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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작가의 침묵은 납보다 무겁다.
20세기, 스탈린 치하 소련은 검열의 시대였다. 당대의 문단을 빛내던 수많은 작가들이 사형당하거나 수용소로 가거나 침묵을 강요당했고, 남은 이들도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기는커녕 정부와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말이라면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글에서 1900년대 소련의 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거나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명단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나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잘못된 사실(史實)을 전달하느니 말을 아끼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사실(事實)은 불가코프도 검열의 대상이 된 작가 중 한 명이었으며, 그 폭력의 양상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불가코프가 휩쓸린 시대적 비극에서, 그가 맺은 마지막 결실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라는 소설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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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축은 볼란드를 위시한 일행들이 모스크바를 휘젓는 소동이고, 또 다른 축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사랑이며, 마지막 축은 본시오 빌라도를 주인공으로 한 거장의 소설이다. 앞의 두 이야기는 사실상 모스크바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진행되므로, 시공간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구분하자면 세 축이 아니라 두 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목이 내포하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다. 하지만 도입부는 볼란드와 평론가 그리고 시인의 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평론가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반해, 볼란드는 진지한 어조로 신을 긍정한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운명을 지배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존재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 분명하다. 볼란드의 기이한 논리는 얼핏 비이성적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볼란드는 옳다. 볼란드는 악마이고, 악마가 존재하는 이상 신도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도 악마도 부정한 평론가는 허무하게 죽어 버리고 그에게 동조하던 시인은 악마의 실존을 목격하고 미쳐 버린다.
이야기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요란한 소동으로 소설을 이끄는 것은 볼란드와 그 일행이다. 하지만 볼란드는 사람을 유혹하고 영혼을 빼앗는 전통적인 악마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볼란드는 인간을 중대한 죄악으로 떠미는 악령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잘못들을 익살스럽게 고발하는 폭로자에 가깝다. 불가코프는 볼란드의 마술을 통해 실컷 시대를 비웃는다. 비리, 허영, 사기, 그밖의 모든 사회적 병폐들. 볼란드가 검은 마술을 보여주기도 전에 이미 사회는 사소한 방면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다. 볼란드의 검은 마술을 완성한 것은 바로 검은 사회다. 무지갯빛 화폐에 열광하고 외국산 명품에 달려드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의 마술은 아무도 속지 않은 허무한 사건으로 끝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스크바에는 사기에 속기 쉬운 사람이 너무 많았고, 바텐더 안드레이 소코프가 생각했듯이, 사기꾼도 너무 많았다.
그런 사기꾼들에게 가해지는 볼란드의 처벌은 사소하지만 냉정하다. 볼란드는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눈감아 넘기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죄인, 더 정확한 느낌을 살리자면 잡범에 가까운 이들은 볼란드의 농간으로 잘못을 저지른다. 악마는 그 처벌로서 자신의 초현실적인 능력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농락하고, 정신 착란으로 판단을 받은 광인들은 정신병원에 갇힌다. 그것이 소설의 중반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는 플롯이다. 결과적으로, 우연히도 작곡가와 이름이 같은 의사 스트라빈스키의 정신병원에는 끊임없이 환자들이 수용된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수용된 사람이 있다.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거장이다. 유일하게 악마의 존재를 믿어주는 거장은, 예슈아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처형해야만 하는 본시오 빌라도의 고뇌를 주제로 소설을 쓴 작가였다.
나는 왜 작가라고 하지 않고 작가였다고 하는 것일까? 거장은 첫 소설이 거센 비판을 받은 이후로 펜을 놓고 미쳐 버렸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거장을 미치게 한 주범은 한두 명이 아니지만, 가장 악랄한 비판을 가한 사람은 라툰스키로 지적된다. 라툰스키를 위시한 일련의 문인들은 거장의 소설이 지닌 문학적 결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거장의 사상을 매도한다. 거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옹호하고 구교(舊敎)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빌라도 일파다! 거장을 공격하는 신문 기사들은 그들의 편협한 시각을 드러낸다.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그다지 신실하지도 않은 거장의 소설은, 무신론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물결 앞에서는 비판과 비웃음이나 받을 만한, 소위 재미있는 주제에 불과하다.
그러나 거장에게도 구.원의 여지는 있다. 그에게는 연인 마르가리타가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성스럽거나 인자하지는 않은, 그러나 거장에게만큼은 수호 성인과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는 마르가리타는 거장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에 복수한다. 악마의 무도회를 주관하는 여주인이 되는 것을 대가로 볼란드와 계약을 맺은 마르가리타는, 투명한 몸으로 하늘을 나는 초능력을 얻자마자 평론가 라툰스키의 집에 쳐들어가 망치로 그랜드 피아노를 부수고 식칼로 시트를 찢고 집안을 물바다로 만든다. 망치를 든 성녀라는 별칭으로 벌이는 성 마르가리타와 거장의 마르가리타가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악마의 무도회가 끝나고, 마르가리타는 소원을 빈다. “당장 거장을 제 눈앞에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거장은 온다. 정신병원이라는 세련된 형태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 아니라 자신의 방을 가진 평범한 시민으로 온다. 마르가리타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거장은 여전히 자신의 재능과 작품과 가능성에 회의를 품고 있지만, 본시오 빌라도에게 박해를 당했던 그 존재는 볼란드를 통해 거장에게 구.원의 길을 선사한다. 레위 마태오는 전한다.
“그분께서는 거장이 쓴 것을 읽으셨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평안의 품으로 향한다.
작가와 검열의 문제
나는 이 글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등장하는 상징이나 모티프를 분석하지는 않겠다. 작품을 분해하는 작업에 가까운 분석들은 이미 많은 논문에서 이루어졌으며, 나로서는 논문을 작성한 저자들의 통찰력을 뛰어 넘을 역량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드러나는 불가코프의 태도를 통해 작가는 검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가를 간단히 탐구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검열은 외부에 의한 강제적 검열과 내부에 의한 자체적 검열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에, 상위 집단은 하위 집단에게 직접적인 외압을 행사하여 작품의 출간을 금지시킨다. 후자는 상위 집단에서의 탄압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위 집단 안에서 자체적으로 소외자를 배제함으로써 작가가 자연스레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작중에서 검열은 편집자, 평론가, 그리고 여타 작가에 의한 자체적 검열의 형태로 나타난다. 거장을 미치게 만든 원인은 불온한 작품으로 인한 수감 생활이나 출간 금지령이 아니라 동료들의 비웃음과 비난이었다. 편집자는 원고를 구기고, 시덥잖은 질문을 던지고, 어쩌다 이런 이상한 주제로 소설을 쓰게 되었냐고 묻는다. 다른 평론가와 작가들은 공개적으로 신문에 기사를 실어가며 거장의 소설이 지닌 종교성을 비판한다. 이제 거장은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되었다. 그는 작가지만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며, 내부로 결코 진입할 수 없는 외부인이다. 거장은 소위 작가들의 집이라고 말하는 곳에 들어갈 수 없다.
불가코프는 베헤모트와 코로비예프의 입을 빌려, 재능 있는 문인들이 작가들의 집에서 파인애플처럼 익어가고 있으며, 그 온실에서 『돈 키호테』나 『파우스트』같은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다소 빈정거리는 어조로 서술한다. 그러나 코로비예프는 다시 말한다. 만약 미생물이 온실 속 식물들을 덮쳐서 뿌리를 갉아 먹는다면, 그 식물들이 썩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체크무늬 조끼를 입은 악마 하수인의 말은 마치 당대의 소련 문학계가 이미 썩어가고 있다는 암시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서서히 부패하는 문인들의 클럽에서 인정받는 것이 작가의 기준이 될 수 없다면, 대체 누가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신분증이 아니라 어떤 작품을 쓰는지가 작가의 위.상을 결정하지 않습니까!”
바로 작품이다. 작품만이 작가를 증명할 수 있으며, 어떤 검열도 억압도 작품을 재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불가코프의 말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신분증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작가는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만이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며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입부에서 작가의 침묵은 납보다 무겁다고 썼다. 분명, 검열에 의한 침묵은 불가코프의 마음에 납추와 같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추가 언제나 무거운 짐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불가코프를 억압하던 납추는, 그것이 불가코프를 억압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사상을 검열하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불가코프의 모습에서, 우리는 원고가 불타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업로드 상의 문제로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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