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좋은 책은 단순하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듯하다. 이미 자기가 하고 있던 생각을 훨씬 더 분명하게 잘 풀어내주는 책이 하나. 이런 책은 모호한 발상을 또렷하게 밝혀주고 다소 허울 뿐으로 남을 수 있던 발상에 튼튼한 뼈대와 탄탄한 살점을 넣어준다. 사실 이런 책이 좋다는 데에는 굳이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좋은 책에는 또 다른 부류가 있다. 자기가 결코 하지 않았을 생각을 분명하게 쏘아내는 책.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가져본 적 없었을 생각을 해보고, 일종의 보조 바퀴처럼 그 생각의 과정을 강제하는 책. 단순한 악마의 대변인 역할로라도 이런 책에는 가치가 있으며, 사람이 변하는 과정에서 오직 외길로만 나아가려는 게 아닌 이상 반대 의견은 늘 필요하다. 그 쏘아내는 순간이 꼭 책 전체에 있을 필요도 없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일종의 "외상적 실재", 곧 자기가 피상적으로 살고 있던 순간에 갑자기 그 피상성을 뚫고 들어오는 자극을 받으며 피상적인 상징계 너머의 실재를 느끼는 과정을 논했듯, 그런 책은 오히려 날카로운 바늘처럼 갑자기 사람을 찌르고 들어오는 구석이 있다.
그 통증을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변하고 싶지 않은 마음. 다소 온당하게, 기존의 것이 잘 돌아가고 있을 때 이걸 대체할 더 나은 이유가 있지 않다면 고칠 이유가 없다는 마음. 누군가가 부당한 고통을 받고 있더라도 사실 그 마음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기본적으로 가혹한 세상에서 어찌저찌 발판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공이 아니겠던가.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사회에는 사람으로 된 발판이 있다는 걸 잊을 수 없다. 어떨 때는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지층이기도 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의 헌신이기도 하다. 그 발판이 살아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일은 사람을 정말 불편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단순한 탄압 뿐 아니라 불안도 함께한다. 추락의 불안. 고소공포증에 걸린 사람이 고층에 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기 두려워하는 것. 자기 뿐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정말로 저 불편함을 느끼고 무언가 다른 행동을 할까 두려워하는 것. 여기에는 삶이 행복하다거나 현대의 피상적인 소비주의가 정말로 안락하다는 믿음을 뒤흔드는 것 역시 포함된다. 사실, 안락이 좋다는 생각 역시.
<나쁜 책>은 그런 불편함과 반발감이 공존했던 여러 책들을 모아둔 책이다. 명시적으로 특정 사회 질서에서 유통을 제한하도록 지정된 금서들. 당연히, 금서를 다루는 일은 글 내부의 정합성보다는 외부의 사회적 측면에 집중해야 한다. 금서의 어떤 부분이 어떤 금기를 찔렀고, 이 금기가 어떨 때는 수용되면서 또 어떨 때는 수용되지 않는지. 옛 금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파격적이거나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는데, 특히 다른 곳에서 금서로 분류되는 책을 이곳에서 읽는 것이 금서로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떨 때는 금서를 읽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를 읽었고 그 내용을 논하겠다는 것부터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문제적인 반응 자체가 금서의 외재적 가치를 보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금서를 향한 맹렬한 반응은 저자와 반발자들 사이의 전쟁 속에서 그 외의 나머지가 이득을 보는 대리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침묵하는 현실주의자 혹은 기회주의자. 금서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있더라도 조용히 책을 다시 그림자 속에 내려놓는 이들이 이기는 싸움. 어떨 때는, 자신이 거기에서 혜택을 받았다는 생각조차 없이. 그래서 나는 금서를 쓰거나, 차라리 금서를 찢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만, 이 금서의 형성은 물론 철저하고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많은 금서 예비군이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노렸지만 조용히 묻히거나 수용되는 것으로 그치며, 반대로 많은 글이 예기치 못한 오해나 사회적 여파로 인해 불편함의 중핵으로 지정되기도 한다. 르포는 자신이 원래 묘사하려던 것과는 그리 연관성이 없는 사건의 묘사로 인해 불편해질 수 있고, 소설 역시 문제적인 장면 뿐 아니라 그 표현 방식, 혹은 내부에 깊게 배어 있는 이념으로 인해 불편해질 수 있다. 상징과 알레고리의 차원으로 가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많은 금서는 작중 내용이 현실의 무언가를 비유하거나 상징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으며, 이 의혹은 저자의 의도, 글의 내용, 독자의 죄의식이 기가 막히게 떨어질 때마다 금서라는 날카로운 결정으로 빚어진다. 그 과정을 따라가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현대에서도 한국과 여타 국가에서 어떤 식으로 금서와 금기가 조성되는지를 늘 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리고 사실, 언제까지 '금서'라는 것이 책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지가 의문인 것까지 포함해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을 비롯해 많은 글이 금서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는 상황을 상정한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거나, 책을 읽더라도 '그런' 책은 읽지 않는 시대. 책이 아닌 매체 역시 검열과 사회적 반발 같은 역풍을 맞을 때가 종종 있지만, 책의 접근성과 저렴한 제작 비용 덕에 대부분의 여타 매체는 시작부터 논란을 최대한 회피해가고자 한다. 불편함을 위해 돈을 내려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 돈을 얼마를 내야 하는지도 문제가 된다. 넷플릭스를 화제의 중심으로 이끌었던 드라마 <블랙 미러>가 다소 메타적으로, 자신이 만드는 논란이 그 이상의 탈을 일으키지 않고 사업의 일환으로 포함되는 모습을 그려냈던 걸 생각해보라. 어떤 의미에서, 불편을 만드는 매체가 그 불편이 불편하지 않은 이들만을 포섭하는 마니아 생산자로서만 존재할 때도 있다. 취향의 파편화는 금서에게 좋은 일일까? 금서의 저자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 외에는? 애초에 불편한 것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이 경계를 잘 지을 수 있는 좋은 시대다. <1984>보다는 <멋진 신세계>로 끝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야 이거 기사로 연재되는 거 재밌게 봤는데 책으로 나왔구나
굿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