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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2월 정산에 간단히 쓰려고 했지만 왠지 후기를 쓰고 싶어서 써봄

진보와 야만이라는 단어 자체는 17세기 적부터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해묵은 표현이긴 하다. 저자 클라이브 폰딩은 그 비유가 20세기에도 훌륭히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다만 그는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보편적인 의미의 진보와 야만을 사용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이 시절이 대체 20세기 동안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던 좋은 시절이냐, 아니면 엿같은 시절인가 하는 것이다. 어느 곳을 주목하느냐에 따라 대답은 바뀔 것이다.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점은, 진보와 야만이 항상 함께 움직여왔다는 점이다.
그는 22장에 걸쳐 다양한 표어를 통해 그 둘을 포착해나간다. 가령, 20세기 동안 인류의 기술과학은 극적으로 발달했고, 생산량과 수명 또한 무척 늘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기술과학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질낮은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시켰고, 실질임금은 하락하고, 생산과 소비는 불균등하게 분배됐다. 기술과학의 진보와 늘어난 수명의 혜택 또한 세계의 일부 국가들만이 받았다.
사실 저자의 관점은 진보와 야만의 동시성뿐만 아니라, '전지구화'로도 요약할 수 있다. 가령, 세계 경제는 어떻게 더욱 세계화가 되었는지 제시한다. 물론 16세기 이후부터 세계 경제라고 할 것이 나타나기는 했다. 하지만 20세기의 전지구화가 어떻게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지를 보여준다.
그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민주주의에 관한 묘사다.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저자는 "각 국이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하는 것이다. 즉, 각 국가가 중심부인지 주변부인지의 여부, 근처 국가들과의 관계에 따라 민주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고 밝힌다.
다만 책의 앞부분은 각 국가들 사이의 상호의존성이 어떻게 구성되고, 이에 따라 각 국가들이 어떤 특징을 보이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반면, 앞서 언급한 민주주의 처럼 뒷부분은 주로 각 국가마다 그 주의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에 더 집중한다. 따라서, 중심부와 주변부의 여부가 각 국가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결정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짚지 않았다는 것은 아쉽다.
(물론 여기에 간단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고, 저자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간 것 같다. 어차피 그거 말고도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책이 엄청나게 큰 주제를 다루는 만큼, 각 문장의 밀도가 무척 높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책의 제목을 '실전압축 20세기사'라고 바꿔도 될 지경이다.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총 22장이니 책도 22권도 넘게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없다면 읽는데 무척 고달플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다 읽어낸다면,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일단 600장을 읽었다는 사실부터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이 후기인만큼, 왠지 있어보이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싶어진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마르크스가 "역사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한 명언이다. 그러니까, 요즘 유럽의 극우당의 약진이나 트럼프 당선, 이슬람 원리주의, 그 밖의 온갖 문제 때문에 우리 모두가 골 깨나 썩고 있다. 하지만 실은 이들은 20세기 당시 이미 자주 찾아뵈었던 친숙한 친구들이자 20세기가 싸고 튄 똥이며, 새삼스레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와 쉽게 도전은 못하겠군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