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STS(과학기술학)가 대중적으로 얼마나 인지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과 기술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발견되고 개량되며 현실에 영향을 주는지 등과 같은 과학의 사회적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꽤 어린 나이에도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들어볼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의 근본에 대한 질문은 유명하지만 정작 그 질문에 대한 탐구 자체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사회적인 방법으로도 사람들이 기대한 만큼의 대답을 잘 끌어내지 못해서일수도 있고, 그저 과학철학 유행이 다 식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정의할 수 없더라도, 그 모호한 과학과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은 분명하다. 아주 단순하게만 말해도, 자동차 시대에 말을 타고 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테니까. 자동차 기술은 말의 존재를 너무나 완벽하게 지워내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말을 여전히 중요하게 쓰고 있었다는 게 농담처럼 들릴 수준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조차 수백만 마리의 말을 수송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멋진 실리콘 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과학과 기술이 바꿔놓은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여러 단편들로 구성된 SF 앤솔로지다. 중국의 류츠신, 일본의 후지이 다이요가 함께 하나씩의 단편을 썼고, 그 외에 6명의 한국 작가들이 각자 단편을 썼다. 사실, 각각의 글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SF 소설과 크게 다른 부분이 있을까 싶지만, 아마 최근 유행하는 한국 SF와는 좀 다른, 고전적인 SF를 선보인다는 의미에서 굳이 STS라는 이름을 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정말로 아시모프나 클라크 같은 수준의 고전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마 굳이 짚어보자면, 뉴웨이브 SF가 지나가고 난 뒤의 고전 SF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판타지와 분리되고, 기술의 무한한 진보가 의문시되는 맥락에서의 SF. 주제는 다양하다. 앞에서부터 짚자면, 남북전쟁 이후의 국가 주도 인공수정, 기후 조절을 위한 인공 태양과 솔라세일 우주선, 동물 기계와 감시 기술, AR 인공지능과 비의식적 사고, 인공 피부 개조와 안드로이드, <삼체>의 영향을 받은 문명 간 전쟁 등. (우다영과 윤여경의 글 두 편은 뺐다 - 이 둘은 기준미달이다)
단요의 <그들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는 '사회'에 더 방점이 놓였다. 윤석열 정권 당시 남북전쟁이 실제로 일어나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는 가정 하에, 파괴된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전범국으로서 한국은 저출산에 대응하는 국가적 실험장이 된다. 국방의 의무는 생명권력의 차원에서 확장되어 출산의 의무를 포함하며, 모든 18세 여성은 몇 달 간 호르몬 요법을 받으며 인공수정용 난자들을 배출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아이러니가 있는데, 작중 주인공 부부는 이 '복무' 중인 여성들의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무능한 딸이 자라나 배출한 난자가 (은밀히 숨겨진 우생학적 절차로 인해) 그 어떤 정자와도 수정되지 않고 실험용으로만 사용되어 버려질 것을 걱정한다. 괴상하게 합리적인 사회에서 고통받는 감수성이 아니라, 또 다른 방향으로 괴상하게 합리적인 정신의 고통을 그린다고 할 수 있겠다. 늘 총력전 상태에 있는 전시 한국이 인구를 조달하는 과정과, 그 인구를 계속해서 강화해나가는 과정. 우생학적 전제를 두고 과잉 경쟁 사회가 우수한 인재를 갈아나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닉 랜드의 에세이 <IQ Shredder>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 류츠신의 <중국 태양>은 중국 버전의 아메리칸 드림을 연상시킨다. 물조차 제대로 저장할 수 없는 시골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탄광, 중소 도시, 대도시로 나아가고 건물 청소부에서 우주 비행사, 그리고 우주 시대의 의미 그대로 우주 비행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는 동시에, 지구 공학과 솔라세일을 영리하게 뒤섞어 빛을 흡수하고 반사할 수 있는 은빛 신소재 천으로 만들어진 인공 태양을 선보인다. 화북 지방의 컴플렉스였던 뜨겁고 건조한 기후를 기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손익만 계산하느라 더 이상 우주 진출의 꿈을 꾸지 않는 시대에 중국이 여전히 꿈을 꿀 수 있다는 믿음. 고학력을 향한 경쟁에서 벗어나 시골 출신의 저학력 민초도 우주 비행사로 될 수 있다는 진정한 공동부유 선전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안에서 계속 금전 관계에 대한 계산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얄궂다면 얄궂은 일이겠지만. 합리적으로 따졌을 때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오직 탐험만을 위한 우주 도약을 나서는 주인공이 이를 대표하고 있다. 나는 단순한 돈키호테보다는, 주판알을 전부 튕겨본 후에도 결국 모험을 떠나는 사람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다.
우다영과 윤여경의 글이 함께 붙어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 둘을 읽으면서 <멋진>에서 볼만한 글은 이미 다 읽은 건가, 하고 내려놓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으니 말이다. 둘 모두 약간 동화처럼 몽환적인 배경을 사용하며, 우다영은 좀 더 미묘한 글쓰기를, 윤여경은 조야한 글쓰기를 선보인다. 늙어서 거진 죽어버린 뇌세포를 재활용해 어린 아이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는 좀 더 재밌게 나올 수 있었겠지만, 반전 있는 스릴러로 읽기에는 너무 애매모호한 문장 속에서 서사의 힘이 상당히 반감되었다. STS라는 이름을 쓰기에는 너무 비-사회적이고(이 시술을 받을 수 있는 상류층만이 갈 수 있는 에덴만을 그린다면, 솔직히 사회적인 글쓰기는 아니지 않을까), 심리극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윤여경의 글은 길게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정말 너무 단순하게 우주선 속의 사회 위계와 이념을 다루고 있다. 나는 차라리 주인공인 독고 린이 마법소녀로서 사랑과 평화, 공감과 연대를 설파했다면 이해했을 테다. 아마 그럼 공감으로 재편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테니까. 사실 우다영을 윤여경과 함께 묶어서 욕하자니 우다영에게 미안해지는 부분이 있다.
장강명의 <동물+친구x로봇>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미 공감 가득한 한국 SF에 대한 예고를 받은 상태에서 사이버네틱스 동물로 가득한 공동체를 본 순간 책을 덮었는데, 저널리즘 정신이 가득한 장강명의 글쓰기가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SF/판타지 대중매체에서 흔히 있는 기만 가득한 공동체라는 설정이 좀 더 현실적으로 깊은 고려와 함께, 성인식과 반려동물, 감시 체계와 그 체계의 수익성에 대한 고민으로 묘사되었다. 패밀리어는 전체 네트워크에 통합된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었고, 성인이 된 주인공의 전통적인 고민이 이 기술 사회에 대한 질문 속에서-약간 뻔한 구석은 있지만-꽤나 재밌는 방식으로 우회되었다. 사실 이미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를 읽으며 실망한 터라 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먼저>에서도 깊게 표명한 '기술로 인한 죽음의 극복'과 '인간의 의미를 위한 기술 반대'가 여기에서는 괜찮은 방식으로 녹아 있다. 아마 커즈와일의 특이점-교가 이 단편에서는 그리 존재감을 갖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기술과 발전 방향에서 무엇이 가능할 것이고 무엇이 문제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진중하게 다뤄지고 있다.
전윤호의 표제작 <멋진 실리콘 세계>는 살짝 웃음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IT의 구체적인 동작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자신하는 글이었는데, 현재의 LLM과 AR 기술을 혼합하여 가상 친구를 묘사하되, 국가의 커플 지원금 제도와 기술적 우회책, LLM의 시스템 프롬프트 조작, IoT의 보안 취약성, 무의식적 사고와 인공지능 사이의 관계와 같은 어딘가 현재적이면서 또 어딘가 미래적인 기술 묘사가 꽤나 흥미롭다. 이 책의 글 중 가장 너드스러운 글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작중에서 AR 인공지능을 지칭하는 실리silly 같은 작명 센스도 좀......), 실제로 곳곳에 너드스러운 농담이 섞여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실리를 무단 탈취한 해킹 프로그램을 강제 종료하는 장면에서, 숫자 '9'가 적힌 칼로 프로그램을 찌르는 장면이 리눅스에서 프로세스를 강제 종룡시키는 'kill -9' 명령어를 암시한다든가. 너드로서 읽는 맛이 있는 글이었지만, 그래서 사실 가장 덜 미래적인 글이기도 했다. AR 기술이 정말 대중화에 성공만 한다면, 아마 10년 내로도 찾아올 미래가 아닐까.
조시현의 <슈거 블룸>은 우다영의 글에서 단점을 없앤듯한 글이었다. 높아지는 온도에 대처할 수 있도록 보다 튼튼한 인공 피부를 배양해 몸에 덧씌우고, 사후에는 이 값비싼 피부를 재활용해 안드로이드에 덧씌운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한 고부 삼각관계로 탈바꿈된다. 자기보다 더 젊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시어머니를 질투하기 시작한 아내가, 시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피부를 덧씌우고 나타난 가사용 안드로이드를 보며 점점 더 미쳐가는 이야기. 시어머니와 아내의 비현실적인 감각,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꿈을 꾸는 듯한 묘사가 상당히 정돈되어 있으며, 점점 고조되는 감정이 분출되었다가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서 점잖게 봉합되고 또 하나의 악몽으로 나타나는 결말까지 매우 훌륭하다. 아마 <환상특급>의 한 에피소드라고 해도 믿을 만한 글인데, 개인적으로는 만화 <헬터 스켈터>가 더 연상되는 분위기였다. 변화한 미래 사회에서 그 과학 기술 자체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은 뒤로 한 듯한 글이었지만, 그 점을 차치하고라도 좋은 글이다.
후지이 다이요의 <빛보다 빠르게 날 수 있다면>은 앤솔로지를 짧고 훌륭하게 닫아주는 역할을 한다. 태양계 주변에 여러 관측소가 설치된 미래에서, 1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급박한 시간 동안에 아광속 블랙홀을 발견하고, 이 블랙홀이 지구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계산하며, 그것이 머나먼 우주의 다른 문명이 몇 십 년 전에 계획한 공격이었음을 간파하고, 그 궤도를 바꾸기 위해 몸을 던지는 이야기. 여기서 묘사하고자 하는 사회는 인간 사회가 아니라 <삼체>가 제시한 우주 사회, 곧 어둠의 숲이다. 급박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다소 가볍고 오락적인 투를 유지하고 있어 한달음에 읽어내릴 수 있는 글이고, 굳이 기술적/사회적 깊이감을 더 주지는 않았다. 아마 앤솔로지 마지막에 배치된 이유가 있을 테다. 중간의 실망을 뒤로 하고, 앤솔로지를 기분 좋게 닫을 수 있도록. 기대한 것보다 훨씬 괜찮은 책이었다.
전윤호 작가는 IT쪽 교수라서 IT쪽 지식이 많은 거 아닐까… 여튼 후지이 다지요 장편 소설도 나름 인상적으로 읽었는데(물론 단점도 있었지만), 리뷰 보니까 단편은 또 다를 꺼 같아서 기대되네 리뷰 ㄱㅅㄱㅅ
종룡은 뭐하는 공룡인가요 우하하
개추
우다영, 윤여경에서 개추 ㅋㅋ
멋진 신세계 vs 멋진 실리콘 신세계
증ㅁ라 재밌어보인다.
과학철학의 유행이 다 식었다니. 과학철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