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댓글로 써주세요 저는 본문에 쓰겠습니다.@
이하 인용은 박종현 번역으로 함.
유명한 작품이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플라톤 대화편이다. 하지만 플라톤답게 작품 내에 생각할 거리가 굉장히 많다.
소크라테스의 주된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았다.'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음'
이다
각각 작품 내내 소크라테스가 변론을 펼치고 있지만, 문득 드는 생각은 바로 주관일 것이다. 타락, 믿음, 영적인 것.
어느 것 하나 소위 말하는 견해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데 이를 이유로 한 사람의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고 만다.
19a - 여러분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갖게 된 이 선입관(아카넷 강철웅 번역은 = 비방)을 저는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여러분한테서 제거해야만 합니다.
<변론>에서 말하는 선입관은 곧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주관에서 뻗은 생각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겪었던 일을 하나 꺼내보겠다.
친한 친구가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 친구 가게 바로 앞 화단에는 항상 제철 꽃이 이쁘게 심어져있다.
꽃을 좋아하는 친구가 일부러 싸게는 5천 원에서 비싸게는 만 원까지 가는 화분을 열심히 옮겨 가꾸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매번 캐가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다가 cctv가 있다는 푯말까지 박아놨어도 꾸준히 챙겨가길래 얼굴이나 한 번 보자 싶어 돌려본 결과 바로 자주 가던 옆 골목 식당 아주머니였다.
더 웃긴 건 화단이 총 4번 뽑혔는데 3번째 4번째 범인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후드티로 덮고 있었다.
처음 가져간 그 식당 아주머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것. 그나마 신원 파악이 된 식당으로 넌지시 캐물어보려고 같이 갔는데 아주머니가 멋쩍게 웃더니 '아유 난 아무나 가져가도 되는 줄 알았지. 그거 뭐 그냥 꽃이잖아~.'라고 말하면서 막걸리 한 병 넌지시 식탁에 밀어주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카운터 옆에 익숙한 꽃이 보였다.
난 개빡쳤지만 친구는 동네 장사하면서 시끄러워지는 건 안 좋다고 생각했는지 제가 몇 송이 드릴테니까 다신 그러지 말아달라고 웃으면서 말하곤 남은 밥이나 처먹었다.
그럼 구렇지하는 그 아줌마 표정때문에 간헐적으로 빡친다
말도 없이 캐가기 전에 어째서 하나 달라고 부탁 하지 않았을까. 엄연히 절도인 걸 몰랐을까. 옳지 않은 행동인 걸 몰랐을까 막걸리를 쓰윽 주면서?
그까짓 풀 누가 좀 가져간다고 문제라도?
주관이란 소수의 의견과 믿음인 걸까? 그렇다면 대중의 의견은 주관이 아닌가?
주관이란 개인의 의견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대중의 의견으로 선고 한 소크라테스 법정은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게 되는 건가?
주관이란 생각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길래 옳지 않은 걸 옳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옳은 걸 옳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일까?
애초에 옳고 그름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20a서는 arete가 언급되고
20b에서는 techne가 나오며
20c에서는 epistamai 가 나온다.
플라톤 대화편의 시작점이라고 알려진 <변론>에서 벌써부터 대화편 전반의 물음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무지에 대한 내용도 21d와 29a-b 등에서 나오고 있으며
다이몬에 대한 내용 27b
그 유명한 지혜에 대한 사랑은 28e에서 나온다.
29e- 자신의 혼(psyche))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30b- 재물로 해서 사람으로서의 훌륭함(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훌륭함(덕)으로 해서 재물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것들로 되는 것입니다.(박종현 역)
이 부분은 강철웅 번역에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1. 덕에는 일반적으로(반드시x) 부나 선이 뒤따른다.
2. 덕으로부터 나와야만 돈과 선들이 인간들에게 좋은 것이 된다.
플라톤 덕후이신 박종현 선생님은 2번의 견해에 가깝게 번역하였다. 정암학당 아카넷 강철웅 선생님 번역은 1번에 가깝게 그리고 독자의 해석에 맡긴다는 주석을 첨부해두었다.
훌륭함에서 재물과 그 밖의 것들의 좋음이 뻗어 나온다. 가볍게 보면 돈이 많다고 좋은 놈이 아니라 좋은 놈이 돈도 잘 번다.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데 그렇게 단순한 내용은 아니다.
혼으로 치환해서 혼이 최대한 출중하게 되도록 혼을 보살피라는 젊은이를 향한 70대의 가르침.
젊은 사람 입장에서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존경받는다니 말이 안 된다며 고소미 시전.
내가 볼 때 이 사달이 벌어진 이유가 바로 이 문단에 있는 것 같다.
도대체 훌륭함이란 뭐고 혼은 뭐길래 꼰대질이냐.
플라톤 <변론>은 앞으로 전개될 초기 대화편 내용을 축약해 놓은 요약본 성격을 가진다.
당연히 스승님의 말씀을 토대로 시작한 철학에서 쭉 뻗어나가는 플라톤이라 당연하겠지만, <변론> 단권으로 볼 때는 어떠한 설명도 없기 때문에 굉장히 불친절하다.
이런 불친절함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다 길게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서 쓰는 건 앞으로 독회를 이어가는 데 도움 되긴커녕 방해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재미는 남겨두고
이런 불친절함과 어쩔 수 없는 구조에서 오는 빠듯함.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각할 거리를 적어보겠다.
편의상 재인용으로 복붙하겠다.
19a - 여러분께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갖게 된 이 선입관(아카넷 강철웅 번역은 = 비방)을 저는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여러분한테서 제거해야만 합니다.
추가로
37a-b -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이를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서로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중략) 사형과 관련된 재판은 불과 하루 만에 하지 않고 여러 날 동안에 하도록 하는 법률이 있었다면, 여러분께서도 납득이 되었을 것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커다란 편견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던 주관이 성립하기까지 필요한 건 무엇일까?
바로 시간이다.
잘못된 편견, 주관, doxa, 옳고 그름의 궤변, 이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남의 가게 앞 화단을 파헤쳐서 꽃을 캐가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한 것도 분명 그런 혼을 가지게 된 시간이 있었을 것이며,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타락시켜 따1먹는 못생긴 하드 게이니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 고소한 사람도 분명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덕과 훌륭함을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외치는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다.
너 자신의 무지를 찾아 혼을 돌보라는 언명을 계속해서 설파해도 주관이 뚜렷해진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기엔 상대적으로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31a- 성가신 마음 상태가 되어서는 저를 탁 치듯. (등에를 손바닥으로 탁 치는 것처럼)
옳지 않은 것에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옳은 것을 바라보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알아야 옳은 것을 마주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곱씹어 보자.
법정의 날카로운 시선과 혼란한 와중에 설파한 말이 당신들 귓가에 잠깐이라도 맴돌게 했다면 그것 만으로 의미가 있으리라.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40a- 제게 익숙한 그 영적인 것(to daimonion)의 예언 (알림)
소크라테스에게는 익숙하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나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지를 훑어본다.
이제 마지막 문구를 살펴보자
42a- 하지만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저에게는 죽으러, 여러분한테는 살아가려 떠날 시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신을 빼고는 모두에게 불명한 일입니다.
익숙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무지를 밝히고 있다.
떠날 시간을 알고, 죽을 것을 알고, 죽음과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는 걸 알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도 죽음과 삶의 알 수 없는 부분은 아무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무지를 향한 발걸음은 강철웅 아카넷 번역의 해설처럼 기나긴 변론의 시작부터 준비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17a- 저는 알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절대적인 완벽한 파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지해서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영혼은 무엇일까?
앞으로 다른 대화편을 쭉 보면서 수많은 논의가 있겠지만, 잠깐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해석 일부를 끌고 와보자.
영혼은 어느 사물에도 파묻히지 않고, 인식론적으로 독립한 채 모든 것을 고찰하는 것이다.
바깥의 대상을 졸졸 따라다니면 인식 주체가 될 수 없다. 타자에 종속되어버리니까. 주관, 견해, doxa, 궤변 등은 영혼이 영혼 스스로, 자체적으로 돌보지 않고 줄곧 바깥의 것에 매몰된 것을 말한다.
예컨대 옳은 것은 돈과 권력이고 힘입니다. 이는 온갖 궤변으로 옳은 것 그 자체의 물음에서 벗어나 다른 것을 뒤집어 씌우려는 것으로 영혼을 돌보지 않은 사람의 말이다.
바깥 대상과 분리된 채 그 자체로 우뚝 서서 온전히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
우리 인간은 무지하기에 설사 그 물음으로 인해 완전한 답을 얻지 못해 죽음과 삶의 좋고 나쁘고를 알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처럼 될지라도
끝까지 묻고 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닌 영혼이며, 소크라테스가 말한 다이몬의 목소리가 아닐까.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가였던 베르그송도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자. 하지만 그 무지가 결정적이라고 믿지는 말자."
+@ <변론>에서 자꾸만 시간이 짧게 주어졌다고 하는 건 플라톤이 스승님의 변론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탓에 그렇게 쓴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변론>은 차분한 문장으로 쓰여있지만, 실제로는 말 한마디 하려면 끼어드는 개판이었을지도 모른다.
+@ 아래 캡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박종현 선생님 번역 81p에서 변명이라고 안 하고 변론이라고 쓴 이유를 밝힌 글을
아주 옛날에 아카넷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선생님이 직접 논문 안에서 까신 글이다.
누구는 왜 변명으로 번역하고 변론으로 번역했는지 궁금했다면
재미진 할아버지들의 키스배틀이니까 읽어보시길 추천
+@ <변론>은 <크리톤>과 한 쌍인데 이런 내용의 논문도 있습니다.
<변론>에서 훌륭함을 추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니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내용과
<크리톤>에서 무죄에 대해 확신해도 법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과 상반되지 않냐는 것입니다.
<변론>과 달리 <크리톤>에서는 훌륭함보다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것이죠.
여기에 다른 논문은
1.<변론>에서 모든 법적인 절차를 합법적으로 이행했기에 앞에 나와 법대로 변론하고 있다.
2. 철학 하는 삶을 권장하는 이유는 결국 시민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3.<크리톤>에 제기된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최종 목적을 달성.
즉 소크라테스는 공동체와 개인을 조화하면서 결국 공동체 우선시를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개인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철학이다. 뭐 이런 식으로 쓴 논문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이건 다음 주 <크리톤>독회로~~~
다음 주 일요일 독회는 <크리톤>과 <이온>을 읽어오시면 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근데 소크라테스의 올곧은 자세와 대화 내용을 생각해보면 변론이 더 나은 제목 같은데...원문은 변명과 가까운 단어인가? 저렇게까지 비판한건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책은도끼다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말하기라는 뜻이라 변호.변명.반박해 말하다.대항해 말하다 등등
@책은도끼다 취향차이지만 나도 변론이 좋아서 걍 변론이라고 씀ㅋㅋㅋㅋㅋ
@책은도끼다 원어 apologia는 log-(logos)라는 어근에서 보이듯 '논리적인 방식을 통해 어떤 혐의에서 벗어난다'라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일상 용어라기보다는 연설이나 법정에서 쓸 만한, 딱딱한 어감의 단어라고 하네요. 이래저래 단어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변론' 쪽이 더 맞는 말 아닌가 싶은데.... 저 주석을 보면 아무래도 예전에는 철학도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가 구차하게 변명하는 모습은 너무 하찮으므로, '변명'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이야기가 나왔었나 봅니다.
우와 짤보니까 진짜 내용을 다 까먹어부렸넹 - dc App
솔직히 본인을 추방해도 어딜 가든 떠벌대면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늘상 하던 짓을 할 것이니 날 막으려거든 사형이나 시키쇼 하는 것은 좀 마음에 들지 않긴 함.. 근데 소크라테스 본인이 삶에 연연하지 않은 뉘앙스를 풍긴 것도 있고,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지면 얼마든 본인 좋아하는 지혜 탐구를 할 수 있으니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사형이 오히려 선물 같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봄. 그리고 자신의 삶을 자신 뜻대로 마무리하는 것도 사실 쉽지 않은 선택이니 현대인 입장에서도 대단한 것 같음. 만약 그가 삶을 택했다면 불멸의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그의 죽음이 플라톤을 각성시켰으니 결과적으로 좋았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해봄 - dc App
<변론> 독해는 종종 아쉬운 게..... 세계대전을 빼놓고 포스트모던을 논할 수 없듯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빼놓고 <변론>을 논하기 어려울 텐데, 전쟁의 여파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 등이 참여했던 30인 정권의 공포정치, 대사면령 같은 정치-사회적 조건들은 간과되고 텍스트를 순수하게 철학적으로만 해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음. 그러다 보니 아테네 시민들은 노인네가 잔소리 좀 했다고 다짜고짜 신성모독이라며 사형 판결을 내리는 멍청이들로 묘사되곤 하는데..... 전쟁에서 패배하고 전통적인 민주정이 붕괴할 뻔한 등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아테네에서 일종의 책임 묻기, 혹은 마녀사냥의 희생양으로 소크라테스가 지목됐다고 보면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싶음
확실히 플라톤 대화편과 전쟁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 그런데 소크라테스 변론에서 정치 사회적 조건도 법정의 이유가 있겠지만 플라톤 본인 입장에서 그렇게 이렇게 죽이나 저렇게 죽이나 똑같이 멍청한 놈들로 보였을 수밖에 없음 극심한 혼란에서 벗어날 길을 설파하던 사람을 지목해서 죽인다는 게 얼마나 얼마나 멍청한 짓임
소크라테스가 하필이면 '불경죄'로 고발당했던 건 bc403년의 사면령 때문에 법정에서 정치적 사건을 다룰 수 없어져서, 신성모독 같은 귀에 걸면 귀걸이식 논리로 아무 혐의나 뒤집어씌운 정치보복이라는 해석이 있죠. 제자들 중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 등이 매국노로 암흑진화를 해버려서.... 그래도 36a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형 반대표가 이렇게 많아서 의외였다"라고 언급할 만큼, 당시 아테네에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구실로 70살 먹은 노인네를 처형하는 건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목숨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기 싫었던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을 긁어대는 바람에 결국 사형당하기야 했지만....
@레알이랑 플라톤이 <변론>을 잘못 썼다기보다는, 우리나라 강단이 고전 텍스트를 너무 원문 자체로만 해석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디오테스(111.118) 그러니까 플라톤 입장에서 보면 멍청한 놈들이죠 정치보복이라던가 혐의라던가 소크라테스를 죽여야 사회가 이로워질 것이라 생각한 거 부터가 오랜 기간 doxa에 찌들어 있는 인간들이었던 것 그래서 변론내내 하는 이야기가 그거고 플라톤 철학에서 정치와 술수. 전쟁 배경을 생각해서 내린 선택이라고 똘똘한 놈인 것은 아님
@이디오테스(111.118) 고전 텍스트를 원문 자체로만 해석할 수밖에 없는게 전쟁 배경을 끌어들인 문헌학적 해석은 새로울 게 없음 전쟁관련 논문도 결국 플라톤 철학 전체에 대한 배경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변론에서 이런 이런 배경으로 죽었답니다. 해석을 내려도 결국 변론 본문에서 말하는 영혼을 돌보고 무지를 알라는 내용과 엇갈려버림
@이디오테스(111.118) 그런 온갖 배경이 있었음을 말한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소크라테스 철학 해석에서 다 먹어치워버리니까
아무튼, <변론>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꼽으라면, 25~26에 걸쳐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와 대화를 나누며 언급되었던 주지주의 떡밥이라고 생각함. "사람은 누구나 '좋음'을 이롭게 여겨 선호하고 '싫음'을 해롭게 여겨 꺼리며, '좋음'과 '싫음'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음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대충 이런.... 흔히 '좋음(Good)'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아가톤(Agathon/Ἀγάθων)'은, 한국어나 영어와는 어감이 살짝 다름. 대개 '좋음'이라 하면, 꽤 여러 가지 의미들이 섞여 있는 단어임. 대상의 상태가 멀쩡하다거나,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거나, 혹은 대상 자체의 성질과 무관하게 화자 본인의 감정적 기준에 의존하거나.....
@이디오테스(111.118) 고르기아스. 소피스테스. 테아이테토스. 전쟁에 관한 허무주의로 소피스트들이 나온 배경광 기타 등등을 말하는 건 무척이나 중요하지. 국내 현 강단에서 문헌학 해석을 중요시여기지 않는다는 건 잘못된 생각임
@이디오테스(111.118) 반면 그리스어 아가톤은 '순수함', '본질적임', '본성에 가까움'이라는 뉘앙스가 있음. 자신의 타고난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을 덕 있다(arete)고 여기던 그리스인들 특유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고려하면, 사물이 자신의 본질을 다하는 걸 '좋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그럭저럭 이해가 가는 듯함. 그리스-로마 시대 철학자들은 제각기 본질을 가진 만물이 모두 최초의 원인인 '일자'에서 파생된다고 여겼고, 플라톤이 말하는 '좋음의 이데아'도 그와 비슷한 개념인데, 사물 자체보다도 그것의 본질이 먼저 앞서 실재하며, 가장 근원적인 최초의 좋음(=본질적임)을 이 우주가 돌아가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이며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플라톤 철학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임
@이디오테스(111.118) 좋음에대한 그 부분 가만 보면 당시 헬라어의 한계가 드러나는듯 주위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을 듣고(물론 플라톤 대화편에서) 그러면 이거죠. 그러면 저거죠. 하는 것도 그런 뭉뚱그린 단어로 말하니까 그런 것도 있다고 봐요. 물론 그렇게 '말'을 끊임없이 하면서 탐구 할 수 밖에 없다는 게 소크라테스가 중요시 한 인간의 노력이아닐까도 생각됨
@이디오테스(111.118) 이러한 '좋음'에 반해 '나쁨(악)'을 행한다는 건 곧 자신의 본성=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고, 당장 악행으로 어떤 이익을 얻더라도 결국 자신이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자체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악은 무조건적으로 인간에게 해롭다. 어리석은 사람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해 악행을 저지르지만, 선과 악에 대한 앎이 있다면 자신에게 해롭기만 한 악행을 저지르는 건 불가능하다.... 등등 뭐 이런 말들.... 플라톤이 이러한 본성을 이데아론으로 묘사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추상적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한계가 명확한 이론임. 아리스토텔레스의 ousia는 '실체' 혹은 '본질'이라고 번역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용어처럼 느껴지지만 플라톤도 사실상 이데아와 거의 같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음
@이디오테스(111.118) 그렇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했던 ousia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물의 본성이 사물 바깥에 있는 이데아냐, 혹은 사물에 내재되어 있느냐- 의 차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겠는데... ousia와 실체 개념의 역사적 변천도 참 중요합니다만 어쨌든 플라톤 독회 시간이니 이 얘기는 이쯤하고, 흔히 <변론>의 명언으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부분이 꼽힘
@이디오테스(111.118) (37a)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소크라테스, 우리에게서 떠나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살 수는 없나?" 자,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을 믿게 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그런 행동은 신에 대한 불순종이고, 따라서 제가 침묵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제가 농담하는 줄 알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38a) 그리고 만약 제가 매일 덕과 제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성찰하며 이야기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선이며, 성찰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다시 한번 말한다면, 여러분은 제 말을 더욱 믿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하는 내용은 사실이지만, 여러분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제가 어떤 나쁜 일을 당할 자격이 있다고
@이디오테스(111.118) 대충 듣기 좋은 명언으로 여겨지지만 생각해보면 워딩이 꽤 강한 말임. 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면, 본인이 성찰할 줄 모른다고 꼽주던 다른 헬라스인들의 삶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마도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을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무지의 지와 같은 지혜를 갖는 것, 쯤으로 정의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임. 여러모로 플라톤다운 말이긴 하지만, 인간만의 특별하고도 필연적인 본성이라거나 조건이라거나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추세인 현대에도 여전히 플라톤의 명언이 종종 쓰인다는 게 개인적으로 특이하고 재밌게 느껴짐. 뭐 고전 경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디오테스(111.118) 오히려 인간만의 특별하고도 필연적인 본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현대에도 쓰이는 걸지도 모름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본성은 반성과 물음이기 때문에, 누군가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이다~' 이러면 그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과연 그러한지 '의문을 갖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런 '의문을 갖는 것'조차 하나의 틀이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임. 이것 자체로도 웃긴 거지. 않느냐? 라고 본인이 '의문을 갖고'서 비판하고 있으니까. 철학을 비롯해서 학문의 시작을 알1리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음
@레알이랑 언급하셨듯 국내에서 그리스 철학 연구하시는 분들이 그리스의 역사 문화 등을 모르실 리도 없고 이런 해석이 딱히 새로울 것도 없지마는, 그렇다고 강연/강의/저술 등에서 이런 요소들을 충분히 해설해주느냐, 하면 저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들한테 주어진 지면(혹은 시간)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그것도 여러 해석들 중 하나일 뿐이니 굳이 강조해야 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이유야 다양하겠습니다만.... 비슷하게 칸트와 프랑스 혁명을 연관 짓거나 헤겔과 나폴레옹을 연관 짓는 연구도 메이저하지만, 대중적인 철학서들은 잘 깊게 다루질 않죠. 이러한 점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이디오테스(111.118) 대중적인 철학서, 라고 하면 말이 좀 이상하고. 일반적인? 혹은 원서? 아무튼 그런 느낌...
@이디오테스(111.118) 플라톤과 전쟁관련한 논문은 서영식 교수님 이 좀 쓰신 게 있음. 하지만 뭐 무엇보다 국내에서 전쟁과 엮어서 해석하신 시초는 당연히 소은 박홍규쌤이라 전집에 <플라톤과 전쟁>강의가 있으니 읽어보시면 좋을듯해요 이건 나중에 독회에서 당연히 본문으로 쓰겠지만 ㅇㅇ 아 물론 세세한 역사적 사건을 꼬집어서 문헌정리를 하신 건 아니라서 아예 전쟁사 전공쪽으로 가면 여러가지 있는데 국외로 플라톤 시절부터 나토까지 당시 국외정세를 분석한 책이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재미없어서 덮은 기억이 남. 제목은 기억이 안 남
'나는 모른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신만이 안다'라는 말로 끝나는 수미상관 구조, 잦은 호메로스 인용에 언어유희까지 선보이는 점에서 굉장히 문학적이었습니다 플라톤이 시인을 비판하는 논거가 '시인은 신들린 상태로 시를 쓰고, 자기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읊는다'라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플라톤 철학에서의 이상적인 시인이란 어쩌면 플라톤 자신인지도... 첫째 연설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정치를 하면 죽게 되니 자기는 사적인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추방으로 타협 보고 다른 도시에서 신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역시 소크라테스 성격에 이런 타협은 불가능하겠군요...
시인 비판의 또 다른 논거가 바로 '신과 영웅들을 비도덕하게 그려낸다'라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진정한 영웅적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죽음에 대한 그의 논변은 굉장히 뛰어나지만, 어떤 사람도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간과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도 자기 아들에 대한 당부를 남기는 것에서 걱정을 모두 털어버리며 마지막 미련까지 없애려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만큼 자기 친구들을 신뢰한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요 또 한 가지 재밌었던 곳은,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논박술을 재판에서 사용해 멜레토스의 무지를 폭로한 부분일까나요
@무르망 사실 제가 아테네 사람이었으면 소크라테스가 굉장히 껄끄러웠을 것 같습니다 마치 갤이 분탕들 때문에 터졌는데, 걔랑 친목질 하던 고닉 하나가 사과문도 아닌 해명문이란 제목으로 자아도취에 빠진 글을 올린 꼴을 목격한 기분이려나요...
@무르망 저도 소크라테스를 평소에 몰랐으면 죽이자고 했을 것 같단말이죠. 위에 다른 분이 언급하신 것처럼 워딩이 쎈 양반이라서.
@레알이랑 자기 딴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 말 듣다보면 뭔가 알고 있는 현자 같다는 인상이 홀리듯이 느껴져요 자기 안에서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는 말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무슨 신비주의자 같기도 하고...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되지만)
지금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을 읽고 있는데, 플라톤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 짧게 적습니다. 요약하자면 플라톤의 대화는 공리를 설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결론에 이르는 방식인데, 그 방식이 타자를 배제하는 독백과 다름없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언어를 차용해서 말입니다.
솔직히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모르는척 젠체하는건 좀 아니꼽게 보일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메논의 역설같은거 보면, 사실 공리를 설정한 시점에서 결론은 이미 결정났으니 저렇게 질문만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형을 받아들이는것도 그와 관련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라타니의 그 부분은 별로 흥미롭지 않습니다. 공리를 설정하고 질문을 던져 결론에 이르는데 티자를 배제한다고 말하는데 거꾸로 뭐 어디 안 그런 철학책이 있던가요. 이건 가라타니 본인도 포섭되는 말이라 플라톤 관련해서 그 부분은 사실 하나마나한 소리입니다. 메타적으로 봐도 저술하면서 당연히 대략적인 결론을 잡고 썼기 때문에 수학 공식처럼 여겨질 수 있죠. 다시 말하지만 어디 안 그런 책이 있던가요.
@레알이랑 <철학의 기원>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는데거기서 말한 소피스트가 어째서 doxa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논편에서도 나오고 고르기아스에서도 나오지만 결론을 정해서 질문만 던지는 게 아니라 질문을 통해서 어떻게 도출되는지가 중요합니다. 보면 사실 결론은 하나에요. '무작정 그러리라고 생각지 말고 스스로 질문을 통해 탐구해들어가라' 그렇지 않은 소피스트들은 결론을 고르기아스편처럼 끌고가버려서 학문이 있을 수 없게 만들어요. 가라타니 본인도 이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레알이랑 다만 소피스트들이 상대주의 허무주의로 끌고가는 그 방법론과 플라톤이 결론을 잡고 귀결시키는 방법론에 차이가 있다는 걸 보고 소피스트의 탐구방식이 좀 더 수많은 담론을 이끌어내는데 적합하다는 것이죠. 가라타니가 변론에서도 나온 '물음을 던져 탐구하는 것이 철학인 걸' 눈가리고 아웅하고, 이데아를 넘어 대화편 전반에 수많은 중요한 물음을 남겨서 읽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수없이 던져주고었던 대화편의 철학적 가치를 하나하나 빼고 이야기하기에,플라톤 '철학'의 유의미한 비판은 아니라고 봐요. 아 물론 저는 철학의기원에서 나온 그 나름의 방식은 재밌게 봤지만요.
@레알이랑 가라타니는 유난히 플라톤 국가를 싫어해서 후기 대화편은 별로 생각 안 하지 않았나 그런 느낌이 든단 말이죠. 마치 철저한 플라톤 대화편 수정론자처럼 플라톤 a와 b로 나눠서 a의 결정적인 국가를 꼬집는 거죠. 그리고 당시 소크라테스의 본래 물음에 대한 걸 잊고 정치철학으로 이데아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틀을 만들어 가두려하지 않았냐는 건데. 법률까지 보면 말이 길어지겠지만 전 썩 재밌는 철학 관점이라는 생각이 안 드네요. 플라톤의 정치적 해석은 제 관심사가 아니라서
@레알이랑 타자와의 대화가 꼭 자기혼자 공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대화를 가장한 철학책으로 쓰여져서 그런 것도 있어요. 작중 등징하는 소크라테스 보면 진짜 때리고 싶을 정도라 ㅋㅋㅋㅋㅋㅋㅋㅋ
트라시마코스 미만 잡이긴.하지
https://m.dcinside.com/board/reading/77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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