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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무엇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렵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비판은 사소한 트집잡기부터 근본적으로 중대한 모순까지 다양한 수준으로 간단히 펼칠 수 있지만, 그 비판 대상을 만드는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먼저 무언가를 투박하게나마 만들어본 다음 여기서 문제점을 하나씩 수정해나가며 나아가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 있을 텐데,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는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없다. 먼저 어떤 큰 그림, 어떻게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제시되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수정에 의미가 생긴다. 그리고 사실, 현대에 무언가가 진정으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란 힘들다. 이상을 제시한다는 것은 그 밑에서 고통받을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 대신 뚜렷한 이상은 없더라도, 현재 산재한 다양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겠다는 소박한 목표의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서 있을 수 있는 기반을 계속 단단하게 만들되, 그 위에서 무엇이 되겠다는 주장에는 굳이 손을 대지 않겠다는 것.
체스터턴의 <이단>은 바로 이런 시대의식 속에서, 비판을 무릅쓰고 무엇이 좋고 도덕적인 것이냐는 질문에 답하는 기독교 정신을 옹호하는 책이다. 당대 영국은 특히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시민권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며, 유미주의, 사회주의, 유물론, 과학주의 등 다양한 세력이 기독교를 비판하며 세속화를 추구했다. 기독교는-최소한 영국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미-기독교가 탄압하고자 하던 하나의 이단 세력이 되었다. 체스터턴이 이 비판 속에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요약될 수 있다. 기독교는 이 모든 세력이 진정으로 '좋은 것'을 내세우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좋은 것'을 내세울 수 있다. 그 좋은 것은 다른 이들이 잊고 있는 인간적인 요소인데, 늘 어쩔 수 없이 곤경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세상에서 이 가혹함 위로도 무언가 위대한 것이 피어날 수 있다는 꿈을 꾸며, 추하고 거리 두고 싶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을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이라는 것. 곧, 기독교는 자신이 기반으로 두고 있는 인간 사회를 충분히 잘 알고 있고, 그럼에도 그 위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체스터턴이 비판하는 대상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인간성을 상실했다. 키플링은 제국주의보다도 세계시민주의에 너무 심취해 정작 영국이라는 고향조차 자세히 보지 못하는, 고향 없는 방랑자가 되었다. 버나드 쇼는 도덕성을 위해 다양한 사회 개혁을 꿈꾸다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고 사람 자체가 더 낫게 개조된 초인을 꿈꾸게 되었다. H. G. 웰스는 과학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믿음 아래에서 사회의 진보를 오직 과학적 진보의 측면에서밖에 볼 수 없게 되었고 그 탓에 그가 제시하는 그 어떤 과학적 이상향보다도 더 설득력 넘치는 과학적 디스토피아 <타임머신>만을 낳았다. 오마르 하이얌은 유미주의자들이 그렇듯, 삶을 그저 버텨야만 할 대상으로 보며 단기적 쾌락을 쫓으며 자연과 술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왔을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목석이 되고야 말았다. 그 외에도 합리적이고 엄숙한 절차를 가장 중요시하는 이들과(조셉 맥케이브), 기독교 이전의 이교의 흔적을 찾으며 비합리적인 신비를 믿는 이들이 있고(예이츠), 이 모두는 그 이념이 포용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을 잊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분명한 이상이 있었고, 실제로 현재까지도 이름을 남긴 명작들을 남겼다. 체스터턴이 더 문제라고 보는 것은 그런 이상조차 없는, 그저 현실에 급급한 이들이다. 이들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참 나약한 것이다. 체스터턴이 니체의 관점주의적인 철학을 비판하는 방식도 여기 맞닿아 있는데, 그는 니체가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그 스스로가 바로 약자의 철학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무리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감, 삶이 급작스럽게 무너져 내리지 않으리라는 안정감이 있으며, 자신이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을 수도 없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약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도덕과 사회적 제도가 그저 주관적이고 역사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건강에 대한 비유를 빌리자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각종 증세에 그리 염려하지 않다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민감해진다. 자신이 잘해나가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힘이야말로 참으로 강대한 것이며, 애석하게도 많은 이들이 갖출 수 없는 사치이다.
사실 바로 그렇기에 기독교가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체스터턴은 본인을 포함해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독교를 추천하는데, 믿음과 의례는 본디 의미로는 정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단>이 독자를 설득하는 방식은 그럴싸한 비유와 신랄한 질문, 그리고 진솔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상상해보라고 요구한 다음, 이를 상상하며 우리 안에서 떠오르는 감정을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묻는다. 정말 그런 방식으로 삶을 살 수 있는가? 정말 그런 방식으로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정말 그게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가? 만약 이 각각의 질문에 자기 스스로 답할 수 있다면 문제는 되지 않는다. 체스터턴은 자신과 다른 이상을 가진 이단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런 이들에게까지 기독교를 추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기독교 신자라는 이단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애초에 그게 이렇게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테다-체스터턴의 글이 하나같이 매우 뜻 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탓에 오히려 <이단>을 남에게 추천해주기가 애매해졌다. 아마 이걸 추천받는다면 삶이 힘들어 보인다는 뜻으로 전달될 테니까.
참 20세기 초 기독교 신자가 쓸법한 글이로군..
니붕이 까이는 지점이 재밌네 니체 철학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니체의 책을 거들떠 볼 이유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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