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댓글로 써주세요 저는 본문에 쓰겠습니다.@


이하 인용은 박종현 번역으로 함.


유명한 작품이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플라톤 대화편이다. 하지만 플라톤답게 작품 내에 생각할 거리가 굉장히 많다.


소크라테스의 주된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았다.'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음'

이다


각각 작품 내내 소크라테스가 변론을 펼치고 있지만, 문득 드는 생각은 바로 주관일 것이다. 타락, 믿음, 영적인 것.

어느 것 하나 소위 말하는 견해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데 이를 이유로 한 사람의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고 만다.


19a - 여러분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갖게 된 이 선입관(아카넷 강철웅 번역은 = 비방)을 저는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여러분한테서 제거해야만 합니다.


<변론>에서 말하는 선입관은 곧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주관에서 뻗은 생각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겪었던 일을 하나 꺼내보겠다.

친한 친구가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 친구 가게 바로 앞 화단에는 항상 제철 꽃이 이쁘게 심어져있다.

꽃을 좋아하는 친구가 일부러 싸게는 5천 원에서 비싸게는 만 원까지 가는 화분을 열심히 옮겨 가꾸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매번 캐가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다가 cctv가 있다는 푯말까지 박아놨어도 꾸준히 챙겨가길래 얼굴이나 한 번 보자 싶어 돌려본 결과 바로 자주 가던 옆 골목 식당 아주머니였다.

더 웃긴 건 화단이 총 4번 뽑혔는데 3번째 4번째 범인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후드티로 덮고 있었다.

처음 가져간 그 식당 아주머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것. 그나마 신원 파악이 된 식당으로 넌지시 캐물어보려고 같이 갔는데 아주머니가 멋쩍게 웃더니 '아유 난 아무나 가져가도 되는 줄 알았지. 그거 뭐 그냥 꽃이잖아~.'라고 말하면서 막걸리 한 병 넌지시 식탁에 밀어주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카운터 옆에 익숙한 꽃이 보였다.

난 개빡쳤지만 친구는 동네 장사하면서 시끄러워지는 건 안 좋다고 생각했는지 제가 몇 송이 드릴테니까 다신 그러지 말아달라고 웃으면서 말하곤 남은 밥이나 처먹었다.

그럼 구렇지하는 그 아줌마 표정때문에 간헐적으로 빡친다


말도 없이 캐가기 전에 어째서 하나 달라고 부탁 하지 않았을까. 엄연히 절도인 걸 몰랐을까. 옳지 않은 행동인 걸 몰랐을까 막걸리를 쓰윽 주면서?
그까짓 풀 누가 좀 가져간다고 문제라도?

주관이란 소수의 의견과 믿음인 걸까? 그렇다면 대중의 의견은 주관이 아닌가?

주관이란 개인의 의견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대중의 의견으로 선고 한 소크라테스 법정은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게 되는 건가?

주관이란 생각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길래 옳지 않은 걸 옳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옳은 걸 옳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일까?

애초에 옳고 그름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20a서는 arete가 언급되고

20b에서는 techne가 나오며

20c에서는 epistamai 가 나온다.


플라톤 대화편의 시작점이라고 알려진 <변론>에서 벌써부터 대화편 전반의 물음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무지에 대한 내용도 21d와 29a-b 등에서 나오고 있으며

다이몬에 대한 내용 27b


그 유명한 지혜에 대한 사랑은 28e에서 나온다.


29e- 자신의 혼(psyche))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30b- 재물로 해서 사람으로서의 훌륭함(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훌륭함(덕)으로 해서 재물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것들로 되는 것입니다.(박종현 역)

이 부분은 강철웅 번역에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1. 덕에는 일반적으로(반드시x) 부나 선이 뒤따른다.

2. 덕으로부터 나와야만 돈과 선들이 인간들에게 좋은 것이 된다.


플라톤 덕후이신 박종현 선생님은 2번의 견해에 가깝게 번역하였다. 정암학당 아카넷 강철웅 선생님 번역은 1번에 가깝게 그리고 독자의 해석에 맡긴다는 주석을 첨부해두었다.


훌륭함에서 재물과 그 밖의 것들의 좋음이 뻗어 나온다. 가볍게 보면 돈이 많다고 좋은 놈이 아니라 좋은 놈이 돈도 잘 번다.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데 그렇게 단순한 내용은 아니다.


혼으로 치환해서 혼이 최대한 출중하게 되도록 혼을 보살피라는 젊은이를 향한 70대의 가르침.

젊은 사람 입장에서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존경받는다니 말이 안 된다며 고소미 시전.

내가 볼 때 이 사달이 벌어진 이유가 바로 이 문단에 있는 것 같다.


도대체 훌륭함이란 뭐고 혼은 뭐길래 꼰대질이냐.




플라톤 <변론>은 앞으로 전개될 초기 대화편 내용을 축약해 놓은 요약본 성격을 가진다.

당연히 스승님의 말씀을 토대로 시작한 철학에서 쭉 뻗어나가는 플라톤이라 당연하겠지만, <변론> 단권으로 볼 때는 어떠한 설명도 없기 때문에 굉장히 불친절하다.

이런 불친절함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다 길게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서 쓰는 건 앞으로 독회를 이어가는 데 도움 되긴커녕 방해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재미는 남겨두고


이런 불친절함과 어쩔 수 없는 구조에서 오는 빠듯함.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각할 거리를 적어보겠다.


편의상 재인용으로 복붙하겠다.


19a - 여러분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갖게 된 이 선입관(아카넷 강철웅 번역은 = 비방)을 저는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여러분한테서 제거해야만 합니다.


추가로


37a-b -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이를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서로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중략) 사형과 관련된 재판은 불과 하루 만에 하지 않고 여러 날 동안에 하도록 하는 법률이 있었다면, 여러분께서도 납득이 되었을 것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커다란 편견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던 주관이 성립하기까지 필요한 건 무엇일까?


바로 시간이다.


잘못된 편견, 주관, doxa, 옳고 그름의 궤변, 이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남의 가게 앞 화단을 파헤쳐서 꽃을 캐가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한 것도 분명 그런 혼을 가지게 된 시간이 있었을 것이며,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타락시켜 따1먹는 못생긴 하드 게이니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 고소한 사람도 분명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덕과 훌륭함을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외치는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다.

너 자신의 무지를 찾아 혼을 돌보라는 언명을 계속해서 설파해도 주관이 뚜렷해진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기엔 상대적으로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31a- 성가신 마음 상태가 되어서는 저를 탁 치듯. (등에를 손바닥으로 탁 치는 것처럼)


옳지 않은 것에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옳은 것을 바라보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알아야 옳은 것을 마주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곱씹어 보자.

법정의 날카로운 시선과 혼란한 와중에 설파한 말이 당신들 귓가에 잠깐이라도 맴돌게 했다면 그것 만으로 의미가 있으리라.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40a- 제게 익숙한 그 영적인 것(to daimonion)의 예언 (알림)


소크라테스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나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지를 훑어본다.


이제 마지막 문구를 살펴보자


42a- 하지만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저에게는 죽으러, 여러분한테는 살아가려 떠날 시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신을 빼고는 모두에게 불명한 일입니다.


익숙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무지를 밝히고 있다.

떠날 시간을 알고, 죽을 것을 알고, 죽음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는 걸 알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도 죽음과 삶의 알 수 없는 부분은 아무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무지를 향한 발걸음은 강철웅 아카넷 번역의 해설처럼 기나긴 변론의 시작부터 준비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17a- 저는 알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절대적인 완벽한 파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지해서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영혼은 무엇일까?

앞으로 다른 대화편을 쭉 보면서 수많은 논의가 있겠지만, 잠깐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해석 일부를 끌고 와보자.

영혼은 어느 사물에도 파묻히지 않고, 인식론적으로 독립한 채 모든 것을 고찰하는 것이다.

바깥의 대상을 졸졸 따라다니면 인식 주체가 될 수 없다. 타자에 종속되어버리니까. 주관, 견해, doxa, 궤변 등은 영혼이 영혼 스스로, 자체적으로 돌보지 않고 줄곧 바깥의 것에 매몰된 것을 말한다.

예컨대 옳은 것은 돈과 권력이고 힘입니다. 이는 온갖 궤변으로 옳은 것  그 자체의 물음에서 벗어나 다른 것을 뒤집어 씌우려는 것으로 영혼을 돌보지 않은 사람의 말이다.


바깥 대상과 분리된 채 그 자체로 우뚝 서서 온전히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


우리 인간은 무지하기에 설사 그 물음으로 인해 완전한 답을 얻지 못해 죽음과 삶의 좋고 나쁘고를 알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처럼 될지라도


끝까지 묻고 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닌 영혼이며, 소크라테스가 말한 다이몬의 목소리가 아닐까.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가였던 베르그송도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자. 하지만 그 무지가 결정적이라고 믿지는 말자."




+@ <변론>에서 자꾸만 시간이 짧게 주어졌다고 하는 건 플라톤이 스승님의 변론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탓에 그렇게 쓴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변론>은 차분한 문장으로 쓰여있지만, 실제로는 말 한마디 하려면 끼어드는 개판이었을지도 모른다.



+@ 아래 캡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박종현 선생님 번역 81p에서 변명이라고 안 하고 변론이라고 쓴 이유를 밝힌 글을


아주 옛날에 아카넷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선생님이 직접 논문 안에서 까신 글이다.


누구는 왜 변명으로 번역하고 변론으로 번역했는지 궁금했다면


재미진 할아버지들의 키스배틀이니까 읽어보시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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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론>은 <크리톤>과 한 쌍인데 이런 내용의 논문도 있습니다.

<변론>에서 훌륭함을 추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니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내용과

<크리톤>에서 무죄에 대해 확신해도 법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과 상반되지 않냐는 것입니다.

<변론>과 달리 <크리톤>에서는 훌륭함보다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것이죠.


여기에 다른 논문은

1.<변론>에서 모든 법적인 절차를 합법적으로 이행했기에 앞에 나와 법대로 변론하고 있다.

2. 철학 하는 삶을 권장하는 이유는 결국 시민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3.<크리톤>에 제기된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최종 목적을 달성.

즉 소크라테스는 공동체와 개인을 조화하면서 결국 공동체 우선시를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개인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철학이다. 뭐 이런 식으로 쓴 논문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이건 다음 주 <크리톤>독회로~~~


다음 주 일요일 독회는 <크리톤>과 <이온>을 읽어오시면 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