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글을 적으며 책장을 잠깐 바라보았다. 어쩌면, 오에 외에는 사랑하는 일문학 작가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 퍼거에 시달려서 <사양> 이후로 집어 던진지 오래고, 야스나리는 무슨 연유에선지 도저히 맞지 않아 설국 이후로 집어던졌고, 코보는 언젠가 읽으려 사둔 채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고, 일본 작가 중 책장을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하루키는 사랑은 커녕 원1나잇 정도도 되기 힘든 작품을 너무나도 많이 써왔다.
어찌보면 들고다니며 읽느라 항상 책장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백인일수집이 가장 정답게 느껴지는 내겐, 오에는 <만엔 원년> 하나만 읽어봤기에 정확하진 않을테지만, 차분하면서도 열정을 품고 있다는 평가가 적절할 성 싶은 매력적인 작가로 다가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미시마를 일본의 예민하고 정열적인 감성의 한 극단에 두고, 오에를 차분하고 성찰적인 감성의 반대 극단에 두고 일본 문학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물론 가장 최근에 읽은 작품이 이 <만엔 원년>이라 그 척도를 사용해볼 틈은 없었다.
1.
그리하여 차분하다는 평가가 제일 잘 어울리는 작가.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초반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였는데, 길게 늘어진 문체와 표현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 계속 읽다보면 묘한 지루함이 느껴진다. 다만 그게 기분 나쁘거나 책을 덮고 싶은 형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매력을 지니는 독특한 인상으로 이어졌다. 커피 한잔과 함께 읽으니 집중이 깨질 것도 없이 꼭 대나무 같이 올곧고 청명한 문체를 탐독할 수 있었다.
초반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내용은 역시 오이를 꽂아버린 친구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솔직히 이것 때문에 초반부 내용을 반 정도 잊어버렸다. 동생이 미국 가서 어떤 경험을 했고 부부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고 다 알겠는데, 그래서 이 내용 이기냐고..
그래서 초반부에 든 생각은 문체가 아름답다. 그것 하나 외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오이는 진짜 뭘 읽어도 잊혀질 것 같지 않다..
2.
중반부는 굉장히 평화롭게 흘러간다. 다만 그게 유쾌한 일상보단 불쾌한 가면극을 보는 기분이여서 그리 아름답다는 인상이 들진 않았다. 동생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맹목적이다. 원래도 그 취약한 감성 덕에 정상은 아니였던 동생은 더욱이 교조적으로 변해간다. 이 상황이 당연히 불쾌하지만 주인공인 미쓰사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방관하고 아내와 자신의 곪디 곪아 썩어버린 상처를 치료할 생각을 접어버린다.
주인공의 이러한 단절은 동생의 열정과 대비된다. 그 옳고 그름과 상관 없이, 그저 주저하며 머물러 있기만하던 미쓰사부로의 이러한 면모 때문에 독자들이 중반부에 많은 실망을 하지 않나 싶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게 지루하진 않았는데, 겐자부로의 특이한 비유와 깨끗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표현들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점점 고조되어가는 갈등이 오히려 흥미를 돋구는 느낌이였다. 아마 폭풍 전 고요 같은 표현이 어울리는 중반부가 아닌가 싶다.
3.
소설이 휘몰아치는 후반부는 그 서사의 진행부터 감정선까지 단 한 군데도 빼놓을 부분이 없다. 만엔 원년의 봉기를 다시 일으키려는 다카, 이제서야 그를 막아보려는 미쓰사부로. 무기력한 형을 비판해왔지만 사실은 자신 또한 여동생의 죽1음을 은폐했던 비겁자라는걸 깨닫자 그 비참함에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동생의 모습, 천천히 모든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주인공의 모습을 비춰준다.
더 이상 다카의 죽음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기에 당신은 비겁자라 비난해오는 아내에게 비밀을 말하진 않는 주인공은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동생이 그러했듯이 곳간채에 틀어박혀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을 묵상한다. 마침내 동생 또한 옳았음을 인정하고, 그 증오를 지워내고 이제는 성찰을 통한 회복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성숙해진 주인공을 그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무엇보다도 고평가 하고 싶은건 겐자부로가 단순한 인정만을 주제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가 과오에 대한 인정을 표현하려 했다면 동생을 끝까지 무의미하게 죽여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진정 표현하려한 것은 성찰을 통한 인정이였기에, 그래야만 상실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이러한 동생의 면모마저도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처는 지워낼게 아니라 흉터로 남겨내어 성찰해야함을, 작가인 겐자부로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4.
결말과 그 근처 부분에 관해서 좀 이야기 해보자면, 주인공이 다카를 인정한 지점이 군국주의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닐 것이다.
다카의 입장에서 주인공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거절한 일은 '나는 틀리지 않았다' 같은 정신승리적 구1원을 안겨주고 자1살을 통해 자기 위로적인 구1원을 성취해냈다. 린치를 당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모든 과오를 매듭지었다는 그런 끔찍한 형식의 구1원이다. 그의 성찰은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봐왔던 주인공은 이제 반성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무기력한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맹목적인 동생에 대한 증오에 대한 반성. 아내와의 관계 같은 그 모든 일에 반성해야함을 알게된다. 그래서 미쓰사부로는 곳간채에서 죽지 않았다.
다만 다카의 죽음으로 주인공이 단순한 구1원을 받았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닌듯하다. 아내와의 재결합이 삐걱거리지 않을 것이라고, 앞으로의 삶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로 단언할 수 없다. 소설적인 면에서 그 일부만을 살펴볼 수 있기에 그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앞으로의 수 많은 시련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뭐 하나 확정된 일이 없는 미래다. 그렇기에 이 결말은 유의미하다. 이제는 초반부와 달리, 어떤 일이 있어도 흉터를 보면서 반성하고 성찰하며 미래를 그려낼 수 있지 않나. 이 책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결국 이 작품도 상실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겐자부로가 하루키에게 상을 주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같은 주제를 변주해오던 재능이 있었건만. 단순히 피츠제럴드의 파쿠리에 가까웠던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성에 찰리가 없었다.
수용을 통한 구1원. 겐자부로가 작품에서 그려낸 저 주제는 완벽하지 않기에 아름다웠다. 어딘가 한 차례씩 삐걱거리는 부분이 있을때마다 성찰해낼 수 있었기에 더더욱 아름다웠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볼 일이 있을때, 그때 이 책이 나를 다카로서 반겨줄지. 미쓰사부로로서 반겨줄지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이길 바란다.
읽은지 8달 만에 쓰고 있어서 내용이 많이 빈약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나마 최근에 읽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써야하는데 또 시간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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