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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며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의 작품이며, 흥미가 가는 내용이였기에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책에서 주인공 에쓰코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자신의 남편을 간호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은 죽게 되고, 그녀는 한동안 독점감을 느끼게 된다. 즉 남편의 병간호 기간동안은 그를 전적으로 독점할 수 있었다는 역설적인 위안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에쓰코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그녀는 시집에서 시아버지 야키치, 그리고 그의 가족과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사랑과는 거리가 먼 보호와 소유, 억압의 관계로써 미묘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다 하인 사부로에게 연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하녀 미요에게 있었고, 이러한 관계에서 주인공 에쓰코의 소유욕과 질투심은 그녀를 파멸로 몰아가게 된다.

에쓰코의 행위는 단순한 사랑이 아니다. 그녀가 갈망한 것은 타인의 사랑이라기 보단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확증을 갈망한 것이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그 찰나의 순간 독점감을 통해 이에 대한 확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끝없는 악순환의 굴레로 떨어진다.

그녀가 사부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단 자신의 존재를 상대의 시선 속에서 확인하려는 자기확증에 대한 애착이였다.

미시마는 이 악순환을 통해 사랑의 부재가 낳은 파괴와 욕망을 자신 특유의 슬플 정도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와 표현으로 섬세하게 묘사해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소유, 지배, 질투 최종적으로 파괴. 이 모든 감정의 굴레는 결국 인간이 내면의 공허함을 덮기 위한 위태로운 몸부림을 보여준것이다.

읽는 내내 나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느 부분에선 그녀에게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파멸을 향한 사랑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한없이 잔인한 인간이면서도 한없이 인간적인 인물이였다. 사랑을 갈구하며 그 사랑을 파괴하고,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지만 결국 그 관계를 통해 자신을 파멸시킨다. 이러한 모순된 구조 속에서, 그녀는 자신 내면의 무한한 사랑의 갈증을 표현해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인상깊었던 문장은
‘에쓰코는 내일로 이어갈 희망을 찾으려 한다. 아주 작은, 평범한 희망이라도 좋았다. 사람은 그것이 없으면 내일을 향해 솟아 갈 수 없다. (…)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내일에 양보한다. 그럼으로써 새벽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였다. 이 대목은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 완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주는것만 같다.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고통과 파멸을 낳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갈망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능이자 숙명인것 같다.

결국 이 작품에서 미시마는 사랑 없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미시마는 그 대답을 ‘희망’에서 찾은 것이다. 희망은 거창한것이 아니라 단지 내일을 향한 조용한 수영을 다시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작은 동력원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동력원이 꺼지면 스스로를 파멸의 길에 내몰게 되는것이다.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한가지 질문이 생겼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갈망하고 있으며 그 갈망이 나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이 작품은 그저 비극적 사랑이야기가 아닌 욕망의 존재의 근원을 묻는 철학적 작품이였던거 같다.

금각사 읽었는데 이해 안되서 좀 더 쉬운 작품 골라서 읽어봄. 이제 금각사 재독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