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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우면서도

어렵다, 신을 붙잡기는.
(1,2째 판)

은총으로 가득 차 있지만; 누구도

홀로 신을 붙잡지는 못한다.

(3째 판)


그런데 횔덜린의 경우, 민족과 창조자들의 시간의 고독하고 가장 신뢰할 만한 정상은 무시간적이거나 초시간적인 것, 혹은 이런 의미의 영원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넘어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그 위의 가장 멀고 가장 높은 시간의 정상들은 신들의 번개에 가혹하게 내맡겨져 있다. 그러나 신 자신이 바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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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대화>이다. 그런데 그다음에 관해 우리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의 현존재도 모든 이야기를 다한 것이 아니다. 대화라는 것은, 항상 지나가는 어떤 것으로서, 우리가 마음을 쓰고 있는 것과 시간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대화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대화 자체는 아니다. 혹은 시인의 금언은, 예를 들어 대학 건물의 화재와 같은 이러저러한 사건은 그날 그 도시에서 떠도는 소문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가? 우리에 대하여 무엇인가 말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대화인 것인가? 그러나 바로 이런 것은 우리의 존재와 별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이 금언은 더욱더 단어에 걸맞게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지 혹은 어떻게 존재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는지,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신들에게 승낙하는지, 거부하는지에 대하여, 신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우리로 하여금 신들의 요구 아래서도록 하고, 우리를 언어로 이끄는 사건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대화로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가 대화로 나타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요구된 채 말하면서,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언어로 이끌고, 존재자를 그것의 내용과 그것의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열어젖힐 때, 그러나 동시에 은폐하고 위장시킬 때이다. 단지 언어가 발생하는 곳에서 존재와 비존재는 열려진다. 이러한 엶과 감춤이 우리 자신이다.


─횔덜린의 송가: 게르마니엔과 라인 강 中






신상희 선생이 Dasein을 현존재 대신 터있음으로 번역한 이유를 좀 알 것도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