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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0세기와 인간


 “우리는 홀로 있고 길을 잃었기 때문이오.”(『야만스러운 탐정들』, 727쪽)


 20세기는 수많은 대문호가 탄생한 시기였으나,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그야말로 인재(人災)가 세상을 뒤덮었다. 전반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그 이후로는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가시화된 냉전이 세계를 지배했다. 19세기를 연구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말했듯, 유토피아의 희망을 안았던 19세기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을 보며 끝없는 발전과 인류의 무궁한 행복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쓰디쓴 사실을 곱씹어야만 했다. 전쟁뿐만이 아니었다. 절대왕정은 무너졌으나, 20세기가 끝날 무렵까지도 세계 곳곳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서 독.재가 횡행했으며, 여전히 많은 이들은 고통에 사무치며 살아가야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 놓인 자들이 굳이 더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세계는 시시각각 변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위정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며,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시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정말 만물의 영장이 맞는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있기는 한 것인가? 따라서 20세기 이후 인간은 점차 자신을 상실하고, 떠돌기 시작하였다. 이는 문학에도 반영되었다. 절대성의 해체를 내세우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다만 그 정의가 엄격하지 못하기에, 여기서는 최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줄이고자 한다)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작품들은 그 파급력만큼이나 무수히 많으니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토머스 핀천의 『V.』(1963)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1996)을 중심으로 인간의 해체와 방랑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이 둘은 각각 20세기 전반부와 후반주를 다루면서, 인간이 놓인 상황과 앞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에 관한 고찰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은 약 30년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20세기 인간이 목도한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 『V.』, 해체된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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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는 미국의 은둔 작가 토머스 핀천의 첫 장편 소설로, 상당히 난해한 문체와 구성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은 1898년부터 1956년까지 20세기의 전반부라는 큰 시간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설의 이야기 흐름은 선형적으로 배치되지 않고, 규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로 놓여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에서 다루는 공간적 범위도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을 종횡무진하며, 독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V.』를 읽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러니 『V.』의 줄거리를 명료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논의를 위해 간단하게 큰 흐름만 정리하자면, 『V.』는 두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슐레밀(일이 잘 꼬이는 불운한 사람)이자 인간 요요인 제대 군인 ‘베니 프로페인’이며, 하나는 아버지(시드니 스텐슬)의 일기에 적힌 의문의 존재 ‘V.’를 추적하는 ‘허버트 스텐슬’이다. 이 둘의 이야기는 V라는 글자의 모양처럼, 시작은 별도로 진행되지만, 이야기가 정점에 다다르며 서로 만나게 된다.

 『V.』의 등장인물은 시공간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하며, 중심을 잃은 채 해체된 인간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주인공인 베니 프로페인과 허버트 스텐슬은 물론, 뉴욕에서 생활하는 ‘모든 병든 족속들’, 파우스토 마이스트랄, V.(사람으로 한정하여 볼 경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체된 인간들이며, 어쩌면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일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해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 다음의 문장이다. 20세기의 인간들에게 ‘절대’라는 것은 없고, 단일한 것도 없다.

 “이제 와서는 기억은 배신자와 같다. 그것은 계속해서 미끄러져가면서 형체를 바꾼다. 슬프게도 말이란, 아무 의미 없는 현상일 뿐이며, 정체성이라는 것이 단 하나라는, 그리고 영혼이라는 것이 항구적이라는 잘못된 가정 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은 자기 기억을 진실인 것처럼 내세울 아무런 권리도 없다.”(490~491쪽)

 먼저 베니를 보자. 그는 제대한 군인이다. 하지만 슐레밀이자 인간 요요인 그는 방황하며 술집을 전전한다. 그렇게 목표 없이 방황하며 떠돌던 베니는 레이철을 따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모든 병든 족속들’을 만나러 가게 되고, 뉴욕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뜬금없게도 그 일자리라는 것은 하수도의 악어를 사냥하는 것이다. 이 괴리감 있는 의아한 설정이 보여주듯, 베니는 현실에서의 삶과는 떨어져 있다.

 여기서 핀천은 “뉴욕 하수도에는 버려진 애완 악어가 살고 있다”는 음모론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 나가더니, 당연하게도 사냥 팀을 조직적으로 꾸려서 악어를 사냥하러 다닌다. 심지어는 악어를 직접 목격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정말 ‘뻔뻔한 거짓말’의 극치를 볼 수 있는 작품은 드물며,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소설가에게 있어 최고의 탁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거짓말 속에는, 역설적으로 보기 싫은 진실이 담겨 있다.

 본래 악어란 하수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변덕에 의해서, 맹수인 악어는 애완동물이 되어 도시로 오고, 또 버려진 것이다. 버려진 악어들은 도시의 오물이 모이는 하수도에서 살아간다. 하수도는 문명의 요람인 도시 바로 밑에 존재하는 것으로, 감추기에 급급한, 그러나 뉴욕의 하수도처럼 거대한 인간의 야만성과 이기적인 추태를 보여주는 동물이다.

 이때, 악어를 사냥하는 인간 요요 프로페인은 그저 악어 사냥을 반복할 뿐이다. ‘요요’가 아무 의미 없이 풀리고 감기기를 반복하듯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1950년대 사람들의 상실된 의지와 무의미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뜯어내는 자와 뜯기는 자. 아마도 이 착취적인 인간관계야말로 이 섬 도시의 기반을 이루는 근본 원리인지도 몰랐다. 도시의 밑바닥, 즉 하수도 바닥에서부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의 안테나 끝까지 모두 이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도 몰랐다.”(78쪽)

 이처럼 베니가 자아의 해체로 인한 의미의 상실과 방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해체된 인간이 일말의 인간성이라도 지키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은 스텐슬이다. 스텐슬은 아버지의 일기에 적힌 의문의 존재, V.를 추적해 나가고, 오직 그것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스텐슬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인데, 그는 스스로를 3인칭, 즉 ‘스텐슬’이라고 지칭한다. 왜 스텐슬은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것은 이 세계에서 ‘나’라는 개념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나’는 해체되었다.

 즉,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 여파로 인한 자아의 해체, 그러나 그를 거부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페르소나가 3인칭으로서의 ‘스텐슬’인 것이다. V.를 향한 추적이 끝나면 ‘스텐슬’도 사라질 것이고, 그 결과 분열된 정체성은 아예 상실해 버릴 지경에 놓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스텐슬은 비록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V.를 추적함으로써, 분열되어 버린 정체성, 일말의 인간성이라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마저 없다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가 하는 짓은 전부 흉내뿐일지도 몰라. 우리가 애써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조건이라는 게 가짜 자유와 가짜 위엄밖에 없는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만약 그렇다면 내 삶이란…….”(337쪽)

 둘은 서로 조금 다른 결말을 향한다. 이야기의 종착지, 몰타에서 마주친 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베니는 스텐슬의 집요한 V.를 향한 추적에 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후 베니는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브렌다의 손을 잡고 몰타의 밤거리를 달려 나간다. 핀천은 이들이 오직 ‘타성’ 때문에 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베니는 의미를 상실하고 끝없이 방황하는 삶의 지속을 선택한 것이다.

 반면, 스텐슬은 V.를 추적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찾던 V.라고 생각되는 것(또는 무언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정황에도.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V.를 추적하는 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이며, 그것을 그만두는 순간, 더 이상 ‘스텐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텐슬의 집요한 추적은 이러한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 내려는 인간의 시도이고, 그것이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베니는 자아의 해체 이후, 의미를 상실한 삶을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갈 뿐인 선택을 했다. 반면, 스텐슬은 분열된 자아의 해체를 거부하고, 허구를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 일말의 정체성이라도 보존하는 선택을 했다. 둘의 선택에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체된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 정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외에도 ‘모든 병든 족속들’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병들었다. 파우스토 마이스트랄은 역사 속에서 여러 사건을 접함에 따라,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인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모두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을 상실해 버린 이들이다.

 하지만 『V.』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제목이 가리키듯 정체를 알 수 없는 ‘V.’일 것이다. V.는 사람일 수도, 장소일 수도, 관념일 수도, 무생물일 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일 수도 있으나, 명확한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V.의 배후와 내부에는 우리 중 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것은 ‘누구’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83쪽)

 V.(사람으로 한정하여 볼 경우)는 그 극한에 다다른 인물이다. 그녀는 때로는 빅토리아 렌으로, 때로는 베로니카 메로빙으로, 때로는 ‘나쁜 사제’로 등장한다. 그러나 점차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는 해체되어 가고,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무생물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 폭격의 잔해에서 발견된 ‘나쁜 사제’의 모습은 의족, 의안 등으로 이루어져, 이미 사람이 아닌, 일종의 기계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이런 면에서 V.는 의미를 상실하다 못해, 끝내 인간성까지 상실한 자의 말로를 보여준다.

 『V.』는 20세기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련의 역사적 과정(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단일하고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역사 앞에서 인간은 매우 무력하다. 소설에서 역사적 사건들은 전개와 겹치기도 하며,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역사를 정의하기까지도 한다.

“인간 개개인은 자기 멋대로 원하는 짓들을 하지만 역사의 사슬은 계속되고 있어요. 나같이 미약한 역사적 요인은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아무런 힘도 쓰질 못해요.”(73쪽)

 “’역사란’, 드누비에트나는 적고 있다. ‘의붓 기능(원문은 계단 함수, step-function)이다.’”(532쪽)

 계단 함수는 일정한 값이 유지되다가, 한순간에 다른 값으로 바뀐 채 유지되는, 불연속 함수를 일컫는다. 이는 곧 역사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란 ‘무의미하게 지속되는 삶’과 그것을 ‘단박에 바꾸어 버리는 사건(즉, 기존 삶의 전복)’의 도래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파우스토의 인격 분열도, V.의 변화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발생한다. 하지만 사건이 언제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그때까지 그저 무의미하게 삶이 계속될 뿐이다. 그 역사적 진행의 끝은 정황이 암시하듯, 질서의 해체다. 핀천이 한때 물리학을 전공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역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의미하고, 무생물만이 존재하는 것이 역사의 끝이 된다. 그런 세상은 급속도로 늙어간다고, 또는 병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거든. 그건 내가 지금 여든 살 가깝게 되니까 전쟁 때문에 세상이 나보다 더 늙어 버렸다는 사실이야. 자꾸만 새로 깨닫게 되는군. 오늘날 세상은 진공 속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얼굴을 찡그린 채로, 사명감을 가지고 쓸 만한 인물이 되고 착취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398쪽)

 “하지만, 그렇다면, 만약에 말이죠. 만약에 시드니 스텐슬이 변한 것이 아니라 1859년과 1919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세계가 병에 걸린 거라면? 그 병은 너무도 증후가 미약한 것, 즉 역사의 사건과 쉽게 혼합되어 버리는 것이 되어서 아무도 애써 진단까지 내리려 하질 않았던 것일 수 있단 말이죠.”(743쪽)

 따라서 우리는 갈림길에 봉착하게 된다. 20세기를 겪으며, 인간성이 해체된 우리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스텐슬처럼 부정함으로써 억지로라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애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제3의 길을 찾아 나설 것인가?

3. 『야만스러운 탐정들』, 방랑하는 인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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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장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물론 나는 수락했다. 통과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13쪽)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볼라뇨가 파파스키아로와 함께 1975년 멕시코에서 결성했던 'infrarrealismo(밑바닥 현실주의)' 활동의 경험이 담긴 자전적 소설이다. 볼라뇨는 이를 통해 옥타비오 파스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적 문학과 파블로 네루다로 대표되는 사회 참여적 문학 사이에서만 연명하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 체계의 틀을 깨뜨리려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실패했고, 볼라뇨와 파파스키아로는 멕시코에서 떠나야 했다. 작중에서 볼라뇨와 파파스키아로는 각각 아르투르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라는 인물로 등장장하고, 'infrarrealismo'는 '내장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모두 멕시코의 시를 바꾸어야 한다는 데에 전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우리 상황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옥타비오 파스 제국과 파블로 네루다 제국 사이에 끼여 견딜 수 없는 상황이다. 즉 칼과 벽 사이에 끼여 있다.”(39~40쪽)

 소설은 『V.』가 그러했듯, 독특한 구성으로 짜여 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와 3부는 1975년 11월부터 1976년 2월 중순까지의 내용이 담긴 관찰자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2부는 벨라노•리마와 만났던, 또는 연결점이 있는 사람들의 파편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V.』가 20세기 전반부를 다루었다면,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2부는 1968년부터 1996년까지를 다루면서, 20세기 후반을 거의 아우르고 있다. 그들은 멕시코의 반항아나, 20세기라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든 사람이기도 하다.

 1부의 제목인 "멕시코에서 길을 잃은 멕시코인들"은 크게 세 개를 지칭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스와 네루다 사이에서 자생력을 잃어가는 멕시코 문학과 작가들이며, 하나는 멕시코시티에서 도망쳐 나와 내장 사실주의의 선구자라고 여겨지는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를 찾아 나서는 벨라노 일행이고, 마지막 하나는 도처에 산재한 악과 폭력 속에서 죽어 나가는 라틴 아메리카인들, 어쩌면 전세계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모두 갈 길을 잃어버린 채, 공허한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다. 그럼에도 벨라노 일행은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좇아 티나헤로를 찾아가는 탐정이 된다. 그들은 희망을 찾아 소노라에 도착하지만, 분명 유토피아일 것이라 믿었던 소노라는 폐허로 비춰지며, 티나헤로는 시인으로서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평범한, 어쩌면 볼품없는 한 여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심지어 모종의 이유로 티나헤로는 허무하게 죽는다. 그 과정에서 벨라노와 리마는 살.인자가 되며, 지켜왔던 환상은 깨지고, 목표는 사라진다. 남아 있는 것은 황폐한 사막들뿐. 그 이후 '야만스러운 탐정들'이었던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죽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고, 그동안 문학계는 제자리걸음, 어쩌면 퇴보한 모습만 나타날 뿐이다.

 “창작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고, 거절하는 일이고, 가끔은 자.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가문에 반대하는 길이었다. 오늘날 스페인(그리고 스페인어권 아메리카) 문인들은 (중략)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만 거부한다.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하거나 제일 힘없는 사람 중에서 적을 선택한다. 광기나 격노 때문이라면 모를까 신념 때문에 자.살하지는 않는다. 결국 문학판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희극으로 시작된 모든 것은 어김없이 희극으로 끝난다.”(787쪽)

 볼라뇨의 세계는 야만스럽다. 악과 범죄가 곳곳에서 횡행하는 시대다. 그리고 작가는 이 세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깊이 빠져들고 그 실마리를 추적해 나가는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이것은 단박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2부에서 둘의 행적처럼 오래도록 방황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애초에 탐정이 될 필요도 없다.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탐정이 되어야 한다. 볼라뇨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란 “때로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괴물에 맞서 싸울 줄 알아야”하는 것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라는 제목은 여기서 기원한다. 작가는 탐정이지만, 더 이상 셜록 홈스처럼 술술 풀리는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야만스러운 세계에 맞서기 위해 야만스러워진 탐정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세계를 적나라하게 비추고, 기성 권력에 적극적으로 또한 과격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볼라뇨의 지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 역시 야만적이기 때문에, 마침내 기존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잊혀야 한다. 야만을 부순 야만은, 결국 야만에 불과하고, 존속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야만이기에.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탐정이 활약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야만의 세계에서 작가의 역할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는 그림의 활용이 돋보인다. 그중에서도 소설을 마무리하는 세 개의(또는 한 개의) 창문에 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소설은 질문(창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과 함께 창문이 세 번(실선으로 두 번, 점선으로 한 번) 제시하며 끝이 난다. 그에 대한 답은 각각 '별 하나', '침대보'이다. 마지막에는 '점선으로 그려진 창문'만이 있고, 답은 없다.

 먼저 작품 내적으로 창문을 보자. 창문이 세 개 주어진 것은, 작품의 3부 구성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순서대로 1부, 2부, 3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창문 속 ‘별 하나’는 무엇인가? 별은 벨라노와 리마, 즉 내장 사실주의의 구심점이 되는 두 인물이고, 창은 그들을 중심으로 모여든 내장 사실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별은 창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로 빠져 일부만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 대다수의 내장 사실주의자는 내장 사실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여한 모습을 보인다. 즉, 내장 사실주의라는 이름 하에 사람들은 모였으나, 정작 진정한 내장 사실주의 운동을 이끄는 주역인 벨라노와 리마에게선 초점이 벗어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별은 창문의 중심에 위치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침대보만 남은 빈 창문은 무엇인가? 침대보는 안에 사람이 있으면 주목되지 않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비어 있는 창문을 그려 놓고, 그에 대한 답으로 침대보가 지시되었다는 사실은 곧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전의 창문에는 존재하던 별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2부는 흐릿한 흔적만 남긴 채 자취를 감춘 벨라노와 리마의 행적을 추적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장 사실주의는 실패했고, 벨라노와 리마는 방랑길에 올랐다. 그러니 이제 내장 사실주의자들의 방은 비었고, 침대보만 덩그러니 남았다.

 마지막으로 점선으로 그려진 창문과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앞선 논의를 정리하자면, 이것은 티나헤로를 직접 만난 순간, 마침내 두 눈으로 확인되는 내장 사실주의의 실패와 그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문인들로 보인다. 더 이상 구심점이 되는 벨라노와 리마도, 그들에 의해 뭉쳤지만, 겉모습만 흉내 내던 거짓 내장 사실주의자들마저도 해체되었기에, 이제 창틀조차도 존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소노라의 사막, 즉 폐허가 된 현실만 보인다.

 “나는 몸을 돌려 뒤 유리창을 통해 길 한복판에 있는 거뭇한 형체를 보았다. 반듯한 직사각형 창틀 안에 담겨 있는 그 그림자에 세상의 모든 슬픔이 농축되어 있었다.”(215쪽)

 작품 외적으로 창문을 보면, 창문은 문학이라는 형식 자체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별은 문학에서 하나의 이상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창문이라는 한계에 갇혀 한쪽 끝만 겨우 비추고 있다. 이는 파스와 네루다라는 창문에 가로막힌 멕시코 문학일 수도, 아니면 더 넓은 관점에서 존 바스가 '고갈의 문학'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어려워진 문학의 현 상황 또는 현실에 안주하며 창문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작가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창문 너머에 남는 것은 침대보뿐이다. 그러나 도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이는 곧 빈 창문이다. 즉 문학이라는 틀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지만, 그 지향점, 별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사각형의 틀 안에서 허무하게 계속 맴도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마지막에 가면 아예 창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해체되었고, 이는 소설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문학의 종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림에 몰두하느라, 글을 놓치고 있다. 소설은 여전히 질문하고 있다. '창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있었던 흔적만 보이는 창문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창문을 통해 저편을 내다본다. 그동안 탐정(작가)이 발자취를 뒤쫓았듯, 이번엔 독자가 탐정이 돼야 한다. 당연하게도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답은 없다. 결국 점선으로 이루어진 창은 독자에게 탐정이 되기를 권유하는 볼라뇨의 초대이다. 종말이 아니라, 재출발의 기점이다. 종합하면, 볼라뇨는 이 소설의 마지막 질문을 통해 폐허가 된 현실 속에서도 문학을 위해서 끊임없이 흔적을 추적하는 탐정으로서의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비단 문학의 일로만 한정해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야만스러운 탐정들』 역시 20세기라는 거대한 흐름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V.』만큼이나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도 한몫한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V.』와 유사한 역사관을 보인다. 여기서도 역사는 계단함수와 같다. 우연적인 요소들이 사람을 뒤흔들고, 제자리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에서 고정된 인간이 자리잡을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은 20세기 후반을 다루는 만큼, 인간성의 해체는 『V.』보다 악화된 양상을 보인다. 『V.』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적어도 몇 년 이내에 고도로 ‘소외된’ 인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V.』, 755쪽)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주인공들은 그 누구보다 소외된 이들이다. 핀천의 예언은 실현되어, 벨라노와 리마의 방황으로 소설에서 나타난다. 열정적이었던 내장 사실주의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심지어 일말의 희망을 찾아 나서서 마침내 손에 넣으려는 바로 그 순간, 우연의 장난인지 희망의 불꽃은 완전히 꺼져버리고 만다. 20세기의 전반부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암울한 시각을 탄생시켰다면, 후반부에는 전쟁의 종결에도 끝나지 않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악과 폭력의 야만스러운 세계가 이처럼 절망적인 시각을 낳았다. 그러니 인간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게 해체되어서 중심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결과로 나타난 야만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비롯한 볼라뇨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1968년, 그가 멕시코로 막 이주한 시기, 독.재를 이어가던 정부군의 무력 진압으로 발생했던 틀라텔롤코 학.살, 하나는 잠시 멕시코를 떠나서 아옌데 정부의 혁.명을 돕고자 향했던 칠레에서 겪었던 군사 쿠.데타와 그로 인한 생명의 위협, 하나는 제3제국과 나.치, 파.시즘, 그것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악함이다. 이 셋은 멕시코만 겪은 것이, 라틴아메리카인만이 겪은 것이 아니다.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던 참상들의 단상에 불과하다.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독.재 정권이 자신의 지위를 굳혀가며 반대자들을 탄압하며, 군국주의의 씨앗이 여전히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예측할 수 없이, 급작스럽게 발생해서는, 인간을 괴롭히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충동적인 법이다. 그리고 일어날 일은 항상 일어나는 법이다. 우리는 운명의 손아귀에 있는 장난감 아닌가, 안 그런가?”(537쪽)

“그때 나는 멕시코인 특유의 사고방식이 발동해서 겸허하게, 그러면서도 당혹해하면서 우리가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폭풍우 속에서 우리 모두가 익사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교활한 자들만, 나는 틀림없이 아니 그런 자들만 조금 더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깨달았다.”(620쪽)

 “벨라노, 문제의 핵심은 악(혹은 범죄 혹은 죄악 등 당신이 뭐라고 부르든 간에)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는 것일세. 필연적인 것이면 우리는 악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어. 악을 퇴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가능성은 있어. 같은 급의 두 권투 선수가 싸우는 형국이니. 반대로 악이 우연이라면 우리는 더럽게 꼬인 거지.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수밖에. 신이 존재한다면 말이야. 그저 그뿐인 거지.”(642~643쪽)

 소설 마지막에 볼라뇨가 제시한 세 개의 창문은, 앞선 논의처럼 『야만스러운 탐정들』 자체이기도, 또는 문학에 관한 비유이기도 하지만, 해체되어 방랑하는 인간을 비추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한계를 맞이한 것인가? 이제는 스텐슬처럼 억지로 의미를 찾는 것조차 못하고, 베니처럼 정체성을 상실한 채, 야만스러운 세상의 변덕을 최대한 피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삶만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인 것인가? 우리는 벨라노와 리마의 쓸쓸한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4. 맺음말: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의 길

 절망적이다. 『V.』가 되었든,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되었든, 여기서 끝이라면, 적어도 그 끝에서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제 운명의 횡포에 휘둘리며, 그저 ‘타성’에 젖은 채 떠돌아다니는 선택만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했는가? 서두에서 밝혔듯, 두 작품은 약 3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발간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핀천의 『V.』에서 이미 인간은 갈기갈기 흩어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제 ‘인간’은 존속할 수 없던 것이 아니었는가? 마찬가지로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출간된 지도 약 30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어찌 된 일인가. 핀천과 볼라뇨의 예언은 결국 삿된 기우나 음모론에 불과했단 말인가?

 아니다. 인류는 여전히 핀천과 볼라뇨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다만, 너무 익숙해졌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 20세기의 해체되어 버린 인간성과 그로 인해 머무르지 못하고 방랑하는 인간상은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즉 인류는 아직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다. 그저 답하기를 유예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위협적인, 인간 존재 자체의 존속 가능성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두 작품을 통해서 해답의 실마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 ‘사랑’과 ‘희망’이다.

 『V.』에서 ‘역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아예 14장은 제목부터 ‘V.는 사랑을 하다’이기까지 하다. 1913년, V.(베로니카 메로빙?)는 파리에서 무용수 멜라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멜라니는 비극적인 최후(어떻게 본다면 전위적인 예술로서의 선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를 맞이하고, V.는 점차 무생물이 되어 간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 사랑이 자라나기 어려운 세상. 차라리 사랑을 아예 알지 못했더라면, 무감각하게 넘기고 말 것을, 사랑을 알아버린 이상, 그녀는 가만있을 수 없다. 그 결과 V.는 ‘나쁜 신부’가 된다. 그는 의안, 의족 등으로 자기 신체를 거의 완전히 기계로 대체해 버린 존재이다. 사랑의 비극을 겪은 그는, 무생물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 채, 여자들에게 결혼도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다닌다. 즉, 죽음과 무생물화의 선도자가 된 것이다. 이는 어쩌면 자신이 겪은 아픔을 다른 사람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핀천은 ‘이 세상은 사랑이란 이루어질 수 없고, 정체성은 조각조각 나서,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비관적 결론을 내린 것인가? 실제로 작중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V.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프로페인이나 스텐슬이 보여주는 태도 역시,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의 무생물화, 무의미화가 적나라하게 보인다. 사랑도 해체되는 시대고, 남아 있는 사랑이란, 그저 물건 같은 것이다.

 “등만 돌리면 인간이 인간의 원수가 되는 이 시대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 시대란 말이오?”(259쪽)

“’페티시’라는 게 뭔 줄 알아요? 그건 쾌감을 주는 여자의 한 부분 같은 것, 구두 한 짝, 로켓(*목걸이), 양말대님, 이런 거지. 당신도 그런 것과 같아. 진짜 사람이 아니고 쾌감을 주는 물건과 같단 말이지.”(653쪽)

 하지만 여전히 사랑으로 인한 해결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아니,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V.』에서도 사랑이 부정적인 결과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러한 경우, 사랑은 매우 부분적이고, 또 파편적이기에, 아주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사랑을 믿는 순간만큼은 잠깐의 위안을 받고, 살아있음을 느끼며,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무의미하고 무질서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제3의 길일지도 모른다. 『V.』에서 V.는 사랑의 상실과 그로 인한 삶에서의 도피로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히려 사랑을 가져야만 한다. 차가운 무생물이 아니라, 온기가 맴도는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V.』의 결론이란 다음과 같다,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은 ‘도피로부터 퇴각’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다소 환상에 기대는 면모가 있더라도,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랑’을 ‘희망’함으로써, 인간은 연결된 존재로서 인간성을 확인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렇다면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결론은 무엇인가?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홀로 있고 길을 잃었다. 벨라노와 리마는 여전히 방랑하고 있다. 마치 유령처럼. 하지만 볼라뇨는 자신의 비극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죽을 때까지 문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째서? 볼라뇨는 이미 그 의지를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밝혔다. 다시금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자. 앞서 점선으로 변해버린 창틀은 ‘20세기의 해체되어 방랑하는 인간’을 그렸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것은 반쪽짜리 설명이다. 왜냐하면 그림이 아니라 글, 즉 질문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문의 존재가 문학에 있어서 재출발의 기점이 된다면, 인간에게 적용되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 있겠는가? 볼라뇨의 탐정은 일차적으로 작가의 모토이지만, 더 나아가 현대인이 지향해야 할 인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질문은 희망을 보여준다. 무엇을 희망하는가? 역시 사랑을 희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문학에 관한 천착과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이 소설에 사랑이 들어갈 틈이 어디 있는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야만스러운 탐정들』 이면에는 사랑이 존재한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는 사랑이다. 관찰자인 마데로도 성을 경험하고,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치는 모습이 묘사된다. 또한 그들이 소노라로 떠나는 핵심적인 계기 중 하나는 루페라는 매.춘부와 엮인 사랑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라는 소설 자체가, 20세기의 부유하는 사람들과 작가들을 향한 볼라뇨의 애정이 담긴 슬픈 애상곡이다.

 “내장 사실주의 전부가 사랑의 편지이고, 달빛 아래 있는 멍청한 새의 광기 어린 잘난 척이고, 뭔가 천박하고 하찮은 일이었을 뿐이다.”(233쪽)

 서두에서도 인용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역시 유토피아의 붕괴를 봤음에도 희망을 논한다. 분명 이대로 계속 간다면 앞날은 어두우리라.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홉스봄은 인류의 본연적인 특성을 떠올린다. “인류는 희망하는 동물”이다. 숱한 고난이 인류를 아무리 괴롭혀도, 인류는 늘 이겨내고, 저항하며, 삶을 이어 왔다. 원시 인류는 자연과 맞서 생존했다. 뭉치고, 사회를 만들어 가며 안정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커진 사회가 역으로 개인을 억압하자, 인류는 저항했다. 물론 억압하는 세력과 결탁한 이들도 있었다. 사실 삶의 평안한 수준은 그들이 몇 배는 더 높았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존한 이들은, 개인으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거역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를 향해, 비록 질 것을 알면서도 저항한 사람이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가=탐정=인간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도 바로 그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이상적인 미래를 희망하고, 타락한 현재 세계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것이다. 해체된 인간이, 방랑하는 인간이 ‘자신’을 지키며 삶을 이어 나갈 실마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창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야만스러운 탐정들』, 982쪽)

기존에 썼던 감상문 다듬고 '20세기'라는 주제에 맞춰서 보강한 글입니다. 디시 검열 때문에 일부 단어에 .찍었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