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와 나보코프

"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 나보코프

이 말은 나보코프가 도스토옙스키를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황무지를 지닌 평범한 작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그 까닭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을 들고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당포를 하는 늙은 노파와 여동생을 죽이고, 경찰의 모습을 한 정의가 라스콜니코프의 목을 거침없이 조여 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창녀 소냐와의 숭고한 사랑을 통해 정신적 갱생을 하는 아주 상투적인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을 향해 문학과 비문학을 구분한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다소 비아냥거리는 말도 한다. 사실 나보코프의 이 말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의 모티브를 신문 사회면에서 얻어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나보코프의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수준 미달인 작품일 수 있다.

나보코프는 러시아 대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1917년 혁명 때문에 몰락한다. 그리고 독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말년은 스위스에서 보내고 여생을 마친다. 그때 한 기자가 왜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는가? 라는 질운에 나보코프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에게 러시아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 이미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러시아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대답은 그의 작품 <롤리타>에도 있다. 작품이 현실의 복선처럼 말이다. 롤리타를 찾은 험버트 험버트는 다시 자신과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롤리타는 거부한다. 나보코프의  러시아가 14살의 유년에서 상실되어 버린 것처럼, 롤리타도 그렇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 정말 같이 안 갈래? 나와 같이 갈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거야? 그것만 말해줘.
- 없어요. 안 돼요 ( 롤리타 / 문학동네 / 449쪽)

이 물음과 대답은 나보코프의 조국 '러시아'와 관련이 있다. '돌아가지 않겠' 다고 말하는 것은 롤리타가 아닌 나보코프 자신의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다.

나보코프에게는 '언어'가 전부였다. 그럼 이 언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도 나보코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일 수 있다. 나보코프는 아주 콧대가 높은 작가였다. 이런 작가가 고골을 높게 평가했다. 반면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도스토옙스키를 이류나 삼류 작가로 말했다. 어설프게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설교적 문학을 나보코프는 혐오했기 때문이다.

나보코프는 "카프카나 고골의 세계처럼 완전히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한 가지 절대 조건이 있다면, 그 세계가, 그것이 존재하는 한 독자 혹은 관객들에 개연성 있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강의 205쪽)이라고 말하면서  '죄와벌' 속 도덕적 예술적 어리석음을 맹비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비판적으로 도스토옙스키를 분석한 나보코프지였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런 그도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죄와벌' 6부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살 하기 전 두냐와의 마직막  대화 장면은 롤리타에서 험버트가 롤리타를 만나는 장면과 거의 유사하다.

- 그럼 사랑하지 않는건가? 그가 조용히 물었다.
두냐는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 그리고..... 그럴 수도 없고.....? 그가 절망에 차 속삭였다.
- 절대! 두냐가 속삭였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끔찍한 투쟁의 순간이 지나갔다. (죄와벌 / 민음사 / 406쪽)

이렇게 도스토옙스키를 향해 진정한 예술을 만났을 때 맛볼 수 있는 즐거움과 만족감, 정신적 떨림과 같은 복합적 감점을 느낄 수 없다는 극단적 발언까지 했던 나보코프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런 나보코프가 고골을 높이 평가한 까닭은 고골문학에는 러시아가 없기 때문이다. 고골 문학의 핵심은 넌센스다. 외부의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 내부 언어유희적 세계다.  나보코프가 꿈꾸는 이상적인 문학세계였던 것이다.

나보코프 문학도 그런 세계에 준한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롤리타' 나 근래에 번역 출간된 '창백한 불꽃'..같은 작품에서 메세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보코프 문학 안에서 뭔가 외부 바깥 현실에 대한 어떤 관계를 읽으려는 모든 시도는 대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작가 본인이 직접 말하기도 했다.

"어느 나라나 사회적 계급 또는 저자에 관해 알기 위해서 그 소설을 읽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즉 이 말은 독자들이 유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작가다" 이 말은 메세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문학에서 현실의 반영으로 읽고자 했던 일군의 비평가나 연구자에 대해서 특히 프로이트에 대해 조소했다.  작가도 바깥에 있는데 작가들의 심리상태나 컴플렉스 이런 것들이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다 거부한다.

'언어'는 그 자체로 완결한 자족적인 세계다. 현대문학에서는 이 극단을 보여주는 두 작가가 나보코프와 제임스 조이스다. '언어'를 극단까지 밀어부치면 '언어'가 전부가 되면서, 언어가 세계이고 언어가 삶을 대체하게 된다. 모든 걸 환원해버리려고 하면서, 극단적인 언어지상주의 태도를 보인다. 나보코프 세계관이 그렇다. 나보코프의 문학이 이랬던 것처럼 삶도 그랬다. 평생의 내조자 아내가 없었다면 아주 사소한 일상의 일도 꾸려나가지 못했던 작가다. 글쓰는 것과 나비 잡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작가가 나보코프다.

우리는 보통 작가가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작품을 통해서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보코프는 이런 생각을 비웃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통찰이 있고 지혜가 있겠는가! 또 작가 자신이 '소설'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보코프는 소설이 현실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다. 만약 소설이 현실을 해석하고 어떤 통찰을 작품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나보코프는 쓰지 못했을 것이고. 그에게 현실은 러시아혁명으로 다 사라졌다. 이것을 감안하고 나보코프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

나보코프는 외부 현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심지어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다. 나보코프에게 사람은 나비보다 못하다. '롤리타'라는 작품을 읽으면 '롤리타'와 함께 일년을 거쳐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것이 나오는데 실제로 나보코프가 아내와 여행을 했다고 한다. 나비 채집 여행이었다. 그래서 '롤리타'를 미국문학이라고 얘기하지만 그 의미는 영어로 썼다는 것밖에 없다. 미국 사회에 대한 어떤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롤리타'가 뭐 미국 사회와 미국 대중문화를 비판하는...이런 평들이 있는데 다 헛소리다. 읽어보면 안다. 작가는 미국사회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회에 대한 비판도 나같은 사람 즉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과 애정이 있어야 나온다. 나와 내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로 개선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어야 미친듯이 비판하고 풍자하고 조롱도 한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그런 의미를 상실한 작가였다. 망명 이후에 자기 세계를 잃어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유년의 자기 기억과 언어 속에만 보존되어 있다. 그것을 지켜나가면서 확장시킨 것이 나보코프 문학이다. 여지껏 나는 이런 문학관을 비판했다. 그러나 나보코프라는 사람으로 그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나와는 다른 계급 귀족 집안 출생으로 어린시절이 너무 완벽해서 그렇다. 그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완벽한 세계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는데 그게 일순간에 파괴되어 버렸다. 러시아 혁명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그런 충격적인 현실에 대응해 맞서서 투쟁할 수도 있다. 나보코프는 그렇게 간 것은 아니다. 현실 생활에서 아주 무능력한 작가였다. 대단히 지적이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현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별다른 능력도 없었다. 이런 나보코프의 세계가 협소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본인 기억과 '러시아어'를 가지고 버텼다. 그리고 그것을 확장시켜 나중에는 그것만 가지고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통째로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보코프의 세계다.

그럼 나는 왜 이런 나보코프의 세계를 읽고 탐구하는 것일까? 근대소설의 특성은 리얼리즘에 있고 소설이 예술로 간주된 것은 그것이 허구를 통해 '진실'을 파악한다고 간직되었을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허구라고 해도 그것이 마치 리얼한 것처럼 생각되어야 하고 단순한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는 문학관을 가진 나 같은 사람이 굳이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할까? 처음에는 나의 지적허영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따져 보니 답이 없었다.

다만 이런 작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내게 충격이었다. 그 다음 나보코프의 작품들을 읽고 포용하게 되니까 나만의 '틀'에 갇혔던 생각들이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내 세계가 조금 확장되는 듯 했다. 이 나보코프의 세계도 내가 사회변혁을 꿈 꾸고 그 변혁을 위해 혁명이라는 극단을 생각하는 것처럼 언어의 한 극단이기 때문이다.

언어로 뭘 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극단까지 간 대표적인 작가이기 나보코프다. 나보코프 자신이 한 발언이기도 한데, 작품을 한 번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 번 읽는 건 안 읽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나보코프는 읽고 또 읽거나, 읽고 읽고 또 읽거나로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뭘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것을 진짜 미친듯이 생각했다. 소설을 어떻게 읽고 또 읽고...그렇게 읽은 것을 또 읽을 수 있지..그건 소설적 독법이 아니지 않는가...

맞다. 그건 우리 삶의 독법이다. 작가는 그렇게 삶의 한 극단을 언어로 보여 준 것이다.

여기서 내가 페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어차피 우리의 생각이라는 게 '잠정적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통찰한다면 좀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도 귀기울여 보는 수고를 하면 의의로 시야가 확장되는 선물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삶과 함께 같이 살아가야 될 사람들의 삶을...말이다.



facebook 김파란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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