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책장에 꽂혀있어서 오랜만에 펼쳐봤는데
그땐 느끼지 못하고 지금은 좋다는 생각이 드는 시가 많았음
책 자체는 시 옆에 중학생 아이들이 읽기 쉬우라고 주석등을 붙혀놨는데 그런건 잘 눈에 안들어오더라
총 8파트가 있어서 그 중에서 하나씩, 최대한 덜 유명한 것 위주로 추려봄
항상 시는 소설처럼 이게 좋다 하는게 애매한 것 같음..
김종길, 성탄제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ㅡ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정지상, 송인
비 갠 긴 강둑엔 풀빛이 푸르른데
남포에서 임보내니 슬픈 노래 울먹이네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 마를거나
해마다 이별의 눈물만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안개꽃, 복효근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드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의 시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면이 없지않아 있지만
그렇기에 가끔 읽으면 좋은 시라고 생각함
쿨타임을 돌려야하는 시인이 있다면 아마 정호승이 아닐까?
들길에 서서, 신석정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해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 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늘..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것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생활은 뼈에 저리도록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 보자
푸른 별이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 일지니.....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감탄이 나오도록 좋았던건 성탄제, 사랑하는 까닭 두 편일듯
난 학생때 별 감흥 없었는데 10년 지나서 이제 보니까 더 좋다. - dc App
성탄제는 모의고사에서 본 거 같은데 그때도 좋았음 - dc App
아주 좋은 여운이 남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