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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1970년대말과 1980년대 초에 TV 미니시리즈 붐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HBO도 넷플렉스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그냥 TV 방송국 중심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주(State) 단위의 지역 방송국과 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전국구 방송국 간의 갭이 벌어지면서

NBC 등과 같이 미국 전역에 방송을 송출하는 TV 방송국의 힘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국구 방송국의 경우 자신들의 입장을 공고히 하면서 시청자들을 더 끌어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나름대로 "스토리텔링이 뛰어난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규모 자본을 투자한 TV 미니시리즈를 만들어 선보이게 됩니다.

 

TV방송국에서 '극장 영화'와 맞짱 뜰 수 있는 무기를 찾고 있었던 즈음이었고,

극장 영화가 시간관계상 대폭 압축할 수 밖에 없는 방대한 스토리를 "미니시리즈"라는 형태로 풀어내면서

극장 영화에 못지 않은 캐스팅과 인력을 대규모 자본을 통하여 쏟아부어서 퀄리티를 높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죠.

이렇게 나온 TV 미니리시즈는 정말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어윈 쇼 [야망의 계절], 허만 우크 [전쟁의 바람], [전쟁과 추억], 알렉스 헤일리 [뿌리] 등은

애당초 퓰리처를 수상했던 (또는 그 못지 않은) 역량을 가진 우수한 작가들의 최고의 역작이었고,

이러 우수한 원작을 기반으로 정성을 다해 제작한 TV 미니시리즈는 큰 화제를 모으며 한 시대를 장식합니다.

  

이렇게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던 TV 미니시리즈의 시대에 화룡정점을 찍었던 작가가 바로 제임스 클라벨입니다.

제임스 클라벨은 본래 소설가를 지망하였던 사람은 아니었고, 호주 출신으로 처음에는 영화 산업에 몸담았던 사람입니다.

1950년대에는 영화계에서 각본가로 시작하여 B급 호러 영화 [더 플라이] 흑백 원작의 각본을 쓰기도 하였고,

스티븐 맥퀸 주연의 [대탈주]와 같은 (작가의 포로 수용소 경험을 담은) 영화의 각본으로 나름 명성을 얻었습니다.

더 나아가 1960년대에는 제작자와 감독으로 활동하며 [언제나 마음은 태양]과 같은 명작 반열에 든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구요.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제임스 클라벨은 나이 50을 넘기게 되는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차츰 영화계에서 발을 빼고,

어느덧 장대한 스토리를 가진 대하소설을 쓰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자신의 소설을 TV 미니시리즈로 제작합니다.

제임스 클라벨의 원작+제작+연출의 원맨 쇼로 만들어진 TV 미니시리즈 [노블 하우스], [쇼군] 등은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러한 TV 미니시리즈의 성공에 힘입어 제임스 클라벨이 쓴 원작 소설 역시 수 천 만부에 달하는 대단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렇게 1980년대 TV 미니시리즈와 소설을 동반 성공시킨 제임스 클라벨은 한 시대를 풍미하며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제임스 클라벨의 데뷔작이자 소설가로 명성을 얻게 한 작품은 [왕쥐]입니다.

2차대전을 무대로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야만적인 상황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작품이며,

제임스 클라벨 작가 본인의 체험담을 기반으로 쓴 소설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제임스 클라벨이 자신의 체험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였는데,

소설로 고쳐 써서 출간하면서 소설도 성공하고 영화도 나름대로 대성공은 아니지만 호평을 받았습니다.

일본군의 학대가 만연하였던 포로수용소에서 "왕쥐"노릇을 하였던 포로들의 대장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데,

같은 포로이면서도 오히려 그 안에서 왕초 노릇을 하면서 일본군보다도 더 잔악한 행위를 서슴치 않는 모습에

한계 상황에서도 나름 계급을 만들고 그 안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인간의 본성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영화계에서 단련된 제임스 클라벨의 명확한 필치와 작가 본인이 겪었던 처절한 경험에 기반한 진실성 덕분에,

작품이 주는 설득력이 배가되는 것이 [왕쥐]의 특징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 찾기 힘든 그 악역의 캐릭터가 내 뿜는 힘이 어마어마하죠.

  

제임스 클라벨의 명성을 순식간에 최상위권으로 올린 작품은 [쇼군]입니다.

영국 상선에서 조난한 주인공이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 막부 권력자들에게 신임을 얻고,

스스로 전투에 뛰어들고 거듭 공을 세우면서 사무라이로 위치를 다져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제임스 클라벨이 평생 갈고 닦은 스토리 텔링 능력이 폭발하는 듯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야기 구조의 매력은 물론이고 동양 문화권에 막연한 호기심을 가진 서양 작가의 시선을 넘어서

일본 사무라이 사회의 특징을 예리하게 고찰하면서 그 안에 뛰어든 서양인의 고뇌를 사실적으로 다룹니다.

서사 다운 서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고, 읽는 재미가 대단하여 미니시리즈 아니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쇼군> 원작을 읽고 곧바로 TV 미니시리즈를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둘 다 재미있더군요.

   

[노블 하우스]는 홍콩의 거대 기업과 전통적인 중국인 상단의 모습이 어울려 있는 작품이고,

본래 [타이쿤]이라는 소설의 후속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전편 [타이쿤]을 읽어야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전편 [타이쿤]은 읽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블하우스]에 충분히 즐겁게 몰입하여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 경우 [노블하우스]는 공중파로 방영된 TV 미니시리즈로 일찌감치 먼저 접했고, 주연배우가 보여 준 최고의 간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 다름 아닌 리즈 시절의 '피어스 브로스넌'이 다른 어떤 영화나 TV 드라마보다도 훨씬 더 멋지게 등장하고 있는 영상물이기 때문입니다.
[레밍턴 스틸]로 나름대로 인기를 얻자 [노블하우스] 주연을 발탁되었고, 피어스 브로스넌의 첫 메이저 데뷔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노블하우스] 미니시리즈를 공중파 TV로 본 후 그 모습이 제임스 본드로 나오던 시절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 생각해 왔고,

이후 제임스 클라벨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려고 오랜 시절 (대략 10 년 넘도록) 여러 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책을 구하려고 했었죠.

몇 주 전 용산 뿌리서점에 상태가 아주 좋은 책이 나와있는 것을 보고 사들고 와서 과거의 추억과 맵핑하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상업을 다루는 1970년대 소설인데, 마치 1980년대 한국에서 크게 유행한 기업 드라마, 만화와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랑과 야망]과 같은 기업 드라마라든지 [신의 아들]과 같은 기업 만화들의 원조 겪에 해당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밀도 있고 치밀한 이야기 전개와 서사를 통해 읽는 이를 매료시키는 능력은 알렉상드르 뒤마를 연상케 하는 면모까지 있었습니다.

   

제임스 클라벨 작품의 문제라면, 작품 길이가 지나치게 길다는 것입니다.

이미 1970년대와 1980년대는 3~40년 전의 일이되어 시의성이 떨어지게 되었고,

지나친 상업성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하더라도 유행이 지나면 아무래도 너무 긴 작품은 재번역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1980년대 쏟아져 나온 책들의 경우 급히 번역하느라 여러 사람에게 번역량을 할당하여 짜집기한 흔적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고,

그런 과거 번역원고를 다시 사용할 수 없으니 다시 재번역하여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작품 길이가 너무 방대하여 큰 일거리가 되죠.

게다가 다시 책을 출간하기에는 수 천 만 부 이상 판매된 원작의 우람한 명성 때문에 저작권료는 지나치게 높을 수 밖에 없고,

이미 한국에서는 시의성이 떨어지고 유행이 다 지난 작품이어서 챙겨 읽을만한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클라벨의 대표작들은 충분히 재미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할만한 훌륭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한국에서의 상업성을 생각해 보면 투자대비 ROI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아마도 다시 재출간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 그래서 더 과거에 나온 책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노블 하우스]의 전편 [타이쿤]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구하기 쉽지 않을 것 같네요.

  

  

* 사족

제가 구해 읽은 제임스 클라벨의 작품들은 모두 헌책방에서 상태가 좋은 책으로 샀습니다.

어떤 이유로 총판이나 연륜있는 서점 구석에 남아 긴 시간 재고로 남아 있었던 책들로 보이는데,

[왕쥐]는 신촌 숨어있는책, [쇼군]은 사당 책창고, [노블 하우스]는 용산 뿌리서점 등에서 구했습니다.

딴은 알라딘중고서적이나 Yes24중고서적에서는 사실상 구할 수 없는 책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월척 건지는 재미 때문에 오래된 헌책방들을 포기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돌아다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