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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는 숨겨진 현실 이야기가 있다. 메리는 남편 퍼시 셸리와 함께 더블린에서 수많은 아일랜드 빈민을 보았고, 그들에 대한 영국의 차별적 외모 묘사는 그대로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에 녹아들었다. 큰 키에 거친 피부를 가졌고 감자를 먹으며 넝마주이를 걸치고 같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모습. 그리고 또 하나.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던 당시 그녀가 살던 스위스는 '여름이 없는 해'라고 불리는 이상 기후 속에 있었고, 저온으로 인한 끔찍한 작황 속에서 수많은 스위스 및 인근 독일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악천후와 식량 문제는 도시 바깥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왔으며, 도시는 능숙하게 이들을 가장 쓰레기 같은 곳으로 몰아냈다. 도시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과정 중 죽은 사람이 많은 것을 도시의 문제로 돌릴 수도 없다. 이상 기후의 원인은 인도네시아 화산 폭발로 추정되며, 그 이상 문제될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마이크 데이비스의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를 돌아보자. 유럽 바깥의 수많은 지역에서 엘니뇨는 치명적인 위기로 다가왔다. 식량 생산율이 떨어지는 동안 대부분의 식량은 위기를 위해 보존되기보다는 상품으로서 팔려나갔으며, 유럽이 벨 에포크를 누리는 바로 그 시기에 유래없는 대량 아사가 전지역을 휩쓸었다. 상품을 판매한 것은 지역 상인과 공직자였으며, 시장은 그리 많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쓸 때 목격했던 것처럼, 부유한 이들은 죽어가는 기후 난민들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구태여 돕지 않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마땅한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역사가 반복되는 것일까? 단지 힘든 시기에는 힘든 결정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흥미롭게도, 많은 피해 지역에는 이런 사태를 대비하는 비축 식량 제도가 있었고, 바로 이 비축 식량이 대량 아사의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 팔려나가고 있었다. 여기에서 윤리의 미묘한 측면이 나온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벨트를 장착하지 않는 선택은 어느 수준으로 비윤리적인가? 이미 있던 안전벨트를 팔아치우는 것은?



<재앙의 지리학>에서는 이 능동적인 의도가 한층 더 복잡해진다. 단발성 기후 재앙 한번 한번이 의도된 상황은 아니지만, 기후 위기의 빈도가 높아지는 상황은 충분히 의도적인 행위다. 기후 위기에 대한 연구는 화석 연료의 연소와 이상 기후의 빈도 사이의 연결고리를 명시했으며,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있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다. 기후 재앙은 역사가 증명하듯 더 빈곤하고 위험한 지역들에 우선적으로 쏟아지고 있되, 그저 무지성적으로 쏟아져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재앙의>에서는 이 집중된 기후 위기에서 또 한 차원의 의도성을 더한다. 기후라는 막대한 공유지를 다루는 자본의 문제보다 더 소규모로 직접적인 문제, 인클로저다. 지역 사회는 산업화 과정 속에서 매번 살기 힘든 환경으로 악화되며, 농수산물의 작황과 생존 여건의 이중 악화 속에서 많은 지역 사회 주민은 도시의 염가 인력 시장에 편입되기를 강요받는다. 도시의 인력 시장은 이 유사 인클로저 과정의 혜택을 받아 인력에 구애받지 않고 사업을 이끌어나갈 수 있으며, 이는 양성 되먹임으로 다시 도시 바깥 생활 여건의 악화로 돌아온다.



여기에는 매슈 데즈먼드의 <미국이 만든 가난>에서 보여주는 수사법이 있다. 빈곤 문제를 (독자로 상정된) 우리가 돕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시각은, 우리가 그 빈곤에서 혜택을 보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망각하게 해준다는 비판. (독일 시민으로 상정된) 우리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믿으며 친환경 다국적 기업이 생산 과정을 다각화해 각 지역의 공장들이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며 환경 개선과 자본 생산, 두 측면을 전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외주 공장은 오히려 생산 과정을 모니터링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유용하며, 다국적 기업 역시 구태여 저 먼 거리의 공장들을 감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지속 가능성은 감시 태만을 위한 마패로 활용되고 있으며, 단지 그뿐이다. <재앙의>의 저자 로리 파슨스는 남아시아와 캄보디아의 여러 기후 위기를 취재해 발표하는 과정에서 많은 청중의 관심 어린 질문을 받았고, 그 질문이 근본적으로 대답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소비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소비자는 이걸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리고 정말 유의미한 수준으로는 동참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윤리와 실천의 문제는 비비 꼬인 구석이 있다. 단순히 과거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은 산업혁명 이전의 과거 역시 근본적으로 현재와 다르지 않은, 단지 규모 차원에서만 더 작은 사회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그 비판은 합당하다. 기후 부정론자를 포함한 '화석 자본' 소유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책임을 물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침묵하는 대다수의 선진국 시민이 현재의 생활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책임 대상이 너무나 막대해진다. 바로 그 점에서 실천하기도 어려운 문제가 될 것이다. 현 상황을 일종의 맬서스 트랩으로만 취급하려는 입장이 상술한 저서들로 인해 무력해졌다고 한다면, 정말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모든 위기의 끝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종말론적 기독교인처럼 어느날 하늘이 무너지고 태풍의 모습을 한 천사 군단이 천둥벼락의 뿔나팔을 부는 걸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만, 정작 그 종말 뒤에 무엇이 와야 좋을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