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국사 연구자들은 일천즉천이나 매매, 상속, 증여된다는 점을 근거로 노비를 서양의 노예와 동일시하는 견해가 우세함.    


그리고 이때 러시아의 농노와 일본 게닌의 사례까지 거론하여 노비는 노예가 아니라고 강변한 사람이 이영훈 선생이었음 


미국의 한국사학자 제임스 팔레 선생이 조선인구 3~40%가 노비라고 주장하자 근거자료가 부족함을 지적하며 대체 조선 초기에 무슨 자료로 어떻게 그런 수치가 나오냐며 치열하게 논쟁했음.


근데 한 십몇년 지나고 나니 이젠 스스로 세종 저거 노예왕이요 이러네


대체 그때의 교수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왜 10년전 자기 자신과 싸우세요?



태조 왕건도 지방세력 포섭하려고 노비를 대대로 세습시키는 원칙을 인정했는데 그럼 왕건도 노예왕인가?


고려시대에는 무조건 일천즉천, 부모 한쪽인 노비면 노비였음. 원나라에서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활리길사라는 관리를 보내서 종모법으로 개혁해보려고 하니까


일천즉천의 노비제는 동국(고려)의 오래된 습속인데, 세조(쿠빌라이 칸)께서 너희 고려는 고유한 풍속 고치지 않아도 된다(不改土風)을 하셨는데 왜 지랄임


하고 왕과 권세가들이 똘똘 뭉쳐서 원의 노비제 개혁 시도를 좌절시키고 원나라에서 해방시켜준 노비들 도로 붙잡아옴.


우리가 흔히 신돈이 권세가가 불법침탈한 토지와 노비를 풀어주기 위해 전민변정도감 설치했다고 배우는데 그거 원종 때부터 우왕때까지 수시로 만들거임


강제로 땅 내주고 노비된 인간 풀어주려는 시도가 원간섭기 이후 내내 있었고 그게 전부 실패해서 계속 만든건데 


이영훈 선생은 고려때 노비는 나름 살만했음 ㅇㅇ, 조선 성리학 꼴통들이 노비가 주인고소하는걸 막앗음 ㅇㅇ 이러고 계심.


고려 초기부터 강제로 노비되는 사람이 많아 광종대 노비안검법이 나왔는데 좆도 그때는 노비가 살만했겠다. 최충헌 집권기 만적의 난은 그럼 뭐 집사놈이 살만한데 반란일으킨건가?



세종대에 노비수 증가 흐름이 있었던건 맞는데(정확히 말하면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다 왜란과 호란을 거쳐 17세기부터 줄어듬) 그건 특권층 내에서 왕과 신하들의 힘싸움, 사회경제적 발달양상, 외부의 커다란 자극 등이 맞물려서 나타나는거지 왕의 의지로 좌우되는게 아님. 근데 그걸 왕 하나한테 돌리는게 석학이 할 행동인가....



덤으로 대중역사서 읽을때 한가지 명심하면 좋은게 


막연한 환상으로 특정인 한명에게 개혁, 진보의 기수 혹은 수구꼴통 같은 프레임을 씌워서 그 사람을 기준으로 그 시대의 변화와 식자층의 담론을 평하는 일은 없어야함. 시대는 한 사람의 의지로 굴러가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