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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변신’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 잠시 쉬어 가자는 마음으로 집어 든 소설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서, 느낌상 흐름이 이어질 만한 작품을 고른 것이다. 읽고 난 소감으로는, “카뮈의 문제의식에서 완전히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도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는 나의 의도에 꽤 정확히 부합하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벌레로 변해 가족들에게 점점 잊혀져 가는 그레고르를 보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독붕이들이 한 번쯤 거쳐갔을 생각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가족의 삶을 지탱해 왔던 경제력과 역할이 사라지는 순간 이렇게까지 가벼워질 수 있을까. 덧없다고 말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 아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상황은, 카뮈가 말한 의미의 ‘부조리’에 가깝게 느껴진다.


허나 그런 부조리 속에서도 그레고르는 완전히 사라지려 하지 않았다. 방 안에 갇힌 채로 계속 존재를 드러내려 하고, 천장에 매달려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벽에 붙어 액자를 지키려는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반항’처럼 보이기도 한다. 벌레가 된 뒤에는 가족의 인정마저 빼앗긴 상태에서,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 한다. 결국 가족의 인정을 되찾지 못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지만, 오히려 그 실패 때문에 ‘반항’이라는 개념이 더 또렷해지는 느낌이 있다. 반항이란 어떤 거창한 저항이라기보다, 그레고르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그래도 나는 살아 있겠다”는 태도, 즉 삶의 양식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반항은 이런 식의 장면들과 정확히 겹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레고르의 행동이 정통 카뮈식 반항인가’를 따지는 것은 조금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레고르를 보며 무엇을 느꼈는지, 그리고 그 느낌이 내 삶을 어떻게 비추는지라고 생각한다.


그 감정을 최대한 더듬어 한 문장으로 말해 보자면, 아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허무하기에, 오히려 살 만한 것이다.”


인정은 쉽게 무너지고, 삶의 이유는 자주 손에서 미끄러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방 안 어딘가에서 천장에 매달리고, 액자 하나를 끝까지 지키려 한다. 그 소소하고 우스워 보이기까지 한 몸짓들 속에서, 나는 부조리 속에서도 계속 살아 보려는 반항의 얼굴을 잠깐 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