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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우튀프론의 가장 큰 주제는 경건함일 것이다. 정확히는 경건함이란 무엇인가이다. 그러나 대화는 오리무중인 채로 끝난다. 대화의 정리는 이와 같다.


 1: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에게 경건함이란 무엇인가 물음.

 2: 에우튀프론은 신들을 예시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자신을 대표적 예로써 들음.

 3: 하나, 소크라테스가 원하는 것은 정의로, 그는 다시금 물음.

 4: 에우튀프론은 신들에게 사랑받음이 경건이라 함.

 5: 소크라테스는 경건함이 신들에게 사랑받기에 경건한 것인지, 경건하기에 사랑받는 것인지를 물음.

 6: 경건함 ≠ 신들의 사랑받음인 것이 밝혀짐.

 7: 경건함은 정의로움의 한 축이라는 전제로 다시금 소크라테스는 물음.

 8: 에우튀프론은 신들을 향한 보살핌이라 주장.

 9: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상호 거래라 말하고, 신들이 무엇을 얻는지 물음.

 10: 에우튀프론은 신들이 흡족함을 얻게 되고, 그것이 경건함이며 신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이라 주장.

 11: 소크라테스가 다시 돌아온 상황을 지적하자, 에우튀프론은 도망.



 여기서 개인적으로 6번에 관해 말하고 싶다.


 6번은 소크라테스의 과격한 주장이라 보고서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주석이 이를 지적하며, 옹호한 것처럼 나도 옹호하고 싶다. 앞서 4번 신들에게 사랑받음이 경건함이라 했다. 즉, 신들에게 사랑받음 = 경건함이라는 것이다. 이제 5번의 논쟁을 다시 살펴 보면 소크라테스는 우선 전자를 반박한다. 그리고 6번에서 후자도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앞서 4번을 보자. 신들에게 사랑받음 = 경건함인데, 경건하기에 사랑받는다 했으니, 경건함을 사랑받음으로 바꾸면, 신들에게 사랑받기에 사랑받는다는 순환 논증이 탄생한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짤막히 지적한 게 아닐 성싶다.



 이 대화는 에우튀프론과 소크라테스의 대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경건하다 칭하는 에우튀프론과 불경죄로 죽은 소크라테스, 예언가이나 소크라테스의 미래를 몰랐던 에우튀프론과 독배를 받아 들인 소크라테스, 경건함과 정의. 개인적으로는 이것들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재밌어 보인다.



 에우튀프론은 결론이 오리무중으로 끝난다. 그렇기에 학자들은 여러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호한 결론이, 경건도 불확실하면서도, 불경죄로 죽게 된 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자조 섞인 변론일지도 모르겠다.



오류 지적 대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