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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W. G. 제발트가 소설가고 「토성의 고리」는 소설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책을 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토성의 고리 속에서 표류하는 운명을 맞게 됐다. 형식은 여행기에 가까운데, 내용은 여행기가 아니다. 제발트 자신이 여행을 하며 본 것들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많지만 대부분은 역사의 트리비아와 그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는 형식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논픽션인 줄 알았는데, 해설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토성의 고리」는 소설이 맞다. 형식도 내용도 중점이랄 것이 없어서, 애초부터 독자가 길을 잃게 설계된 작품이었다. 오토픽션이라고 불리는 작품들도 조금 읽어보았고, 철학 에세이처럼 쓰인 쿤데라의 소설도 읽어봤지만, 「토성의 고리」를 읽은 것은 정말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편 제목 '토성의 고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본문에서 토성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제사(題詞)에서 인용된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토성의 고리'에 대한 정의가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토성의 고리는 얼음결정과 유성체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은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들이 파괴되어 남은 잔해들이다. 즉 파괴당해 원래의 모습을 잃은 모든 잔해들을 토성의 고리라고 은유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치면 제발트가 작중에서 다녀간 곳은 모두 토성의 고리의 일부였다.
역사의 유구한 흐름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 혹은 우리가 모르지만 안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 많다. 이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존재를 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역사의 법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불가해하지만 필연적인 파괴 때문에, 형태가 있는 것들은 부서지고 형태가 없는 것들은 잊힌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왔던 곳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그런 일을 줄여보려고 역사를 배운다. 하지만 역사를 배우는 것만으로 이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재생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것은 조감도일 뿐이다. 그마저도 학계의 시각이 시시각각 변함에 따라 함께 변해서, 후세 사람들이 발굴하여 재현하려는 '역사적 원형'이라는 것은 결국 후세 사람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이런 기억의 파편이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실제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건물이 무너졌고, 너무 많은 잔해가 그 위에 쌓였으며, 퇴적물과 빙퇴석 또한 극복할 수 없다."
그런데 시간에게는 매우 유능한 일꾼이 있다. 바로 인간 자신이다. 문명도 자연도 인간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파괴가 가속된다. 심지어 인간의 파괴자도 인간이다. 함께 쇠락할 운명을 지닌 자들이 서로를 보살피지 못하고, 전쟁과 학살을 통해 서로의 파괴를 가속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은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이야기고, 지금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우(愚)를 회피하기 위해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사회와 경제에서 자유로워져 어리석은 일을 줄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자연에서 옷감을 얻는 양잠 사업조차도 결국 국가, 권력, 경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법인 것을.
유사 이래로 인간은 끝없이 자아성찰을 해왔다. 그렇게 철학을 비롯한 학문들은 크게 성숙해왔다. 하지만 국가들은 여전히 서로를 한심하게 괴롭힌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내 생각에는 파괴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파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결국에는 남의 얘기, 혹은 한참 전에 죽은 조상의 이야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가 서있는 땅 위에도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한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도 우리 자신에 의해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앞만 보고 살려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폐허를 여행한 끝에 돌아온 집도 언젠가는 똑같이 폐허가 될 것인데, 집을 화려하게 꾸민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먼저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부질없이 소멸되지 않게 애써야 할 것이다. 제발트처럼 잊히기 직전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예 역사가들처럼 이전에 있었던 무언가를 복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고 배우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의 사물을 파괴하지만 잔해를 반드시 남긴다. 그래서 폐허가 존재하고 교훈이 존재한다. 우리는 잔해를 통해서도 과거와 소통할 수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주변에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의 잔해들, 가령 이제는 비어 있는 상가, 가지가 부러진 나무를 보면서도 우리는 파괴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반복되지 않게끔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인들 제발트의 지적대로 '연소는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사물들의 내적 원리'이므로 인간의 비합리성과 시간의 힘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해치는 부당한 굴레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토성의 고리」는 자연의 필멸과 더불어 인간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은 자연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현명한 존재지만, 역사에서 그 현명함을 현명하게 사용한 적은 그다지 없다. 그래서 찬란한 문명과 윤택한 삶을 매번 새로 짓고 매번 다시 부순다.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며 자신의 발판을 없애다 보면 나중에는 미래를 그리기조차 어렵다. 그 부메랑들이 돌아오는 것은 지금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지금 그렇게 부서진 것들이 이미 우리 주변을 공전하고 있다. 토성의 고리를 구경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파악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현명함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토성의 고리가 조앗다면 아우스터리츠는 더 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