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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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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은 점점 더 비직관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뚜렷하게 집중된 의식의 중요성이 철학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던 시대 이래, 지금처럼 의식이 덜 중요해진 시기는 없을 테다.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을 위해 의식적 사고가 중요한 것과 별개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일상적인 많은 부분에서 사고는 불필요하다. 우리가 '휴리스틱'이라고 부르는 무의식적인 사고가 과연 사고 과정을 실제로 거치는지도 불분명하며, 사고 과정 아래에서 동작하고 있는 인지 과정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대중적으로 범람하는 인지과학 서적조차 사고의 독립성을 전혀 설파하지 않으며, 기억의 궁전 같은 좀 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보다는 기억 능력의 한계와 육체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종의 기계 관리법 같은 조언을 담고 있다. 사람이 동작하는 '방식'을 의식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은 점차 무의미한, 피상적인 접근법으로 변해가고 있다. 기계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을 때 해야 할 일은 전원을 껐다 켜거나 분해해보는 일이지, 기계 내부 기능을 활용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여기에 주목하는 두 책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비슷한 논의를 한다는 건 재밌는 일이다. 캐서린 헤일즈의 <비사고>와 스티븐 샤비로의 <탈인지> 두 권 모두 의식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리적 인지 과정에 주목하고 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명명한다. 한 명은 비사고unthought, 다른 한 명은 탈인지discongnition라는 이름이고, 설명하는 맥락이 미묘하게 다르기는 하지만(의식과 별개의 사고, 인지과정에서 벗어난 문제 해결) 큰 틀에서 볼 때는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세계의 동식물과 인공지능 같은 존재를 인간 중심의 의식적 사고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는 게 더 유용하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으며, 둘 다 문학 이론가로서 대체로 문학 비평을 주 재료로 삼아 논의를 이어나간다. 헤일즈는 포스트휴먼 이론에 좀 더 집중하고, 샤비로는 SF 문학에서의 탈인지에 좀 더 집중한다. 둘 다 나쁘지 않다. 나는 의식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여기에 관심이 많지만, 그런 사심과 별개로 의식과 다른 인지 과정이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보니 말이다.


두 권 모두 뚜렷하게 동의하는 한 가지를 먼저 짚자면, 인문학적 철학 접근을 배격한다. 표상을 인식하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나, 의식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지향성 같은 주제는 그리 유용하지 않다. 외부로부터 감각을 인식해 이를 정보로 처리하여 행동한다는 큰 틀에서, 의식과 표상은 필수적이지 않을 뿐더러 존재하지 않고도 충분히 유능해질 수 있다. 식물의 '지능'을 논하는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에서 신경계가 지능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듯, 인간의 지능을 보다 넓은 관점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요소가 부수적인 것으로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표상. 샤비로는 <탈인지>에서 황색망사점균이라는 생명체가 어떻게 외재적 기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초유기체 개미가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처럼 일종의 관다발로 얽혀 있는 점균이, 외부에 점액질을 뿌리고 이미 흩뿌려져 있는 점액질의 분포를 파악한다. 이 과정을 통해 점균은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가는 등의 지적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점균 내부에 미로의 경로에 대한 표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변화는 대부분 외부 환경에서 이뤄지며,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기술을 외재적 기억으로 보는 것에 가장 가까운 예시인 듯하다.


다만 둘 사이의 큰 차이는 이 인지적 존재의 내부에 신경을 쓰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헤일즈는 마이크로초 단위로 주식을 거래하는 봇들로 가득한 주식 시장과 신체로부터 온갖 정보를 수집하는 감시 체계를 예시로 들어 이러한 인지적 체계가 어떤 방식으로 동작하며,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해야 할지에 대한 기능적 분석에 집중한다. 기업의 '법인격'(물론, 기업은 법적으로 인격이 없다)을 상정하고 어떤 체계를 하나의 개체로서 보는 것이 어떨 때 유용하고 어떨 때는 무용한지를 따지는 식으로. 샤비로는 그 상정된 비인간 존재자의 내부 감각을 파고들고자 한다. 거대 데이터베이스 관리 체계DBMS는 데이터 속에서 어떤 정동을 느낄 것인가? 인간을 비인간 존재자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애초에, 인지 과정의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 의식이 정말로 유용하기는 한가? 맹시를 주제로 한 SF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를 두 사람 모두 다루고 있음에도 그 관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헤일즈는 <블라인드>가 톰 매카시의 <찌꺼기>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비사고적 인지 체계를 보여준다는 점에, 사고적 인지 체계의 높은 비용 소모에 주목한다. 샤비로는 뱀파이어와 로르샤흐라는 비의식적 존재자들이 의식이라는 국소해에서 벗어나 인류보다 더 우월하게 될 수 있는 실존적 공포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잠시, Eric Schwitzgebel의 논문 <If Materialism Is True, the United States Is Probably Conscious>를 주목할 만하다. 슈비츠게벨은 헤일즈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인지적 체계를 묘사하며, 각 사람들과 이를 연결하는 도로 및 인터넷, 그리고 미국 외부로 행동을 행사하는 군대만으로도 미국을 하나의 인지체로 취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심리철학에서 의식적 존재의 조건처럼 여겨지는 정보 처리, 자기 보존 등의 기능적 요소가 그 개체의 의식-혹은 감각질-을 보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반례로서 미국을 들었지만, 샤비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여기에는 약간의 왜곡이 남아 있다. 그 전체로서의 미국에는 어쩌면 일종의 정동이, 미국이 정보로 인식하는 틀 속에서 작동하는 감각질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호하지만 모두가 체감하는 불경기, 전시 히스테리는 체계의 정동이 아닌가? 정말로 아닌가?) 신경계를 갖지 않는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주장에는 신경계라는 물질적 토대 외에는 고통이라는 감각질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잎이 물어 뜯기거나 줄기가 꺾였을 때 내뿜는 화학 물질과 이를 다른 주변 식물이 수용하는 기제 속에서 정말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신경계의 진화는 상당히 원시적인 단계에서부터 +와 -를 구분하고 있었고, 신경계에서 비롯되지만 않았을 뿐 그 고통의 감각은 다중 실현되었을수도 있다. (물론, 그 고통은 정확히 그 고통이 아니다 - 그러니 이 주장은 철학적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귀추법에 가까울 테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러한 고통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사람의 통증조차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측정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인간 신경계와는 아예 다른 체계의 고통을 추정하기란 힘든 일이고, 그걸 고려하기에는 우리가 이미 '고통스럽게 여겨질 만한' 행위를 그 대상에게 잔뜩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존적 관점으로 다시 돌아와보자면, 이러한 행위가 사람에게 행해졌을 때 엄격히 잘못된 것으로 취급받을 만한 근거가 정말로 있는가? 사람이 기계가 된다기보다는, 사람 안에서 기계를 찾아 조작하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기계는 엄밀히 말해 추상적인 개념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샤비로는 스콧 베커의 <뉴로패스Neuropath>를 분석하며, 좀 더 진지한 의미에서 사이버펑크적인, 의식과 의미가 완벽히 무의미해질 수 있는 전제가 정말로 현실이라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 것인지를 논한다. 샤비로는 SF를 이런 식으로 보는데, 어떤 전제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SF는 그 전제를 가정한 뒤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그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호러 소설과 SF 소설이 만나는 지점이 이곳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샤비로가 분석한 마이클 스완윅의 <야생 정신Wild Minds>과 최근 중국에서 연재 중인 웹소설 <돈 없이 무슨 수선이냐?没钱修什么仙?>를 함께 논하면 좋을 듯하다. <야생 정신>은 <뉴로패스>에서 제시한 전제, 사람이 외부에서 완전히 조절 가능한 기제를 포함한 기계를 수용한 미래를 그린다. 이 미래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기제를 제외한 비합리적인 부분-예를 들어 통제 불가능한 감정, 종교적 열망 등-을 깔끔하게 제거하는 '최적화' 수술이 필수로 요구되며, 그 최적화된 마음에는 죄책감 역시 포함된다. <돈 없이> 역시 마찬가지 전제를 깔고 있는데, 이 세계에서는 반대로 영적인 세계가 자본주의적 현실에 포착되어 더 영적으로 뛰어난 이가 되기 위한 기제를 갈고 닦고자 스스로를 중절시키고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돈으로 교환하여 자신에게 투자한다. <야생 정신>과 <돈 없이> 사이에는 20년 이상의 세월 차이가 있으며, 미국과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사회 현실 속에서 서로 다른 기계 정신을 포착하고 있다. 그 차이에는, 자기보다 더 기계적인 일본에 대한 두려움을 표하는 미국식 사이버펑크와, 언제라도 다시 외부에게 고꾸라지고 치욕을 맛볼지도 모른다는 붉은 여왕 가설을 믿는 중국식 사이버펑크가 있다. 그 차이가 표현되는 방식이 상당히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