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에 빛나는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은 


IMF 사태, 즉, 1997년 외환 위기가 현대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책에서 지적한 현대 금융 시스템의 병폐가


목하 한국 경제의 근본적 문제라는 점에서도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크루그먼은 뛰어난 경제학자이기도 하지만, 글도 참 재미있게 잘 쓴다.


이 책은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같다.


먼저


"1997년 아시아의 경제 위기는 대체 왜 일어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노회한 탐정처럼 신중히 용의자를 추려내고


마침내 진범을 지목한다.


20세기 말 동아시아 일대 경제 위기의 범인으로 누구나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정치권과 재벌 간 정경유착으로 부패한 자본주의, 이른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얘가 정말 범인이라면, 


한국과 인도네시아와 같은 경제 수준과 부패의 양상이 천양지차인 국가들이


왜 1997년에 동시에 같은 패턴으로 무너진 것인지를 해명할 수 없다.


이는 각 국가의 내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통적인 외부 요인'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가 무너지자 아시아 경제에 돈을 대던 국제 투자자들은 비이성적인 공포에 휩싸인다.


그동안 투자자들의 머릿속에서는 태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신화로 한데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태국이라는 기적이 허상으로 드러난 순간, 같은 카테고리였던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환상도 깨져버렸다.


이제, 일단 다른 투자자들이 우르르 돈을 빼기 시작하면 나도 얼른 돈을 빼야 하는 상황,


'자기 실현적 패닉(Self-Fulfilling Panic)'이 일어났다.


여기서, 태국의 유동성 위기라는 작은 불씨가 '투자자들의 패닉'을 타고 번졌을 때, 이를 통제 불가능한 재앙으로 키운 건


바로 '그림자 금융'이다.


우선 은행이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자.


은행의 본질은 휘황찬란한 간판에 에어컨 바람 쌩쌩 나오는 삐까뻔쩍한 건물이 아니다.


지가 갖고 있지도 않는 돈을 턱턱 빌려주는 게 바로 은행, 금융이다.


은행은 고객들에게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돈을 다 찾아가도 된다라고 약속하면서 덥석덥석 큰돈을 받아놓고는,


그 돈을, 수십년 뒤에나 회수할 수 있는, 주택 대출이나 건물 공사 비용 대출로 죄다 빌려준다.


(실제로 고객이 맡긴 양에 비하면) 은행 금고에 들어 있는 현금 양은 턱없이 적다.


만약 고객들이 일제히 돈을 찾으러 오면


'건실한' 은행도 내줄 현금이 없어서 망한다. 1930년 미국 대공황도 바로 그 뱅크런 때문에 일어난 거다.


대공황 이후 미국은 


(1) 예금자 보호 제도와 (2) 은행이 현금이 부족할 때 현금을 빌려주는 중앙은행


이 두 가지를 그 끔찍한 뱅크런의 예방책으로 고안했다.


정부는 그런 혜택을 주는 대신 은행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은행의 투자는 규제를 받았고, 정해진 지급준비율대로 현금을 보유해야 했다. 


문제는,


우짜든지 더 돈 벌어볼려고 하는 애들은 우짜든지 규제를 회피하려고 밤낮으로 짱구를 굴리는데


방어하는 입장에 있는 애들은 걔내만큼 열심히 짱구를 굴리지 않는다는 거다.


규제를 피해, 고객들한테 받은 돈을 갖다가 죄다 돈놀이에 박을 수 있는 그 매력적인 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실상은 은행업이면서도 규제는 받지 않는 


'그림자 금융'이란 걸 만들게 되었다.


책에서는  '그림자 금융'의 대표적 예시로 경매방식채권(ARS)을 든다.


이야기는 이렇다.


80년대 뉴욕의 어느 미술관은 시설 확장이나 전시 작품 구입 때문에 큰 돈을 꾸려고 했다.


한편 은행보다 이자는 훨씬 더 주면서도


은행처럼 바로바로 현금화는 가능한 꿈의 투자처를 찾아다니던 투자자들은


한 '그림자 금융'(리먼브라더스)의 씽크빅한 제안에 눈이 돌아간다.


이 투자 상품은 법적으로는 아주 부담스러운


30년 만기 장기 채권이었지만,


매주(weekly) 채권 이자를 가장 적게 부른 사람이 채권을 낙찰 받는 경매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100억을 모으는데


1. 30억 / 3%


2. 30억 / 4%


3. 40억 / 5%


요렇게 3명이 가장 이자율을 낮게 부른 사람들이면,


100억이 채워지는 커트라인 3번 이자율 5%가 해당 채권 전체의 이자율,


즉, 선순위 낙찰자들을 포함해 모든 낙찰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자율이 된다. 


그리고 지금 채권을 보유한 사람은, 아 다음주에 돈 빼야겠다 싶으면,


다음 주 경매 때


(이자율을 낮게 쓴) 다른 투자자한테 채권을 넘기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미술관 입장에서는 은행 대출보다 이자 덜 내고,


투자자 입장에서는 은행 예금보다 이자율이 높으면서도 바로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꿈의 상품이 탄생하게 된 거다.


경기가 나쁘지 않을 때, 해당 상품은 아주 안전해 보였다.


(신용평가를 요청한 고객들에게 돈을 받는) 신용평가사들로부터 아주 후하게


AAA 등급까지 부여받은 그 ARS 상품은, 


가장 보수적인 자금들, 당장 다음 주에 직원들 월급 줄 돈, 거래처 결제할 돈까지 빨아들이게 됐다.


그런데 ARS와 다르게, 은행이 그렇게 모두에게 인색하게 구는 이유는,


지급준비율대로 현금을 보유해야 하고 예금보험에 돈도 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 기적의 ARS 상품은 이런 부담을 안 지고 있어서 그렇게 조건이 좋을 수 있었던 거다.


결국 2008년 경제 위기 때 매주마다 경매가 줄줄이 유찰되자,


수시입출금 통장처럼 생각했던


그 ARS 계좌에서 더는 돈을 뺄 수가 없게 되었고,


직원들, 거래처한테 돈을 못 주고


멀쩡한 기업들이 망하게 되었다. (요걸 유동성 위기로 인한 흑자도산이라고 하는 거다) 


여기서 드디어 크루그먼은 진범을 지목한다.


바로 이 위험천만한 그림자 금융이 괴물처럼 비대해지도록 내버려 둔 '규제의 공백'이다.


그것이 외피로 뭘 두르고 있든 간에, 은행 기능을 한다면, 즉, 단기로 빌려 장기로 투자한다면, 기존 은행 규제만큼 규제해야 한다.


이 대공황의 교훈을 잊고, 책임을 방기한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의 태만이야말로, 멀쩡하던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진짜 범인이다.


현재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 KDI, IMF 세 곳에서 공통적으로 현 한국 경제의 제1의 위험 요인으로 꼽고 있는 게 바로


그림자 금융의 일종인 부동산 PF이다.


증권사와 저축은행은 부동산 개발 사업(PF)에 막대한 자금을 단기 고금리 대출 형태로 빌려줬다.


역대 정부들은, 설마 부동산이 망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으로, 대대로 이 위험천만한 대출 확대를 사실상 방치해 왔다. 


물가와 환율을 잡으려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미국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허나, 금리 인상 버튼을 누르는 순간,


'부동산 PF'라는 그림자 금융의 뇌관이 터져버린다는 게 문제다.


대출 비중이 90%가 넘는 PF 사업장의 이자 비용은 금리가 오르는 순간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


고금리 부담에 국민들이 대출받아서 집도 안 사기 때문에 미분양 사태가 속출할 것이고,


분양 대금이 끊기니 건설사의 수입이 사라져 빚을 못 갚는다.


투자자들은 어음의 만기 연장을 안 해주고 바로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들 거고 


당장 현금이 없는 건설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게 된다.


이러니 금리 인상 버튼은 엄두도 못 내고


금리를 못 올리니 외국 자본이 죄다 빠져나가


환율과 물가가 폭주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거다.


크루그먼이 1997년과 2008년의 사례를 통해 그토록 경고했던, 그림자 금융을 방치하며 벌어진 비극이


2025년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불황의 경제학>을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