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만 읽었을 때는 몰랐는데
두 번째 작품을 읽고서 드는 생각은
한강 작가 작품 속에서 피해자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가득해도
폭력의 얼굴은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듬.
채식주의자의 경우, 남편이나 부모가 행하는 가학적인 모습이 등장하지만,
본질적인 폭력은 얼굴이 없는 육식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구조였고
소년이 온다 에서도, 광주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폭력들이 등장하고, 분명 전두환이란 이름이 호명되지만,
이미 지나간 폭력을 기억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대상은 구체화되지가 않아.
한강 작가는 왜 폭력에서 얼굴은 지운걸까?
아마도 폭력에 얼굴이 없어야, 서사가 없어야,
지금 이 폭력이 지극히 사적인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적인 것이라는 걸 들려주고 싶었던 걸까?
한 편으로는, 폭력에 얼굴이 없는 것이 우리의 다음을 위해 필요한 걸까?
피해자들에게 폭력이 얼굴이 없다면,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건 한강 작가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처럼 견딜 수 밖에 없지 않나?
견디고 그 다음 일어서려면, 무언가 하나 더 추동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또 한 편으로는.
요즘 사회 풍토를 보면
폭력에 지나칠 정도로 얼굴을 부여해, 특정화 시켜숴 줘패고, 조리돌림하고, 스낵처럼 간단하게 정의감에 취해버리고
그 다음 잊어버리는 게 빈번해져버린 세상에서는
폭력에 얼굴이 없어야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가 가능한 것일까?
모르겠음
작별하지 않는 다 읽으러 감
삶의 본질이니까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봄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 라는 문장이 너무 유명해서 작품에 녹아있을 줄 알았는데 작품에는 죽은 자를 바라보는 산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멈추는 거 같아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거랑 가해자의 얼굴이 없다는 거랑 무슨 연관성? 그리고 죽은 자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산자의 삶도 변화하니까 상호구.원이 들어있는거지 거기서 멈춘다고 보긴 어려운데?
@ㅇㅇ(106.101) 피폭된 삶이 상호구.원인지는 잘 모르겠음. 나한테는 여전히 견딞에 머물러있는 거 같음.
검은사슴 ㄱ 그게 정수임
읽어보겟음 ㄳ
동감.. 이런 면에서 한강 작품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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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좋은 글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