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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리처드 로티의 면전에 이 책을 던져보고 싶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의 나이브함 위에, 에리봉의 자전적 경험을 내보이며 반론하고 싶다.
로티는 마지막 어휘의 재창조를 '유희'라고, 트로츠키와 야생란(곧 공적 관심과 사적 관심)의 문제를 단순히 서로 따로 갈 수 있고, 또 그래야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로티의 면전에 대고 고발하고 싶다. 당신은 백인 중산층에 남성 이성애자 교수였기에 그것이 '유희'일 수 있었던거라고.
에리봉에게 '마지막 어휘'의 문제는 유희가 아니었다고. 그건 그가 노동계급 출신이고, 또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고.
"사르트르는 주네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경구에서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창안한 출구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보다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출구를 발견하도록 강제한다."(p. 227)
에리봉에게, 누군가에게 마지막 어휘의 문제는 실존적 긴급성의 문제를 띤다.
에리봉에게, 동성애자가 된다는 것은 유희도 선택도 아니다.
동성애자가 된다는 것은 노동계급으로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출구였다.
트로츠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노동계급 출신에서 지식인으로 살고자 한다는데서 나오는 귀결이었고, 또한 그것은 다시 동성애자가 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노동계급에서, 랭스에서 떠나왔어야만했고, 그렇게 동성애자로 살기로 했다.
노동계급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것은 상호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고, 삶을 건 선택이었다.
에리봉은 아롱이 유죄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계급 경험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급에 대해 (사후적 성찰에서조차)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보기에, 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이다.
"계급 소속감의 부재가 부르주아의 유년기를 특징짓는다는 점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p. 112)
다수자의 특권은 스스로가 다수자임을 의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위치한 구조를 의식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부르주아는 자신이 부르주아임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고, 이성애자는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으며, 시스젠더는 자신이 시스젠더임을 의식하면서 살지 않는다.
오로지 노동계급,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만이 그것을 들여다보도록 강제당한다.
에리봉은 그것을 수치심이라고 부른다.
로티는 성찰하지 않았다. 어느 면에서나 다수자인 자신처럼, 정체성이란 누구에게나 안락의자에서 편안하게 고민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을.
에리봉에게 그건 실시간으로 충돌하는 경험, 문자 그대로, 또 비유적인 의미에서, 생존이 걸린 문제였고, 자신을 재구성하는건 정말로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에리봉은 우회한다.
랭스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자신이 떠나온 기원, 자신의 가족사와,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기원과 다시 화해한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는 한 차례의 우회로라는 의미다.
어떤 경험은 직접 바라볼 때, 너무나 큰 감정적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래서 에리봉은 길게 우회한다, 아니 에르노,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장 주네, 장 폴 사르트르..
이론을 우회함으로서 우리는 고통을 언어화하고, 비로소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자서전으로서 학문이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부르디외의 구별짓기가 그러하듯, 에리봉의 이 책 역시 그런 의미에서 학문인 동시에 자서전이다.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자신의 과거, 그리고 가족사를 돌아보며, 계급과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자신을 상호 교차하여 구성했으며, 또 자신이 어떻게 자기를 구성했는지를 말한다.
자신에 대해 사회적 구성과 자기 구성이 어떻게 교차했는지에 대한 자기민족지다..
자기를 재구성하려면 우선 어떻게 자기가 만들어져왔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노동계급 출신인 것과 동성애자라는 것, 이 둘은 상호작용하며 스스로를 사르트르주의자로, 지식인으로, 기자로, 끊임없이 만들어나갔다.
그러고 나면, 어쩌면 거기서 한 발짝 쯤 옆으로 비켜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해방은 아닐 것이지만.. 그건 푸코적인 의미에서 저항이리라..
어쩌면 인생책들 가운데 하나로 들어갈지도 모르겠고, 그 정도까진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좋은 책이었고, 많은 답을 주었으며, 두고두고 볼 책이다.
사길 잘했다. 별점 다섯 개 줬다.
로티...에리봉...아롱...어렵다! 기성세대 또는 권력의 우위에 있어 편하게 사유할 수 있는 로티 같은 사람들을 까는건가? 잘 모르겠네
그냥 내 의식의 흐름 감상임.. 로티 얘기는 내가 주저리주저리 쓴거고, 원문에는 없음..
주제 자체는 어떻게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점과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자신을 구성해냈는지에 대한 자기서술임. 근데 나는 그게, 로티 앞에 들이밀고 싶어지는 글이었음..
@Fraternite 로티 검색해보니 포모+실용주의자라던데 에리봉 글은 그런 철학의 반대 입장인가?
@책은도끼다 에리봉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놓고 극좌임ㅋㅋ 뭐, 로티와의 대립은 내가 일부러 만든거지만, 레몽 아롱같은 양반들 대놓고 까기땜시..
로티<<<세기말 리버럴의 자기정당화
존나 나이브하다고 생각해서 원래도 그리 안 좋아했는데, 그에 비해 에리봉의 이 책이 자기 재구성이 뭔지에 대해서 훨씬 진솔하고 사실적인 스케치라고 생각함..
어렵구만...
글 자체는 안 어려운데 제가 의식의 흐름으로 써서 ㅎ
함 츄라이 츄라이
아 나도 이거 넘나 정이가서 사버림 ㅋㅋ ps. 게이라서 산 건 아님
ㄹㅇ 좋았음..
이거 내 인생의 책이야
나도 인생책 될지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듯.
눈을 떴구나.
그렇다면 누군가가 에리봉 당신은 백인이고 프랑스인 남성이지 않나? 흑인도 아니고 프랑스 식민지민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권력만땅 백인에 교수지 않냐고 할 수있지 않을까?
뭐 다수자라는건 원죄다 이런 소리를 하려는게 아님.. 누구나 어떤 측면에서는 다수자고.. 다만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을 재구성해나가는게 아니라 사회적 벡터에 의해 구성되어간다는 것, 그리고 로티의 나이브함과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그가 소수자에 속할 때, 자기 재구성이란 지적 유희가 아니라 긴급한 실존적 필요일 수 있다는 생각..
로티 인생도 고난이 없던게 아닌데. 그 할배 알면서도 너스레 떨년서 모르는척하고 그럼. 너무 미워하지마.
그냥 특유의 나이브함에 살짝 긁힌 덧 ㅋㅋ
오토픽션에 너무 심취하지 마시오
난 오히려 소수자들이 백인 남성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기득권자로 취급하는, 그 자체의 고정적인 사고방식을 요즘따라 비판하고 싶던데 뭐 최근에서야 형성된 주요 담론이라 더 반박하고 싶음.. - dc App
머 딱히 정체성 정치를 옹호하거나 그러려는 글은 아닌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