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폴 베를렌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르튀르 랭보의 시를 읽어보려고 이것저것 조사를 하다가였다. 뭐랄까, 랭보의 방탕함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의 상대였던 베를렌은 그보다 더한 인물이었다. 흔히들 그러듯이 랭보를 견자(見者)라고 칭한다면 아내를 버리다시피 하고 랭보에게 총을 쏜 베를렌에게도 견자(犬子)라는 칭호를 줄만 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컬트적인 행보를 보이고도 시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그의 문학 세계에 관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베를렌의 이야기를 알고 나서 도서관에 랭보의 시집을 빌리러 갔는데, 정작 완역된 것이 없었다. 그냥 돌아가려다가, 문득 생전에 두 시인이 그랬듯이 랭보의 시 선집 옆에 베를렌의 시 선집이 있었다. 모종의 계시를 느껴서 베를렌의 선집을 빌려 왔다.


시를 읽으니 베를린의 뒤틀린 생애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베를렌은 사랑을 주체할 수 없는, 영원히 끓는 피를 가진 채 태어난 사나이였다. 아직 시를 많이 읽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시들 중에 베를렌의 연애시보다 달콤하고 절절한 것은 보지 못했다고는 자부한다. 편지 교환이 연애의 정석이던 시절에 베를렌의 시가 알려졌더라면 많은 연인들의 추억 속에 베를렌이 깃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도가 병기되지 않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마 랭보와의 파국 이후가 아닐까 싶다. 이때 베를렌은 시를 통해 신을 만나고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한다. 세상에서 볼장 다 보고 위안만을 얻기 위해 그나마 가진 것들마저 버리려는 처절함이 절로 느껴지는 시들이었다. 이렇게 신앙에 천착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사색적인 시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해설이 자세하지는 않아서 베를렌이 만년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좇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숙해진 시인이 사랑 외의 다른 기치로도 시를 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선집에 그런 시가 많이 있지는 않았다. 더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베를렌과의 이번 만남은 솔직히 깊지는 않았다. 시작 자체도 우연이었고, 시집을 꼼꼼히 읽었다기보다는 짬날 때마다 한 편씩 읽었기 때문에, 베를렌이라는 인간이든 그의 문학적 세계든 깊이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 이번 한 번으로 끝내기에는 이번에 마주한 문장들이 너무나 뜨겁고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베를렌의 시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은 이뿐만이 아니다. 베를렌이 방황 끝에 어디에 이르렀는지, 마지막에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더 알고 싶었다. 베를렌은 정말 많은 시를 지었다는데, 그의 시 중 극히 일부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번역된 다른 책들이 더 있기는 한데, 학교 도서관에는 시선 한 권이 전부다. (희한하게도 해설서는 조금 더 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시집이다.)


그래도 폴 베를렌이라는 존재는 도무지 불문학사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라고 들었기에, 언젠가는 그의 시가 더 많이 번역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아울러 베를렌뿐만 아니라 많은 서양 시인들의 시가 적극적으로 번역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말로 된 시도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한껏 서구화된 세계에서 나는 서구의 것에도 쉽게 감동을 느낀다. 베를렌뿐만 아니라 어째서인지 완역된 시집이 보이지 않던 랭보, 여름에 나를 반하게 했던 에밀리 디킨슨, 그밖에 다른 시인들의 시가 선집이 아닌 완역된 시집으로 매대에 서기를 바라 본다. 마지막으로 베를렌의 시 중에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긴 시 하나를 여기에 배껴본다.


이젠 근심을 내려놓고 네 길을 가라!

길은 곧으니, 너는 오르기만 하면 되느니라.

하지만 값나가는 유일한 보석인 마음의 가난과,

전투가 벌어질 때 유일한 무기인

네 편이 되어 줄 신(神)은 잊어선 안 되지.


무엇보다 소망을 간직해야만 해.

어둠과 고통이 조금 따른들 무슨 상관이랴?

길은 바르건만, 죽음이 그 끝에 있구나.

그래, 무엇보다 모든 소망을 간직해야만 해.

지옥에서 죽음이 너를 위해 기쁨의 잠자리를 준비하는구나.


온갖 부드러움으로 너 자신을 부드럽게 만들어라.

인생은 추한 것이며, 게다가 너와 닮았지.

낮은 목소리로 네 믿음을 시험하는

못된 조심성을 떼어 놓으려면,

단순한 마음으로 언덕에 올라 노래까지 불러라.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언덕에 오르고,

과오를 미워하는 죄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노래하라, 길 위에서 네가 잠들도록

너의 적이 네게 보낼지도 모르는 권태에

대항하기 위해, 심지어 기뻐하라.


저기 언덕 위에 평화가 자리해

영광의 취주악 연주 속에 빛나고 있으니,

해묵은 함정과 유혹하는 늙은이를 비웃어라,

황홀한 심정으로 흑백의 밤 속으로 오르라.

벌써 수호천사가 기뻐하며 네 위로


승리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 「이젠 근심을 내려놓고 네 길을 가라」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