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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글이라 과열되면 자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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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기후 위기는 부정할 수 없다. 기후 위기가 본격적으로 다뤄진지 몇십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자면, 기후 변화 담론은 처참한 멸망과 감수할 수 있는 조정 사이에서 진동하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멸망이 찾아올지를 따지는 과정을 거쳐왔다. 화석 연료의 사용이 지구의 평균 기온을 높이는 온실 효과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 온실 효과가 그 자체로 지구 각 지역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영향이 온실 효과를 강화하는 피드백을 줄 수 있다는 문제가 속속 밝혀졌다. 예측할 수 없는 극단적 기후 폭의 강화, 안정적인 해류의 변동, 동식물 생태계 교란으로 인한 식량 위기 등 새로운 '감수할 수 있을' 부담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부담은 당연하게도 지역과 경제력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으로 전이되었다. 화석 연료를 가장 고밀도로 사용하는 이들이 폭우와 태풍에 짜증을 낼 때, 이 화석 연료 산업에서 가장 주변부에 있는 이들일수록 직접적으로 폭염에 노출되고, 해수면 상승으로 피해를 입으며, 점차 기후 변화가 감수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변화가 느껴질수록 오히려 기후 위기 부정론이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반복되는 아이러니일지니. 화석 연료는 근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필수적으로, 사실상 물질적 토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대체하기에는 피해를 볼 선진국 시민이 너무나 많다. 직접적으로 화석 연료 산업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매일 출퇴근을 위해 대중교통이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만 하더라도 석유 사용량 제한에 기겁하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자신 역시 선진국 반열에 오르고 싶어하는 개발도상국의 화석 연료 사용에 대한 갈등도 무시할 수는 없다. 기후 위기에 대한 국제적 합의는 죄수의 딜레마와 사다리 걷어차기 사이의 어딘가에서 맴돌다가, 재차 석유 수출국이 된 미국의 공격적인 기후 위기 부정론과 함께 새로운 차원의 갈등으로 거듭났다: 이제는 기후 변화를 어느 수준까지 막아내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애초에 기후 변화가 기후 위기이기는 하냐는 질문에 대한 근거를 매번 제시해야 한다.
<이 폭풍의 전개>는 이런 현재 속에서, 실질적으로 무용하게 느껴지는 생태학계의 이론적 흐름을 비판하고, 화석 산업이라는 과거에서부터 진행된 산업이 어떻게 장기적 변화의 관점에서 현재까지 누적되었는지를 논하기 위해 고전적이지만 유용한 사고틀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마르크스주의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생태학계는 현재 세 가지의 조류를 따르고 있다. 브루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라투르에 더해 들뢰즈의 영향을 받은 신유물론, 고정된 인간 개념을 탈피하고자 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이 모두에 대한 말름의 비판은 꽤나 단순하다. 인간과 자연, 물질(자연)과 사회라는 이분법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방식이 오히려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영향을 받았고, 어디까지가 물리적인 연쇄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분석을 흐리게 만들어, 이론의 실용성을 극히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연과 사회를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연속체 속의 하나로 보는 것만으로는 분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는 자연 속에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지만, 사람의 육신 속에서 의식이 싹트는 것처럼 그 물질적 토대만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창발성 속성을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예시를 들자면, 인간 사회의 산업을 동작하게 해주는 화폐를 그 동전 및 지폐의 물성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화폐를 유통시키며 동작하는 산업이 화석 연료라는 물질적 토대 없이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없고,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의 특정 개입이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물리적 연쇄가 있고(화석 연료의 대규모 연소 등) 이 연쇄의 시작에서 끝까지의 과정을 분석하는 데에 현재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입자의 흐름을 통해 인간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넌센스를 낳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론은 분석을 무력화하고, 그로 인해 분석이 문제시해야 할 사건과 책임 주체를 가린다. 행위성의 확대 해석 역시 마찬가지인데, 물질로부터 창발하는 속성과 동식물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지향성과는 별개로, 행위성을 논하는 것은 훨씬 좁은 의미로, 특히 의도성을 파악하는 한에서 이뤄져야 한다. 저자는 카울바흐의 행위철학을 언급하며 보다 더 현실적이고 나은 접근법을 설명하는데, 사람을 칼로 찔렀을 때 칼에게 죄값을 조금이라도 묻는 것은 이상하지만, 목줄 없는 사냥개의 공격에 사냥개의 주인 뿐 아니라 사냥개 역시 힐난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최소한, 화석 연료는 사람의 개입 없이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연소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이 연료가 스스로 연소되고 싶어하는 행위성을 띤다는 해석은 이 반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분석이 흐려질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회의 누가 어떤 일을 하였는지에 대한 분석 역시 흐려진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 라투르를 비롯한 사회학자들의 '네트워크' 분석은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서 이미 제시되었던 구조적인 유물론 속에서 이뤄질 수 있으며, 이 틀 속에서 마르크스는 '누가' '어째서' 경제의 흐름을 유지시키고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렇게 다시 고전적인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구도가 등장하는데, 화석 연료 산업이라는 맥락에서 이 구도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화석 산업에 올라탄 이들은 단순한 부정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기후 위기에 대한 연구를 방해하거나 대중적 신뢰도를 격하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이 자본가 개개인의 파급력은 그 외의 다른 이들, 동식물을 포함한 여타 자연적 '존재자'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높다는 점이다. 기후 위기를 대처하기 위해서는 적을 분명하게 가릴 필요가 있으며, 기후에 영향을 주는 매 사건에 주목하고 그 책임자를 확실하게 판별해 공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연'의 적이 아니다. 특정 석유 기업이 온실 가스 배출량 로비에 직접적으로 개입했을 뿐이다. 진지하게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런 명제를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론적 분석이 사용되어야 한다.
사실 세상이 기후 위기로 인해 언젠가 멸망할 것을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현실적이고 공격적인 선언을 보면 뜨끔해지는 부분이 있다. 멸망은 결코 기독교적 의미처럼 단발성으로, 모두에게 내려오지 않을 것이며, 저지대에서부터 차오르는 물이 서서히 고층 빌딩 옥상까지 다다를 때까지 느리고 차별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멸망 과정 중인 것일수도 있으며, 본격적으로 미국의 행정부를 장악한 기후 위기 부정론자는 일종의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종교적인 사변을 굳이 더 풀어나가지는 않도록 하자.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기후 위기를 우려하는 사람으로서, 말름이 그래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지에 대한 약간의 논평을 하는 정도로 끝내는 것이 나을 텐데, 말름은 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대중 사회 및 시장의 해결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기후 위기 부정론처럼 국가 수반을 좀 더 적극적으로 장악해 위에서부터 강제되는 제도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상술한 일반적인 선진국 시민의 심리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여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화석 산업의 개입을 감안하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보다도 이 변화를 무시하기 힘든 시기가 되었을 때, 옛 기후 위기 매체가 늘 다루던 것처럼 국가적 음모론과 격리와 의도적 방치-홀로도모르와 우한 폐쇄 사이의 어딘가일까?-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의 어휘를 빌려서 말하자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발악 끝에 더 이상 참다 못한 사람들이 자본가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밀고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것처럼, 무언가 새로운, 기존 시민이 상상할 수 없었던 재편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라도 좀 더 오래 살아 있고 싶다. 더 나은 삶이 좋은 삶으로 바뀔 수 있는 미래를 꿈꾸지는 않지만 말이다.
P. S. 몇 가지를 좀 더 읽어보고 있다. <폭염 살인>, <재앙의 지리학>, 조금 낡았지만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조만간 정발될 예정인 킴 스탠리 로빈슨의 <미래부The Ministry for the Future> 등. 마이크 데이비스의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가 살짝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쩌면 좀 더 미래에도 인류가 남아 있다면 이 기후 위기 시대의 변화를 후기 빅토리아 홀로코스트처럼 일종의 반쯤 의도적인 학살로 해석할까? 둘 다 그렇게 보지 않거나, 둘 다 그렇게 보는 식으로 나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과열될 정도의 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댓글로 불타서 떡밥글 올라오면 그 때 자삭 부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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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철제탁자 내가 안 읽고 예상하는 거긴 하지만 하고 댓글 달려다가 소개문만 봐도 레닌이네
읽어본바로는 아무래도 역사성 흐려지고 행위자에게 책임 묻는게 난망해지기에 날 세워 비판하는거 같음. 별개로 라투르는 사회과학계에서 보기에는 의구심 드는 부분도 꽤 있고.
뒤로 갈수록 특정짓는 방식이 너무 빨개서-현실적으로 산업 구조를 그래서 어떻게 바꾸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폭력적인 구조조정과 전체적으로 낮아진 삶의 질 외에는 안 나올 거라고 생각-기후 위기 부정론만 아니었으면 공감은 못했을 책인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왜 이러는지는 이해가 가는 편
@수고양이무어 얘는 레닌 참조할정도로 급진적이라 현실적으로 산업구조 어떻게 바꾸냐는 질문 하면 안됨 ㅋ
단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의 체제를 '화석자본'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과 그로 인한 기후위기의 단초와 지속이라는 틀을 제시하면서 기후학이나 생태학 등으로 뻗어나가는 게 인상깊었음. 비슷한 사람으로 존 벨라미 포스터도 있던데
생태사회주의 쪽을 조금 알고는 있었는데 이 정도로까지 레닌-마르크스스러울 줄은 몰랐음
@수고양이무어 아마 생태사회주의 중에서 가장 맑스-레닌주의 전?통에 충실한 학자라면 맞을듯. 요약하면 우리가 빨개지지 않으면 지구는 계속 빨개질 것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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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발악 끝에 더 이상 참다 못한 사람들이 자본가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밀고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것처럼, 무언가 새로운, 기존 시민이 상상할 수 없었던 재편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 난 이젠 이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더 절망적인듯. 미디어와 세속화가 영혼에서 뭔가를 거세해버렸음
양차대전때문에 자본가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밀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지. 파시스트는 자본주의자도 싫어했으니깐.
아도르노가 노년에 공화 헌법 질서 내 개혁에 찬동하고, 호르크하이머는 아예 우익으로 나아간 게 생각나네
해상도가 낮은 탓인가 자꾸 어디 사이에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