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요조는 기본적으로 사회 적응이 무척 어려운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가 성장하며 통과한 사건들을 거쳐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자기파괴적인 결말으로 치닫는지를 그리고 있다. 

고등학생 때 이 책을 읽고 꽤 깊은 우울감에 빠졌던 내가 10년이 지나 이 소설을 다시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기억난 건 후진 여성관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달과 6펜스, 여성관이 후진 옛날 소설이야 많음에도 그들에 비할 수 없이 큰 반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소설 기저에 깔려있는 화자의 지나치게 비대하고도 나약한 자아였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야, 나는 너무 잘생겨서 여자들이 알아서 따라다니지만 사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사실 다자이 잘생겼는지도 잘 모르겠음;;)
그런 그의 유난스러운 우울이 일면 자신의 자랑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꼬아서 보기 때문일까..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에 대해, 그라는 사람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와 이 책에 대해 내가 이렇게 쉽게 비판하고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내 안에도 요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이라는 공포, 지대한 세상 속 위축되고 나약한 나. 두려움에 떨고, 스스로가 부끄럽지만 도저히 어찌 할 바 모르는 나. 요조를 통해 그런 나를 봤고 그런 내가 밉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쁜 선택만 하게되는 누군가가 있다면 기꺼이 그를 사랑하고 싶다. 
그럼에도 다 괜찮다며 모든 것을 긍정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외로움을 1인분의 몫으로서 감당해야만 하니까. 사람은 타인을 돕는 것으로 자신을 도울 수도 있고, 스스로를 돕는 것으로 타인을 도울 수도 있는 존재다. 아마 최근 본 <세계의 주인>이라는 영화와 무척 대비되어 더욱 반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리처럼 나약한 요조라는 인물을 의도적으로 그린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문학이 인간을 일깨우고 달래기 위해 존재한다면, 삶이라는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곤 하는 독자에게 자신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며 그만의 방식으로 손내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너르게 받아들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