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74ea887ebc816af63dea85e7479f2e2d3f8846e3a9887d087e3f6638

나는 반인간적인 접근법에 늘 매력을 느낀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이나 인간의 특수성을 찬양하는 것보다는 인간이 다른 것들과 무엇이 다르고, 그 다른 점을 어떻게 모방하거나 약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그 방식은 도나 해러웨이처럼 유인원-인간-사이보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문화적/외연적 방식일 수도 있고(어떤 이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쇼펜하우어나 프로이트처럼 인간의 내부 기제를 인간 외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기계적인 요소로 치환하는 실존적/내포적 방식일 수도 있다(인간은 어떤 식으로 살아 숨쉬는가?). (물론 당연히, 당대 생물학자 및 생리학자라는 실증적 분석가가 선행적으로 인간의 조건을 파헤쳤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은 늘 내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대부분의 삶을 초소형 컴퓨터(스마트폰)와 연결된 상태로 보내는 사이보그와 AI의 피드백을 받으며 점차 AI의 지능을 보조하기보다는 선택을 보조하는 구식 지능 모듈 이외의 인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덜 엄격한 방식으로 다른 종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접근조차 진정으로 반인간적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호러 장르에서 사유의 원천을 찾는 이들은 쇼펜하우어의 불교색 짙은 존재론을 다소 우회해, 의지라는 미지의 '본질'이 아니라 그저 인간 이외의,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다른 존재자들이 인간을 조작하고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물론 당연히, 마르크스는 한참 전부터 '자본'이 사회를 움직이며 자본가는 그저 인간화된 자본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어쨌든 그의 당시 주장은 지금 해석되는 방식으로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하위구조가 결정하는 상위구조에서 자본가답게 행동하지 않는 이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자본가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기에 그 자리를 점하는 사람은 인간화된 자본일 수밖에 없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결론에 가깝다. 구조주의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주장을 펼치는데, 인간의 자율성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는 다른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따를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구조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구조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처럼 이미 인간 내부에 있는 보편자거나, 푸코처럼 사회의 변천 속에서 점차 단단하게 굳어지며 분명해지는 초기 설계도이다.


키틀러는 이들과 확실히 다르다. 키틀러의 매체에 대한 접근은 호러 장르에 가깝다. 이들은 <더 씽>, <신체 강탈자의 침입> 등의 호러 작품을 재료 삼아 명백히 인간 외적인 존재가 자신의 확산을 위해 인간을 사용하는 주객전도를 주장하는데, 이들과 키틀러 사이의 거리는 사실 그리 멀지 않다. 키틀러는 문자 매체를 비롯한 매체가 인간 사유 및 행위의 조건을 결정한다고 판단하는데, 이 주류 매체는 곧 다른 구식 매체를 전부 자신 안에 포괄하며 인간이 자신을 퍼뜨리도록 반강제한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의 초입에서 언급하고 지나가듯, 디지털 매체는 이미 모든 것을 디지털화할 수 있고 디지털화하였기 때문에, <축음기>의 저술 시기부터 이미 완벽한 주류 매체였다. 디지털 혁명이 인간의 이식 가능성을 디지털화 가능성으로 탈바꿈하고, 인간 복제가 어떻게 다운로드 가능한 인간으로 변해가는지 보고 있으면 이 영향 자체는 분명하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규모를 갖게 된 매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퍼뜨리도록 하는 힘을 가졌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저 호러 장르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아마 이 부분은 키틀러보다는 매클루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클루언에게 뚜렷한 '주장'이라 할 만한 게 있는가? 그건 정말 모르겠다......)


실제로 <축음기>는 실존적 호러, 혹은 묵시록적 어조를 숨기지도 않는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의 변천은 시대적이라기보다는 패러다임의 변천사를 요약한 것에 가까운데, 그 끝에는 타자기가 대표하는 기계적 상징의 사회, 곧 점점 더 인간의 손에서 멀어지며 복잡해지는 상징들의 우주가 있다. 손으로 쓴 문자라는 매우 인간적이고 토속적인 주류 매체가 필체, 악보 등의 문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곧, 실재계-의 소리를 들려주는 축음기의 공격을 받는 것이 첫 단계. 기술 한계상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허구의 움직임을 자아내고자 한 상상계의 영화가 그 다음. 마지막으로 문자에서 의미 이외의 모든 특성을 지우며 규격화된 상징만을, 매우 빠르게 생산하고자 한 타자기가 인간이 소외된 상징계를 완성하며 끝난다. (키틀러는 이 상징계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이미 언급했다-전산화 시대) 그러니 사실 라캉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라캉의 개념을 차용한 셈이다. 유일하게 비슷한 점이라면, 결국 인간이 반드시 매체의 결정에 따라 상징계에 편입되어야 하며 그 상징계 바깥에서는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정도.


짐작하건대 이 투박한 실재계-상상계-상징계 도식이 키틀러의 핵심 주장은 아닐 것이다. 축음기의 발견과 릴케의 두개골 홈에 대한 매혹, 버로스의 컷업과 유사-축음기 정신분석가 등의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 키틀러가 드는 사례는 대체로 인간에게서 벗어난, 고삐 풀린 매체의 발전과 이 매체에 매혹되며 지배되는 인간 사이의 정적 피드백에 가깝다. 이 피드백에서 한번 벗어나면 더 이상 옛 피드백 속 사람처럼 생각할 방법은 없으며, 우리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보편적인 베르테르에 이입할 수 있는 이들을 상상할 수 없듯, 조작될 수 있는 인간 육성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사람들이 꿈꾼 환각 가득한 현실감을 상상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그 이상으로, {user_name}이 활약하는 서부극이 비슷한 내용으로 매번 다르게 변주되는 시뮬레이션 속의 뇌를 상상할 수 있다. 아마 이런 점이 그의 핵심 주장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의 주류 매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그 매체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상당히 강한 주장이다.


하지만 바로 그 주장 탓에 키틀러에게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다. 당대 매체와 너무나 분리된 주장보다는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거의 단절되는 수준으로 사유를 결정하는 영향력은 다소 과장된 감이 있다. 문학이 더 이상 사진이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묘사하거나 조직할 수 없게 된 것과 별개로, 축음기 이전의 사람이 문학 속을 '상상'하는 방식이 그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리는 없다. 디지털 매체가 주류 매체가 되기 전의 시대에 필립 K 딕은 환각제를 경유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뮬레이션 되는 우주를 상상하고 있었으며, 이 때 환각제가 '매체'라고 불릴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매체결정론은 꽤나 허술하다. 그럼에도, 꼭 매체에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키틀러의 주장에 굳이 반박할 만한 이유는 없다. 여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겸, 이보다 근거 자체는 훨씬 급진적인 버로스의 <The Electronic Revolution>을 추가로 읽어볼 생각이다. 혹시 알겠는가, 현재의 AI 붐이 한 차례 진정된 후, AI 시대의 버로스가 탄생할지. 기왕이면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의 AI 관련 철학은 보수적인 쪽이든, 진보적인 쪽이든, 너무 뻔하거나 유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