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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죽음.





그렇지만, 재판관 여러분! 여러분 또한 죽음에 대해서는 희망차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한 가지는 진실이라고 생각해야만 하고요. 즉 선량한 사람에게는, 그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간에 그 어떤 나쁜 일도 없으며, 또한 이 사람의 일들을 신들이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지금의 제게 닥친 일들은 저절로 생긴 건 아니지만, 제게 있어서 이 점은, 즉 이제는 죽어서 골칫거리들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제게는 더 잘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론>, 41d, 플라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 유명한 삼단논법의 예시처럼, 로고스는 언제나 죽음 가까이에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로고스의 살아있는 현현처럼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서구의 로고스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피어난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4부작은 플라톤의 (중기작인 파이돈을 제외하면) 초기작이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먼저 보여준 후에 그의 철학을 발전시켜나간다. 그렇다면 로고스는 죽음 이후의 것인가?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에 종사하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다름 아닌 죽는 것과 죽음을 스스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으이. (…) 지혜를 사랑하는 이(철학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혼으로 하여금 몸과의 결합 상태에서 최대한 벗어나게 하는 사람임이 분명하겠지?” <파이돈> 64a-65a


우리 인간들은 일종의 감옥에 갇혀 있으며, 아무도 이에서 자신을 풀려나게 해서도 아니되며(…) 누군가가 그것(지혜)의 탐구에 있어서 몸을 동반자로 대동한다면, 몸은 방해가 되는가 아니 되는가? (…) 즉 우리가 아무 것도 정확한 것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고 말하는 그런 것인가?” - <파이돈> 62b, 65a



철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추구한다. 살아있는 몸은 감옥이고, 혼은 이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벗어나서 영원한 지혜를 획득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라고 소크라테스(플라톤)는 주장한다. 그는 어째서 죽고자 하는가? 정확히 그는 불멸하기 위해 죽고자 한다. 그가 <파이돈> 내내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영혼의 불멸성이었다.


그러니 죽지 않는 것(to athanaton)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하는 게 필연적인 일이지 않겠는가? 죽지 않는 것이 파괴될 수 없는 것이기도하다면, 혼에 죽음이 닥친다 해서, 그것이 소멸할 수도 없으이.”- <파이돈> 106a


영혼을 불멸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플라톤이 채택한 방법은 영혼을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시미아스의 의문(만약에 영혼이 조화로 비롯되는 것이라면, 죽음으로 인해 조화가 풀린 몸에서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가?)을 반박한다.


그러니까 조화는 그것을 이루는 것들을 이끄는 것이 합당한 게 아니라, 이것들을 따르는 게 합당하이. (…) 혼은 몸과 관련된 감정들 또는 상태들에 동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항하기도 하는 것인가? (…) 그리고 그 밖에도 몸과 관련된 감정들 또는 상태들에 대해서 혼이 저항하는 경우들을 아마도 우리가 수도 없이 볼 걸세.” -<파이돈> 93a-94b


혼은 조화하는 몸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이끄는 주체다. 그리고 그 혼은 “훌륭한 혼”이다.


모든 생물의 혼은 똑같이 훌륭한 혼들로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네.” - <파이돈> 94a


소크라테스(플라톤)는 혼을 주체적인 실체, 훌륭한 실체로서 불멸하게 만든다. 혼은 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그것은 진리를 이미 알고 있으며, 이를 현존하는 몸에 상기시키며 훈육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실체에게는 그것이 반하는 특성이 들이닥친다면, 그것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떠나가 버릴 뿐이다. 만약 뜨거움이라는 특성을 가진 불에게 차가움이 닥친다면, 불이라는 실체는 사라지기 보다는 다만 물러날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사람에게 죽음(혹은 훌륭하지 않음)이 닥칠 경우, 그의 사멸하는 부분은 죽겠지만, 그의 주지 않는 부분은 죽음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온전한 상태로 불멸하는 것으로 떠나가” 버린다. 106e

이런 혼의 불멸성 논증에 대해서 칸트주의자들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는 술어가 아니라고. 혼이 훌륭하다는 것에서 혼의 존재와, 그리고 그것의 불멸성이 추론될 수 없다고. 비모순성은 분석적 명제에 해당하지만, 혼의 훌륭함이라는 개념에서 그것이 존재하고 또 불멸한다는 종합적 명제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플라톤)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혼에 대해서 얘기할 때, 이것은 언제나 순수하게 지성적인 개념이다. 경험적 정보를 이것에 끼워넣는 순간, 이는 순수함을 잃어버린다. 나는 순수한 혼, 즉 이데아를 위해서 이것이 경험적 실체임을 포기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세계에서 이데아는 육체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육체가 욕망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육체인 한, 이데아는 자아를 잃은 무기물이다.


다시, 로고스는 죽음 이후에 오는가? 로고스의 본래 뜻은 “말”인 바, 로고스는 그것을 발화하는 인간을 벗어난 무기물이 된다. 로고스가 발화될 때, 로고스 안에서 발화자는 죽는다.


“’소크라테스, 실로 사랑은 당신 생각처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게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네.

그게 아니면 뭡니까?’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낳음과 출산에 대한 것이지요.’

좋습니다.’ 내가 말했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럼 사랑이 왜 낳음에 대한 것일까요? 낳음은 가사자에게 있는 영속적이고 불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 <향연>, 206e-207a


[계속 이어질 미래를 위해 불사의 명성을 쌓는 것]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 (…) 그들은 이것을 위해서라면 제 아이들을 위해서 그러는 것보다 훨씬 더하게 무슨 위험이든 감수한다든지, 돈을 쓴다든지, 어떤 노고든 마다 않고 한다든지, 또 그것을 위해 죽는다든지…” -<향연>, 208b-d


우리는 사랑이 우리에게 쾌락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반대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쾌락을 포기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불멸하기 위해, 불멸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자 한다. 소크라테스는 쾌락 원칙 너머 죽음 충동에 다가간다. 그것이 Philo-Sophia ,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의 로고스는 불멸하는 무기물로서 남아있다. 무기물인 종이와 무기물인 잉크, 그리고 무기물인 말(로고스)로 이루어진 이 무기물인 책은 그의 화석이다. 철학은 그렇게 죽음 이후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