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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인 지능은 SF의 단골 소재 중 하나다. 외계인에 대한 공포 섞인 동경은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충분히 지능적이고 어쩌면 더 우월하게 지능적일지 모를 존재를 상상하고 있으며, 그 방식은 당시 과학이 발견한 지식에 따라, SF에서 무엇을 그려내고자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쩌면 약간은 시대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예를 들어 아시모프가 <최후의 질문>을 쓸 때에 그 지능은 보편 물리법칙을 계산하는 컴퓨터였고, 클라크가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쓸 때는 역사철학적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가였고, 렘이 <솔라리스>를 쓸 때는 각 부분조차 이해할 수 없는 유기적 행성이었으며, 베르베르가 <개미>를 쓸 때는 초유기체 개미 속에서 개인으로 각성하는 의지였다. 이런 약간은 냉소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SF에서 AI에 주목하는 것은, 사실 약간 낡았다. AI가 구체적이진 않은 공상의 차원에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공학적 차원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AI는 많은 신비를 잃었고, 저 멀리 어딘가에 사는 신비로운 외국인보다는 오늘 당장 요상한 냄새를 풍기며 내려오는 동료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 어디에서 지능을 찾을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원래 지능을 찾던 곳이 애초에 어디였던가? 우리는 지능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를 기준으로 삼아서 지능을 판단하고, 대체로 그럴수밖에 없다. 유인원이나 돌고래 같은 지적인 동물을 판별하기 위해 아동 지능 발달기를 참조했으며, 지능의 기계적 모방-곧, AI-을 위해 인지과학적 실험 및 이론을 활용했다. 거기에는 사람보다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기준 삼아 참고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있었고, 사람보다 덜떨어진 도구 활용과 사회성, 언어 구사 능력을 보며 비교할 수 있는 지능이라는 기준을 확실히 세울 수 있었다. 통속적인 의미에서 이 줄세우기는 여전히 작동하며, 사람과 AI의 지능을 동시에 비교할 수 있는 시험을 벤치마크 삼아 문제 해결 능력을 판단하고 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지능이라는 개념의 통속적인 힘은 반감됐다. 문제 해결 능력이라는 외재적 측정을 기준으로, 사람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제는 지능이 우주의 본질과 맞닿은 대우주의 심오함도, 각 개인의 의식의 특별함이라는 소우주의 심오함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인간 이성의 극단에 서 있는 순수 수학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든 아니든, 그렇게까지 본질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적인 지능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추신경계의 발전을 토대로 포유류-유인원-인류로 나아가는 산에서 고개를 돌려보면, 이 계통에서 벗어난 존재가 눈에 띈다. 문어. <아더 마인즈>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지만, 문어는 지능이 사람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따라 발전할 수 있다는 유의미한 증거로 남아 있다. 언어 대신 신체의 색 변화를 통해 소통하며, 대체로 사회를 유지하지 않고 홀로 문제 해결 능력을 개발해나가고, 각 다리까지 뻗어 있는 신경이 비교적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며 중앙이 완전한 통제력을 갖지 못한다. 사람과 어느 곳 하나 닮은 구석 없는 이 생물의 지능은 때로는 러브크래프트의 외계 종족처럼 인간에 대한 실존적 공포로서, 때로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이 뻗어나가며 점차 통제불능으로 변해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유로서 활용되곤 했다. 그러나 말했듯, 대안적인 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어의 지능은 <솔라리스>의 행성처럼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로 취급되기보다는, 사람의 지능을 기계화하였듯 마찬가지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분석 대상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사람의 의식과 같은 것을 찾으리라는 기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또 하나의 길이 갈린다. 피터 와츠의 <블라인드 사이트>는 사람의 의식을 찾기는 커녕 오히려 이 의식이 우리가 진화 과정에서 도달한 일종의 국소해에 불과하며, 우주 곳곳에 있는 대부분의 지적 생명체는 문어처럼 우리와 전혀 다른 동시에, 비-의식적이라는 가정을 보여준다. 이 의식 혐오의 역사 역시 참으로 길지만, 지금 이 지면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글, 레이 네일러의 <바닷속의 산>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닷속의 산>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시기에 나올 수 있는 SF이자, 그런 SF이기에 존재하는 몇몇 제약 속에서 완성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 신경망 기술은 지금보다 현저히 발달해 사실상 사람과 비슷하면서 모든 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보다 월등한 안드로이드가 실험적으로 만들어졌고, 동시에 여러 국제 기업은 이 기술이 적용된 기계 어선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 노예와 용병을 데리고 전세계 바다를 돌아다니며, 그 아래에서 난파선 속 문어 사회가 문자와 서사를 갈고 닦으며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대안적인 지능을 연구하는 주인공과, 군집으로서 지능을 갖는 드론 부대 조종사와, 사람들에게 실존적 위협을 안겨주고 섬에 유폐된 안드로이드가 한 섬에 모여 문어 사회를 연구하고 있으며, 다양한 물질적 토대 위로 체화된 지능이라는 주제가 문어/신경계/사회라는 세 층위에서 순환한다.



동시에 몇 가지 한계가 엿보이는데, 이 모든 체화된 지능이라는 인간 개인의 성장 서사가 대표적이다. 주인공은 더 이상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반사해 보조해주는 AI 친구 대신 더 직접적인 현실 관계로 나아가고자 결심하며, 잔혹하게 내부 구성원을 탄압하는 기계 어선은-비록 속은 것이나 다름없지만-에이코의 설득에 감화되며, 인류학자가 열대우림 속 사회를 관찰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문어 사회 속에서 일종의 지도자 격인 음유시인 문어가 인간을 관찰하다가 주인공을 공격하지 않고 물러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대안 지능의 기획은 꽤나 어색해지는데, 전혀 다른 토대에서 뻗어나오지만 결국은 하나의 형태로 수렴한다는 것을 예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종교적 수행만을 반복하는 수도승 로봇과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이윤을 추구하는 기계 어선이 이 지적 존재들의 세계에서 윤리를 따지는 것이 그리 의미가 없다는 암시를 주다가도, 결국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라는 낡은 윤리적 주제로 돌아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생태주의적인 SF치고는 흥미롭게도 기후 위기는 사실상 이 디스토피아적 사회 속의 실존적 위기에 대한 암시로서만 남아 있는데, 멸망보다 우선시되는 연대의식이란 대체 뭘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런 한계 덕분에 오히려 매력적인 글로 남았기도 하다. 프랭크 노리스의 <문어The Octopus>를 잠시 언급하자면, 자연주의 문학 전통에서 몇 안 되게 살아남은 '운명' 중 하나가 <바닷속의 산>에서도 부활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변화는 대체로 무력하며, 이 변화를 추동하는 총체적 사회라는 문어는 비협조적인 개인을 즉시 다른 협조적인 개인으로 대체할 것이다. 인간 본성의 유전이라는 운명이 유전학의 발달과 시대적 유행의 변화 속에서 죽어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운명은 여전히 강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재차 반박되기까지는 아마 사회 속 정설로서 남을 것이다. (어쨌든, 먹고 살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닷속의 산>은 바로 그 문어 같은 사회의 본성을 실제 문어의 유기적 지능 체계와 대조하는 동시에, 문어의 지능 체계를 인공 지능의 분석과 대조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는 문어만큼 지능적이며, 문어만큼 비-의식적이다. 이 의식을 상실한 에고-죽음ego-death의 서사 한가운데에 정작 개인들이 서 있다는 것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 비일관성이, 오히려 글을 매력적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