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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근대성은 아마도 20세기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근대화는 이제 20세기에 이르러 그 자신에 대한 담론, 즉 자기의식을 완벽하게 얻었고, 자본주의 역시 그 역사적 과업을 다하고 쇠퇴기의 제국주의 또는 후기자본주의로 들어섰다. 그와 더불어 세계에 대한 전근대의 주술적 이미지 역시 사멸했다. 루카치적으로 말하자면, 총체성이 해체되었다.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을 그 기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인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바로 이러한 해체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에 관해 『소설의 이론』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고대와 근대의 분열이다. 『소설의 이론』은 근대소설 장르에 대한 역사철학적 고찰이지 20세기적 상황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그렇지만 62년의 루카치가 회고적으로 밝히듯이 『소설의 이론』은 제1차 세계대전의 속에서, “세계의 상태에 대한 항구적인 절망의 기분에서 생겨났다. 1917년을 통해서야 비로소 나는 그때까지 풀리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었다.” 따라서 『소설의 이론』을 탈주술화 담론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 기이한 접근은 아니겠다. 애초에 이 책은 베버의 영향 아래에서 나왔다.

1.
『소설의 이론』은 그리스 시대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복되도다.”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루카치는 “복된 시대에는 철학이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루카치에게 철학은 “안과 밖의 균열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후”이다. 즉 그리스 시대에는 반성에 따른 주-객의 분리가 없었다. 물음들에 대한 해답이 존재하지만 물음 자체는 결코 의식되지 않는다. 모든 일이 하나의 의미연관 속에서 그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데, 그리스인들에게 이는 숨쉬듯이 당연한 것이다. 이로부터 루카치는 근대성의 문제를 설정한다.

“그리스인들의 그 원이 우리에게는 폭파되어 버렸다. 우리는 완결된 세계에서 더 이상 숨 쉴 수 없다. 우리는 정신의 생산성을 고안해 냈다. 그렇기 때문에 원상들은 우리에게 그 대상적 자명성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실해 버렸으며, 우리의 사고는 결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접근의 무한한 길을 간다.”

세계가 가진 자연발생적 총체성은, 신화적 동일성은 상실되었다. “칸트의 별이 총총한 하늘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가는 오솔길을 더 이상 밝혀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떠한 목표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종말론적 역사관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내듯이, 역사가 사실들의 실증적 단순합 이상이기 위해서는 사건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배열해야 하며, “원상적 지도”를 어떤 식으로든지 그려내어야 한다. 그렇게 사건이란 유한자들은 하나의 짜임관계를 이루며, 이를 통해 무한자를 현시한다. 헤겔에 따르면, 무한자는 추상적 사변이 아니다. 종말론적으로 보아 역사를 인간사로 특징짓는 것은 그것이 영원(Aion)과 영원 사이의 찰나이기 때문이고, 이에 따라 역사적 사건들은 유한자로 된다. 사건들이 유한자로 놓여지면 이제 사건들의 진리는 무한자로의 자신의 몰락에 있게 된다. 유한자는 그 자체로 무한자를 함축한다. 헤겔이 말하기를, 유한자는 “오직 자기의 본성에 힘입어서 스스로 무한성으로 화하는 것이다. 이렇듯 무한성이란 유한자의 규정, 본분이며 더 나아가서는 유한자가 즉자적으로 있는 바로 그 참모습이다.” 그렇게 시간의 단방향성에 따라 유한자는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며, 사건은 내재적으로 그 자신 이상을 사유하게 한다. 그러한 총체성 속에서 사건은 그 진정한 의미를, “즉자적으로 있는 바로 그 참모습”을, 즉 유한한 사건들로 형성되는 역사의 목적=목표를 드러낸다. 역사적 사건들은 목표=종말에서 그 의미를 얻어 총체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목표의 종말은 역사적 총체성의 종말이다. 루카치는 이에 따라 역사적 형성물들의 기원이 잊혀진다고 말한다. 물화는 망각이다. 그리하여 “형성물들은 단순히 존재하는 어떤 것, 경우에 따라서는 권력을 가진 것이지만 또 경우에 따라서는 다 썩어버린 어떤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형성물들이 곧 관습=제2의 자연을 이룬다. 이 제2의 자연은 “영혼이 기분을 위한 단순 원료로 취급하기에는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너무 가까우며, 영혼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적합한 표현이기에는 너무 낯선 것이다.” 제2의 자연은 존속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낯설고 맹목적인 힘으로 된다. “이 힘에 대한 인식을 사람들은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시금 자연적인 완결성=폐쇄성을 얻는다. 다만 고대와 달리 이러한 총체성의 내부에 인간이 접근할 수 없을 뿐이다. 그렇게 역사는 물화되어 인간이 감히 바꿀 수 없는 어떤 필연적 흐름으로 인식된다.

2.
이러한 맥락들에서 『소설의 이론』의 2부는 소설 형식의 역사적 운동을 추적한다. 루카치의 그러한 서술은 세르반테스에서 시작해 톨스토이에서 끝나지만, 그렇다고 톨스토이가 운동=발전의 어떤 종말점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자신의 시대에서 변증법적 운동의 완결점을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루카치에게는 아니었다. 또는 아니었었다. 루카치가 인정하듯이, 『소설의 이론』은 신칸트주의 아래에서, 즉 독일적 경향 아래에서 쓰여진 텍스트이다. 그러나 이후 1920년대 초중반 즈음에 루카치가 레닌주의의 권역으로 진입하자, 그에게 총체성은 러시아에서 여전히 시퍼렇게 눈을 뜨고 살아있는 것으로 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이 레닌적 전회 사이의 좌익공산주의자 루카치는 약간 다른 문제다.) 달리 말해, 역사적 진행에 비추어보자면 루카치의 저작들 중 가장 ‘최신’의 것은 『소설의 이론』이다. 루카치의 후기 리얼리즘론에 대한 클리셰적 비판들 중 하나가 바로 그가 모종의 외재적 관점을 작품에 기계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소설의 이론』에서는 (후기의 루카치가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던) 발자크가 거의 동일한 이유로 비판되고 있는 것이 과연 우연인가?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이론』이 추적한 이 운동의 다음 국면은, 루카치 본인의 주장과는 다르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전’의 것이 아니라 바로 모더니즘 문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루카치는 기계적 반영의 혐의로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을 기소했지만, 이러한 기소가 계급의식의 획득이 대중 또는 전위에게 선험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을 말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며, 파시스트 대중 동원을 통해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관점이 그 시효를 다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루카치가 모더니즘의 전부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모더니즘이  병리적으로 파악된 세계를 그려내기에 세계가 그렇게 파악되고 있다는 병리성 자체는 드러낼 수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루카치가 원한 것은 문제의 폭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아가 그 문제에 대한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그러나 (존-레텔에 따르면) 1919년 독일 혁명의 실패만을 계속 곰씹고 있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그러한 제시가 긍정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하튼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은 형상화를 통해 삶의 총체성을 다시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프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카프카가 드러내는 총체성이 완벽히 루카치적인 총체성은 아니다. 그러나 저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총체성의 구체적인 성격 역시 물질적-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완료된, 다시 말해 쇠퇴기에 들어선 후기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총체성의 사망은 이제 단순한 이데올로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객관적인 조건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도 되었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포스트모던하게 된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기록이고 관찰이었다. 이와 같이 모더니즘 문학은 총체성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더니즘은 이미 해체된 총체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총체성=메타서사의 종말에 대한 형식적인 반박 중 하나는 메타서사의 종말이라는 관념 자체가 또 다른 하나의 메타서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타서사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주장이 메타서사를 제시하지 않는 허무주의라는 리버스-니체적 비난은 유효할 수 없으리라. 역사=거대서사=총체성의 죽음은, 이에 대한 호오와 상관없이, 이미 시대정신으로 되었다. 총체성의 자리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앉아있지만, 그 무언가의 정체란 바로 총체성 자신의 시체다. 카프카를 비롯한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은 후쿠야마가 말한 소위 “역사의 종언”이 21세기가 단기 20세기과의 무언가 마술적인 단절을 통해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어쩌면 리스본 대지진을 맞닥뜨린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을 비판했을 적부터, 어쩌면 서고트족의 로마 침공을 접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써내려갈 적부터 일어난 일임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모더니스트들, 특히 카프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총체성의 이 시체를 현시시키고자 했는가?

3.
루카치는 모더니즘을 자연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다. 루카치에 따르면, 인식은 실재를 기계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지 선별이 이루어지고, 핵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구분되어 인식된다. 이에 따라 리얼리즘은 개별-특수-보편의 변증법에 참여하며, 현실에서 본질적인 것을 선별하여 그것들을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루카치는 모든 것을 세세히 묘사하고자 하는 자연주의가 이러한 선별의 필요성을 방기하였다고 생각했다. 자연주의에서 개별 사태들이 모두 동등하게 실증적으로 기술됨에 따라 총체성이 형성되지 못하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의식의 흐름 기법 특유의 혼돈성이고 또 20세기 모더니즘 자체라는 것이다.

실로 카프카에서는 본질과 비본질이 구분되어 묘사되기는 커녕 환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구분마저 흐려진다. 유명한 예시로는 「변신」의 초반부, 특히 그레고르가 방 밖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서 인물들은 물론 그레고르가 벌레로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혹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 당혹감은 갑작스러움에 대한 당혹감이지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당혹감이 아니다.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지배인과 가족의 반응도 ‘인간이 갑자기 갑충으로 변해버린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응보다는 외형적 징그러움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 이는 그레고르의 변신이 경제적 요소들에 거의 즉각적으로 매개됨에 따라 더욱 그렇게 된다. 그렇지만 구분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간략히 말해 「변신」에서는 그레고르의 방과 방 바깥이 대립 구도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환상성-현실성 구분에 대응한다. (가족들과 달리 파출부가 이러한 배치를 무시하듯 그레고르의 방을 드나든다는 점은 결말부에서와 같이 그의 제3자성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이것이 예시로서 의미하는 바는 브레히트식 소격효과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하기는 한 무언가가 카프카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소격효과의 가장 큰 특이성은 극의 진행이나 서술자의 서술과 관객/독자의 인식(의 진행)이 분리된다는 점인데, 이와 비슷하게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장남이 벌레로 변한 현상을 환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겠지만 독자는 그 환상성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변신」을 읽는다.

이러한 유사-소격효과는 단순히 「변신」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환상성-현실성 구분에 관해서만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소송』이나 『성』의 등장인물들은 「변신」의 환상성과 기능적으로 대응하는 관료제를 대부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독자는 여전히 카프카적 관료제의 기이함을 잘 인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궁극적으로 작품에서 총체성이 해체되었다는 것 역시 독자가 의식하게 하는 식으로 기능한다. 「강요된 화해」에서 아도르노는 이 비슷한 측면을 이렇게 언급한다:

“루카치는 엘리엇이나 조이스 등의 작가가 현실을 인식할 수 없다는 식의 제스처를 취한다고 끈질기게 비난한다. 그러나 그러한 제스처 역시도 막강하고 동화불가능한 사물의 세계와 무기력하게 그로부터 유리되어버리는 체험 사이의 단절에 대한 인식의 한 계기로 될 수 있다.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의 변증법적 통일성을 단순화하여 아예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른 예시로 『소송』을 보자. 『소송』의 문체는 매우 무미건조하지만 그렇다고 사태들을 실증주의(positivism)식으로 실정적(positive)으로 물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에서 모든 것은 부정적인 형상을 띄고 나타나고 또 그렇게 규정된다. 요제프 K가 맞닥뜨리는 세계는 한편으로는 해체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라는 주제 아래 총체적으로 짜여있다. 파편화된 사실들은 그것이 파편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 파편들로서는 단순한 파편이 아니라 하나의 총체성으로 된다.

결국, 총체성이라는 논항 자체는 20세기 모더니즘에서도 결코 제거되지 않았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모더니즘이 갖는 허무주의적 성격 덕분에,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퇴폐성 덕분에 가능했다. 허무주의는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하듯이 모든 것이 그 존재의 이성적 이유(Raison d'être)를 갖지 않고 있다는, 즉 멸망해야 마땅하다는 의식이다. 순정한 허무주의는 신이 없기에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인식이 아니다. 신이 없다면 오히려 그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신=총체성의 부재에 따라 모든 것은 존재할 권리를 잃는다. 이러한 신 없는 신학, 신 없는 종말론이 모더니즘이었고, 총체성의 종말에 대한 근대의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