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러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세상은 무슨 소리를 냈을까?

여전히 새들과 동물들은 자신만의 울음소리 속에서 그를 보내었을까?

여전히 해는 내리쬐고 구름은 고즈넉히 흘러내려가고 있었을까?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해 본적이 몇 번이었을까 생각지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기도한 날은 우습게도 절절히 사랑했던 첫사랑 때

그녀를 위한 기도도 아닌 그녀를 얻기 위한 기도였다.


당연히 그딴 기도따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굳이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원망 속에서 기도도 종교도 부정한 건 아니다.


그 후에도 절망적인 일들이 인생에 드문 드문 벌어질 때 나도 모르게 기도하곤 했다.

특히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할 때 내 삶과 나의 생활 모든것을 기도가 되어 나를 버텨냈다.

그래서 초반 이소베와 그의 아내의 암투병에 관한 묘사가

너무나 맘에 와닿고 실감나게 다가와 읽다가 맘을 추스리기를 한참 하기도 했다.


절박함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고 다른 일을 끌어다 생각할 수 없을만큼 단조로운 생활이

가슴 섬뜩한 얼음 송곳에 찔리듯이 구멍이 뚫리고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낯선 차가움이 내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 긍정적인 마음, 젊음, 행동력 등 모든걸 얼어붙게 만들고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가 손가락 하나로 꾹 하고 밀어내면 박살날것 같은 얼음조각같이

미련한 바보처럼 할 줄 아는 건 손을 모으고

이 상황이 해결되길 바라는 것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도 뭔가 스스로는 해결 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도로 향한다.


암으로 세상을 보낸 평범한 가장 이소베는 아내의 다시 태어날테니 꼭 찾아달라는 유언에

윤회사상을 믿지 않지만 인도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한다.


동화 작가 누마다는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힘이 되준 구관조를 잊지 못하고

어렸을 적 과거의 트라우마와 함께 인도행을 결심한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기구치는 지옥도같은 전쟁터에서

전우의 인육을 삼켜가며 살아온 아픔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도로 향한다.


미쓰코는 대학시절 자신의 본질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그저 장난으로 유혹하고 희롱한 카톨릭 신자 오쓰가 인도 수도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인도로 간다.


흔하디 흔한 3류 드라마처럼 이 4명의 갈등이 드라마틱하게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과 고민을 가지고 성스러운 곳 갠지스 강을 떠나서

일반적인 세상 속 흐름으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형을 당하고 한번 구원받은 세상이

여전히 자신들의 이념과 이익 속에서 서로 증오하고 다투듯이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있는 그들은 구원받았지만 알지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다시 녹아들어간다.



우린 눈에 보이는 확실한 해결을 기도한다.

기도 속에서 우린 침묵보다 신의 울림을 기대한다.


어리석게도 우린 이미 구원받지 않았을까?

기도에 대한 침묵이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져

모든 것을 놓고만 싶어질 때 우린 나름 신에게 한걸음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다.


이소베의 아내가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

군고구마 장수의 외침처럼


기구치가 죽어가는 동료의 죽여달라는 외침이 비명처럼 울려퍼지고

인육을 먹다가 토해낼 때에도 여전히 밝고 생명력 넘치게 지저귀던 산새들처럼


자신과는 불행과는 상관없이 모든것이 아름답고 평범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결국은 그것이 기도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 포용이었음을 책에서 말해주는 것 같다.

죽음과 삶 모두를 흘려보내는 깊고 깊은 갠지스 강처럼 말이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무능함

신은 우리를 위한 요술램프의 지니가 아닌 걸 아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일들이 일어나면

모든걸 멈추게 만들고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무능함을 느낀다.

마음은 하루하루가 절박하고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데

세상은 평상시 그대로 돌아가는 냄새, 소리, 움직임이

나를 혼자로 만든다. 그게 위로였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위로로 느끼기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너무 깊고 처참하며

슬프기만 하다.


갠지스 강에 흘러가는 시체처럼

우리는 그렇게 흘러가는 이를 바라보고만 있어야할까.

알수가없다.

엔도 슈사쿠의 믿음처럼 인간 안에 신이 있다면

저 깊은강처럼 흐른다면 정말 좋겠다.

정말 그렇다면 우린 끊임없이 신에게 위로받고 안기고 살고 있으니까.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