참담한 심정에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사실 누구에게나 「알코올」을 읽으라고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알코올」을 전적으로 이해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난해하고 모호한 표현의 향연이기 때문에, 특히 고등학교 시절까지 문학의 감상에마저 답을 정해두는 한국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정말 궁합이 안 맞을 것 같다. 다만 분야를 가리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 삶을 표현해보고자 진지하게 마음을 먹은 사람에게는 이만한 모범도 없을 것 같다. 나도 「알코올」에 진하게 취한 독자로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한 뒤 틈틈이 읽어보려고 전자책을 구입했다. 「알코올」에 담긴 솔직한 고백은 자주 생각날 것 같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망설여지는 때가 오면 「알코올」로부터 감동과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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