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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지나 점차 겨울로 들어서고 있다. 꽤나 길었던 연휴 동안 독서로 소일거리를 했던 터라 평소보다는 독서량이 조금 늘었다. 그래도 주의가 산만해지는 순간이 적잖아 내가 당초 계획했던 것 보다 적게 읽어서 내심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읽었던 책들이 다들 좋았던 책들이라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남은 두 달 동안 더욱 독서에 정진하기로 다짐하면서 지난 한 달간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겠다.

1. 만 ·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卍 · 少将滋幹の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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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가 한창 진행중이던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이자 근현대 일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 - 1965)의 중편소설집인 만 ·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를 읽어봤다. 내가 비록 일문학 작품은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나마 읽어봤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다른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른 작가들이 누가 있을지 찾아보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라는 작가가 탐미적인 작풍을 구사한다는 점이 구미가 당겼다. 그래도 그의 책을 직접 구매하는 건 망설이다가 동네 도서관에 이책이 꽃혀있길래 이번 기회에 대출해서 읽어봤다.

다니자키는 한결같이 성애와 색욕을 작품의 주제로 다뤘다고 한다. 특히 그는 아리따운 여성의 신체에 오랫동안 천착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책에 수록된 두편의 중편소설도 작가의 일관된 작품 세계를 잘 보여준다. 다니자키가 중견작가로 한창 활동하던 때 출간한 만은 근현대 오사카를 배경으로 하며 간사이 지방의 귀공녀에 명문대를 졸업한 변호사의 아내인 소노코가 취미삼아 동양화 수업을 받으러 나갔다가 도쿠미쓰 미쓰코라는 미녀에게 홀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소노코가 가장 집착했던 건 미쓰코의 알몸이었는데, 수업 시간에도 모델을 보며 나신이 도드라지는 양류관음 회화를 그리면서 얼굴을 모델이 아인 미쓰코의 얼굴로 바꿔 그려놓았고, 실제로 그녀와 친해지게 되면서 직접 미쓰코의 알몸을 보면서 그림을 다시 그리기까지 한다. 작가가 만년에 출간한 중편소설인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먼 옛날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구니쓰네라는 팔순을 앞둔 노인이 아리땁고 젊은 부인을 얻어 백년해로하며 사는 듯 했지만 모종의 음모로 고위관료면서 더 젊은 조카 시헤이에게 아내를 뺏기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본작에는 아내와 생이별한 구니쓰네 노인의 상실감, 간접적으로 시헤이의 음모의 가담한 헤이주라는 가신의 후회스러움, 구니쓰네와 그의 젊은 아내 사이이서 태어난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를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 한데 뒤섞여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기억 모두 한 여자를 향한 것으로, 세 사람 모두 향기, 온정, 광채 등으로 이상화된 그녀의 이미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큰 심적 고통을 겪는다. 이렇게 두 작품은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적으로 한 미녀를 향한 집착을 다루고 있다. 소재의 자극성만 보면 작품이 외설적이고 추잡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장이 글솜씨를 발휘한 작품인만큼 직설적인 묘사는 절제한 채 유려한 문체로 글을 더 감각적으로 만들었다.

두 작품의 특징을 더 꼽자면 각 작품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의 경우에는 소노코가 제3자인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인 서간체로 서사가 전개되는데 소노코, 미쓰코, 소노코의 남편, 미쓰코의 애인인 와카누기까지 얽혀 있는 치정극이 1인칭 시점에서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의 경우에는 현대에 사는 화자가 마치 실제 역사 속에 있었던 일을 추론해내는 것 거처럼 가공의 사료를 인용하면서 구니쓰네와 시게모토 부자의 비극적인 사연을 풀어나간다. 작가가 여러 가공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다양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덕분에 작품은 단순 옛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옛날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정석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을 거란 통념을 시원하게 깼다. 그래서 그냥 아름다운 문장만 잘 쓴다고 생각했던 제 예상과 다르게 이야기의 형식에 있어서도 아름다움을 중시하여 스토리텔러로서도 훌륭한 다니자키의 일면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다니자키표 소설이 내 취향에 꼭 맞지는 않아 이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꽤나 세련된 구성의 이야기와 탄탄한 문장력을 겸비한 수작이어서 작품의 질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 만족하면서 읽었다. 퇴폐적이고 외설적인 소재 때문에 읽기 꺼려질 수도 있지만 탁월한 구성을 지닌 작품인만큼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2. P세대 (Generation «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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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시절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소설가이자 현대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빅토르 펠레빈(Виктор Пелевин, 1962 -)의 장편소설 P세대를 읽어봤다. 그간 러시아 문학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불가코프, 고골 같이 여러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다만 이들 모두 한참 오래전 근대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이라 정작 현대 러시아 문학을 읽진 못했다. 그래서 어떤 걸로 현대 러시아 문학 첫발을 떼어볼까 고민하던 중 동네 도서관에 가보니 이책이 꽃혀 있었다. 그냥 속는 셈 치고 새로운 시도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이책을 대출해서 읽어봤다.

이책은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문학을 공부하던 시인인 바벨린 타타르스키가 하루아침에 소련이 붕괴되며 할 일이 없어져 전전긍긍하다가 대학 동문의 추천으로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갑작스레 무너지면서 맥도날드, 펩시를 위시한 서구의 자본주의 문물이 물밀듯이 러시아로 들어왔다. 본작의 주인공은 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재기넘치는 광고 문구를 지어냈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점차 큰 규모의 광고기획사로 이직하고 직급도 높아진다. 하지만 그는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광고를 넘어 미디어 자체의 본질이 소비지향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기며 사람을 돈 벌고 쓰는데만 치중하는 단순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수단이라는 걸 깨닫고는 깊은 회의감에 빠진다. 본작은 한 카피라이터의 이야기를 통해 급작스러운 자본주의 도입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90년대 러시아의 사회상을 굉장히 실감나게 담아냈다. 작가 본인부터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에 유년을 보내고 청년 시절에 소련 붕괴를 겪은 만큼 어느 정도 자전적인 성격을 띄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텔레비전과 광고로 대표되는 현대 미디어가 대중을 맹목적으로 소비하고 소비를 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도록 부추기는 걸 깊이 탐구한다는 점에서 본작은 현대 러시아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전세계 독자들에게도 와닿는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

본작은 미디어라는 현대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몽환적이고 신화적인 모티브를 따왔다. 작중 타타르스키가 좋은 광고 문구를 떠올릴 영감을 얻기 위해 마약을 흡입하는 일이 종종 있다보니 본작에는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환각 묘사가 제법 있다. 거기에다 작가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빌려왔다. 이슈타르 여신과의 교접을 위해 지구라트를 올라가는 고대 수매르인의 시련과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전승이 타타르스키의 행적에 운명과 예언이라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나타나 이야기가 포개어진다. 미디어라는 현대적인 요소와 환각과 신화라는 환상적인 요소가 서로 만남으로써 이야기 자체가 좀 난해한다는 인상이 들기도 하지만, 상반돼 보이는 두 요소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본작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작품 내 한번씩 피식할만한 시니컬한 유머와 러시아인이라면 꽤나 감탄할만한 언어유희도 보여서, 펠레빈을 두고 사이버 시대의 사이티델릭한 나보코프라고 평한 타임지의 단평이 마냥 과찬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난 이책을 그렇게 큰 기대를 하고 집어들진 않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작품의 높은 완성도에 감탄했었다. 본작의 시대 배경이 90년대 러시아라서 이전까지 읽어왔던 러시아 문학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지만, 본작에서도 깊고 철학적인 사유와 자유분방하면서도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 불가코프와 같은 선배 문학가들의 장점도 잘 계승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품 자체가 난해한 성격을 띄고 있어 가볍게 추천하긴 어렵지만 뛰어난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만큼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3. 에세이스트의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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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울 태생의 소설가, 번역가이자 독특한 작품 세계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가 배수아(1965 - )의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어봤다. 내가 비록 한국어를 쓰는 한국 사람이지만 국문학은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국 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채로 읽어볼만한 한국 소설을 추천을 받다가, 배수아라는 작가의 글솜씨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작가의 대표작부터 읽어보자는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들렀던 서점에 이책이 보여서 이번 기회에 집어들어와 한 번 읽어봤다.

이책은 작중의 화자이자 한국인 여성인 ‘나’가 독일에 체류하면서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언어학자 M으로부터 독일어 교습을 받다가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만 대략적인 시놉시스만 떼놓고 보면 이국적인 로맨스 소설인가 보다 싶을 수 있지만 실제 이책이 지닌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책은 등장인물 간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서사가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화자가 기억하는 바를 단발적으로 회상하며 전개되는 비선형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작중에서도 인용되는 독일의 작곡가 베른트 로이스 치머만의 어록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순착적인 연속은 단지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만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우리들의 정신세계에서는 그러한 연속은 실재하지 않는다.‘ 가 본작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화자의 가치관이나 단상, 읽었던 책이나 좋아하는 음악을 설명하는데도 상당한 활자를 활애하고 있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가상 인물의 에세이 같다는 인상도 준다.

이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언어에서 오는 단절감이었다. 작중 ‘나’는 독일어를 배우고자 홀홀단신으로 독일에 왔지만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도 독일어가 통 늘지 않는 점에 불안해한다. 첫번째 교사이자 연모의 대상이었던 M은 물론, 그녀의 독일 생활을 도와줬던 친구 요아힘과 두번째 독일어 교사인 에리히와 대화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의 빈곤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작가 본인도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공무원으로 일하다 돌연히 독일로 떠나 독일어를 독학하고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경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문체도 딱딱하고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야기의 얼개가 생소해서 약간 심드렁한 채로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주인공의 기억이 짜맞춰지기 시작하고, 생경한 문체로 적힌 문장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고, 마지막에는 이책이 꽤나 마음에 들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도 외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입장에서 심정적으로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다. 이래저래 생소한 점이 많은 작품이라 이책을 선뜻 추천하기는 망설여지지만, 소설인듯 에세이인듯 한 독특한 구성으로 한 인물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건 다른 책에서 얻기 힘든 값진 경험이기도 하고 분량도 부담스러운 편은 아니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4.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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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태생의 영국인 소설가이자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1954 - )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장편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내가 이책을 찾아서 읽어보게 된데에는 이시구로의 이름값이 적잖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약 2년 전에 작가의 전작인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을 감명 깊게 읽었던 경험 덕에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흥미가 동했던 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래서 한 1년 전에 도서전 비스무레한 행사를 갔었다가 이책을 꽤나 괜찮은 가격에 팔고 있어서 책을 집어왔다. 하지만 정작 책을 사놓고 바로 읽지 않아서 오랜 시간 방치해두다가 최근 들어서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봤다.

이책은 캐시 H. 라는 31세의 간병인이 어린 시절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에 다닐 적에 시귀었던 친구인 루스와 토미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언뜻 보면 주인공이 학창시절을 술회하는 평범한 소설인 것 같지만, 이야기가 점차 진행될수록 헤일셤이라는 학교가 철저하게 외부와 격리되어 있고, 학생들의 건강을 지나치리만치 신경을 쓰는 기이한 학교라는 점이 드러난다. 또 캐시를 비롯한 헤일셤에 다녔던 학생들도 학교를 떠나면 적어도 한 번에서 최대 네 번까지 '기증'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40세가 되면 삶을 '완료'하도록 예정된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점도 드러난다. 이책은 독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세상을 캐시라는 인물의 철저히 개인적인 시선으로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도 1인칭 시점으로만 진행되는 이야기를 점차 읽어나가면서 미스터리로 가득한 작품의 세계관을 우거진 풀숲을 헤쳐가듯이 차근차근 파악하게 된다. 이렇게 특이한 서사 구조 덕에 본작이 작가의 전작인 남아 있는 나날과 마찬가지로 차분하면서도 잔잔한 톤으로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해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상술하였듯이 본작은 공상적인 요소가 있는 작품이지만, 작품의 주제는 보다 더 보편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다. 주인공 일행은 길어야 4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삶에 자신의 몸을 기증하거나 기증한 이들을 보살피는 존재로만 예정되어 있는 가혹한 처지에 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부조리에 처한 이들의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들보단 오래 살아도 분명 살 수 있는 수명이 한정되어 있고 세상풍파에 저항하지 못하고 풍화되며 사그라드는 소시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중 헤일셤의 학생들이 본인에게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받아 들이듯이 대다수의 사람들도 자신에게 들이닥친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중 등장인물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더 가치있게 삶을 살 수 있는지 끝없이 고민하고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를 고찰하면서 삶이 얼마남지 않은 와중에도 이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이런 장면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끔 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여기에다 작가의 세련되면서도 서정적이지만 절제미가 돋보이는 문체가 더해져 이야기가 훨씬 더 깊은 풍미가 베어나온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작가의 전작을 읽어봤던 터라 이책에 어느 정도 기대를 안고 책장을 펼쳤었는데 다 읽고 나니 기대했던 것 이상을 느끼고 가게 된 것 같아 꽤나 만족했다. 또 남아 있는 나날을 마찬가지로 영어 원서로 읽어봤었을 때는 작품 자체가 1930년대와 1950년대를 다루었던 만큼 영어 어휘 자체가 예스러워서 읽기 조금 힘들었지만, 본작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어휘가 나와서 한결 더 읽기 쉽고 재밌었다. 그러면서도 문체의 세련미와 절제미는 전혀 퇴색되지 않아 이책이 꽤나 모범적인 영어 독해 교본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본작이 다루는 소재가 이제는 더이상 참신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소재라서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 높은 편인 만큼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5. 페드로 파라모 (Pedro Pár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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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할리스코주 아풀코 태생의 소설가이자, 평생 단편집 1권과 장편소설 1권만 출간했지만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전설적인 문학가로 기억되는 작가 후안 룰포(Juan Rulfo, 1917 - 1986)의 대표작인 페드로 파라모를 읽어봤다. 이름마저 생소해 보이는 멕시코 작가의 책을 찾아 읽어보게 된데에는 제가 그간 즐겨 읽었던 남미 소설가들의 작품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 - 2014)가 이책을 애독했고, 또 작품을 창작하는데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점이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좋아하는 내게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책을 찾아서 읽어보기를 벼르고 있던 중 때마침 이책이 중고 매물로 나와서 냉큼 사서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이책은 후안 프레시아도라는 사내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당부로 본인의 생부인 페드로 파라모를 찾아 코말라라는 마을에 방문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단 본작은 주인공의 여정에만 집중하며 선형적으로 플롯이 전개되는 작품이 아니라 코말라는 마을에서 군림했던 지주 페드로 파라모와 마을 주민들의 과거사와 단발적인 회상이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며 플롯이 이어지는 비선형적인 구조를 갖춘 작품이다. 꽤나 스토리라인이 복잡하다 보니 책의 분량은 별로 길지 않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힘이 부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여러 층위로 이뤄진 내러티브를 통해 암울했던 멕시코 혁명 시절의 고국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주의 학정과 이를 방관하는 부패한 중앙정부로 인해 병들어 가는 멕시코의 농촌사회, 이런 처지에 반발하며 벌어진 혁명과 이로 인해 배태된 폭력과 혼돈, 혼란에 빠진 사회 속에서 각 개인들이 품고 다니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룰포의 시적인 문장을 만나 안개와 같이 모호하게 표현된다. 그래서 책을 끝까지 다 읽어보면 창고 한 구석탱이에 박혀 있을 법한 골동품이 아니라 참신히고 파격적인 기법으로 관객들에게 생경한 경험을 선사하는 추상 미술품 같은 인상을 준다. 이렇게 다분히 지역적인 소재를 가지고 실험적인 문학 기법을 동원해 새로운 양식을 갖추면서도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는 명작을 보면서 왜 룰포가 굉장히 과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설적인 작가로 남을 수 있는지 어느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이책의 특징을 한가지 더 꼽아보자면, 본작에 무대가 되는 코말라라는 마을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장소라는 것이다. 주인공인 후안 프레시아도가 코말라에 당도했을 때는 마을이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되어 있었고, 그가 찾아나서는 인물인 페드로 파라모도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죽었지만 자신이 죽은지도 자각하지 못한채 마을을 배회하는 혼령들이 나타나면서 단순 폐혀였던 코말라는 현실과 초자연이 한데 뒤엉킨 마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상술하였던 현재와 과거가 시시각각 교차하면서 전개되는 플롯과 비현실적인 묘사와 포개어지면서 작품내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완벽히 허물어진다. 이렇게 작품 자체가 지닌 초자연적인 특징과 애매모호한 내러티브가 어우러지면서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 특유의 분위기가 다른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유의 생경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라서 이점이야말로 본작이 전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더 보태자면, 솔직히 작품 자체가 워낙 난해해서 책좀 깨나 읽었다는 저도 읽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간 재밌게 읽어왔던 작가들의 예술적인 정수를 직접 접하면서 작품 자체의 탁월함은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여러가지 종류의 가공된 초콜릿을 먹어 왔지만, 그 초콜릿에 원료로 들어가었던 카카오 원두를 맛보며 쓴맛에 괴롭긴 하지만 깊은 풍미에는 감탄하게 되는 것 같았다. 작품의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해서 적극적으로 일독을 권하기는 어렵지만, 평소에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이나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공부하는 차원에서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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