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메모.
-W. B. 예이츠 [비잔티움 항행]. 시집 "탑", 제미나이 3.0 프로 번역-
2) 1행 [저 곳은 늙은이들이 살 나라가 아니다.} 여기에서 "나라"는 시인을 배제시키는 '나'에게 무관심한
자연이다.
2~6행 시인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를 표현한다. 말하자면 자연은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을 돋보여 빛이나게
한다. 암수는 서로에게 아름다움을 느껴 유혹적이며, 생식 활동에 자연스레 전념하므로 마치 여름날 온
사방이 들끓는 것처럼 젊음은 활발하다. 이것이 "나라"라고 표현한 자연이다. 그런데 6행 [태어나고, 생겨나고
죽는 것들을 예찬한다.]에서 "죽는 것"은 1연 흐름에 배치된다. 즉 시인이 깊은 소외감을 느끼는 원인은 자연
이 자기를 무관심하게 방치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낳고 기르며 번성하게 도와줄지 언정 죽음까지 돌보지 않
는다. 저 표현은 고쳐야 할 듯 싶다.
7~8행 여기서 기념비는 '앎'이다. 저 관능에-생식하며 번성하는-빠진 것들은 삶이 충족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 이상을 바라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앎이란 부족한 상태에 있을 때 갈구하게 되는 것일까? 시인이 갖
는 바는 그렇다. 그가 아직 아름다움을 돌보고 사랑이 충동질하는 데에 따라 갈 수 있을 만큼 젊었더라면 관
조하는 입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는 2연으로 이어져 허물어진 육체가, 자연에 거슬러 저항하는 것은 소용 없음을 절감한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을 달래어 깨우쳐 위로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비잔티움으로 향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자연은 육체를, 시시포스의 돌바퀴처럼 무게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대는 독수리처럼 달려든다. 재생은
오로지 신의 특권, 인간은 육신이 하루하루 침식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을 섬기려 비잔티움으
로 향하는 영혼이 최대로 닿을 수 있는 경지에는 어쩔 수 없이 불길한 징후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길가메시
가 끝내 이루지 못한 불사의 희망이 여명으로 남아 서쪽 하늘에서 마침내 사라지는 것처럼 시인의 마음을 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