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감상을 댓글로 자유롭게 써주세요. 저도 본문에 쓰겠습니다.@
페이지 표기는 번역본이 아카넷 하나뿐이므로 아카넷 페이지로 쓰겠다.
그리고 생각나는대로 적어서 두서없으니 양해바람.
시론의 도입부는 읽는 사람에게 명확하게 다가온다.
책의 주된 내용은 머리말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질과 양 사이의 혼동을 걷으려는 것이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것의 자료를 가지고 설명한다.
24p 역자 각주 11번을 보면 하단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장 전체의 의도는 의식의 각 상태는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이번 독회 범위에는 살짝 벗어나있지만 51p 각주 60번을 보자.
<베르크손에게 감각은 반드시 비연장적이 아니다. MM(물질과 기억)에서 그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MM이전이며 양과 질, 연장적인 것과 비연장적인 것을 완전히 가르려고 애쓰는 부분이므로 이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직접 접하고 있는 모든 것은 양과 질, 연장적인 것과 비연장적인 것이 섞여 있다. 여기서는 다만 그렇게 섞인 것을 분석해 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 양자를 완전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시론에서 극단적일 정도로 양과 질을 대칭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나중에 어라? 말이 다르지 않나?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역자가 친절하게 이 부분을 잘 캐치해서 각주로 안내를 해주고 있으니 읽으면서 반드시 챙겨가자.
그리고 이런 '설명'을 위한 단어의 선택은 나중에도 할 말이 많은 부분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책은 <시론>-<물질과 기억>-<창조적 진화>-<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까지 일관된 빌드업으로 본인의 철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총 4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두꺼운 책을 읽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그송 탄생 100주년으로 나온
1600p 단권 전집이 있는데 진짜 탐난다.
이런 독특한 관계를 카미유 리키에는 <베르그손 고고학>에서 아래의 도식으로 설명한다.
이런 구도를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 싶어하지 않았는지.
러셀은 (나중에 자세히 적을 날이 오겠지만) 시론을 안 읽고 창조적 진화를 깐 티가 나고, 창조적 진화를 안 읽고 그 전제가 되는 시론을 까는 티가 나는 등 칸트를 예로 들면 마치 순수이성비판을 안 읽고 판단력 비판을 까고 판단력 비판을 배제하고 순수이성비판을 까는 것처럼 느껴진다.
러셀이 영국 아리스토텔레스 학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보편자 강연을 하던 자리에서 잘못된 점을 베르그송이 지적하자 얼굴이 붉어졌다는 일화를 보면, 자신에게 모욕감을 줬다고 베르그송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
(러셀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서양 철학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베르그송 본인도 이를 알고 있어서 '러셀은 플라톤의 형상에 대한 그의 완전히 유물론적 발표에 대해 구두로 논박한 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는데,
뭐 그런 걸 떠나 엘리트 영국인으로서 프랑스를 혐오하는 정치적 이유 + 논리실증주의자로서 형이상학을 배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베르그송에 대한 건 단순 적개심을 넘어 열등감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러셀은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이 노벨 문학상을 받자 열등감은 더 폭발해버린거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강연을 하고 훗날 돈을 많이 벌게 해준 초초베스트셀러 <서양철학사>를 작업하고
베르그송 철학이 비시정부와 쉽게 조화된다는 말을 하며 비방하고 다니기까지. 정작 베르그송은 비시 정부의 비호를 거절해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오죽했으면 러셀 본인이 몸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의 전임 회장이 러셀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했을까
러셀은 자신의 스승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을 물고 빠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여겼는지 말년에 포퍼한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 연구를 전혀 철저히 연구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네. 그의 철학 연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날 불쾌하게 만들었는데, 일부는 불필요한 모호함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베르그송의 흔적 때문이었네'
지금까지 많이 알려진 베르그송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러셀의 공이다.
아직도 '베르그송 그거 물 500ml로 라면 끓이라는데 그렇게 수치로 딱 맞춰서 끊이는 건 안 된다고 태클거는 반지성주의자 새끼아냐'라고 하는 대학원생이 있을 정도다.
러셀 <서양철학사>로 시작한 사람들은 대부분 베르그송을 그렇게 생각하고 넘길 것이다.
베르그송을 깎아내리는 광범위한 오해 프레임을 씌운 건 러셀의 일관된 학문적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웃기게도 러셀이 그렇게 열심히 조작한 부분은 아무나 책만 읽어봐도 틀린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론할 가치가 없어서 독회 1주 차인 여기다가 굳이 길게 쓸 필요가 없다.
서양철학사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서 보다 못해 아주 옛날 윤명로 선생님이 렘프레히트 <서양 철학사>를 들고 오신 적이 있다.
동서문화사에서 더 읽기 좋은 폰트로 출간시켜도 인기는 아직도 러셀이 압도적이다. 여전히 아직도 끈질기게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러셀이 <서양철학사>서문에서 혼자서는 이 많은 학자를 공부하는 건 무리니까 너무 뭐라 하지마셈이라고 자가쉴드친대로 철학사 책은 뭘 봐도 한계가 있는 게 맞긴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는 목적(개론)에 가장 부합하는 건 스탠포드 철학 사전이라고 생각한다.
베르그송 항목을 예로들면 작성자가 데리다, 들뢰즈 전공이다. 그래서 자꾸만 들뢰즈를 언급하지만, 그렇다 하더라고 최대한 베르그송만으로 쓰려고 노력한 티가 난다. 그만큼 신뢰가 있으니 그냥 철학자 태어난 순서대로 구글링해서 목록만 정리한 다음에 스탠포드 철학사전 들어가서 항목별로 하나씩 읽는 게 적합한 방법 아닐까.
하지만 적합한 방법이라고 곧 효율적인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이라 목적을 이루는 데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도 있다. 결국 단권 철학사를 보더라도 훑어보는데 의의가 있음을 스스로 명심하고, 이것만으로 전부라고 생각하게끔 유혹하는 안일함에 저항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걸 누가 모르겠냐고요. 반문해도 철학사 한 번 읽고(보통 하나 다 읽으면 다른 철학사는 거의 안 봄) 그걸 바탕으로 나중에 관심있었던 분야만 파고들기에 나도 모르게 첫 철학사가 상식으로 둔갑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공부하던 사람끼리 이런 거 저런 거 이야기하다가 어? 내가 알던 흄은 언제 어디서 읽었던 흄이었던 거지? 이런 생각들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한 10년 전 어디선가 읽었는데 그게 어떤 책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나. 근데 알고보니 잘못된 건데 그냥 그때 읽었던 대로 '알고' 지냈다면?
아 뭐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
어쨌든 시론은 베르그송 철학의 토대이고 여기서 베르그송이 말하는 건 양이 없다는 게 아니라(매우 중요) 그저 양과 질은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독회하다가 중간중간 다른 학자나 베르그송 일화를 적어보겠음. 예컨대 CIC(유네스코 전신)의 초대 의장으로 뽑혀서 토마스 만, 폴 발레리, 마리 퀴리 등과 일했을 때, 아인슈타인(많이들 궁금해하실 그 유명한 논쟁 포함. 이건 <사유와 운동>독회에서 이야기할 것.), 윌리엄 제임스, 러셀, 바슐라르, 드 브로이, 화이트헤드, 듀이, 프루스트, 메를로퐁티 등을 언급할 텐데 독회 분량에 연관이 있을 때마다 써보겠음.@
다음
25p 중간을 보면
-그러나 '영혼'의 어떤 상태들은 옳든 그르든 자기 충족적으로 보인다.
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베르그송이 글을 쓰는데 왜 굳이 무슨 이유로 '영혼'(âme)이라는 단어를 쓴 걸까.
이 문구를 시작으로 앞으로 베르그송은 '영혼'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이란 이녀석이 아니다.
이건 굉장히 긴 논의가 필요하고, 아직 여기서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다.
베르그송의 영혼에 대한 걸 자세히 알고싶다면 1889년 <시론>을 끝내고 1894년에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강의한 [영혼론들에 관한 과목]과 1912년에 발표하려고 썼던 [영혼과 신체]를 보면 된다.
[영혼과 신체]는 <정신적 에너지>에 수록되어 있으니까 혹시 가지고 있다면 미리 봐도 좋고, 나중에 독회 때 볼 거니까 그때 봐도 좋으니 우선은 영혼이란 부분이 <시론>에서도 쓰였던 단어구나~ 정도만 알고 넘어가자.
@베르그송 강의록에 대해서 잠깐 정리하면 순서대로
1886-1887년 <시론>을 완성하기 전 심리학 강의
1892-1893년 도덕, 형이상학, 역사 강의
1894년 1강-심리학과 형이상학~ 2강-도덕~ 3강-라이프니츠 칸트 기타~영혼론 강의
1898-1899년 4강-그리스철학~플로티노스에 관한 강의
고등학교 강의록이 이렇게 6권 나오고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 4권
1900-1901년 원인 관념 강의 (시간관념 강의 안에 부록으로 포함)
1901-1902년 시간관념 강의
1902-1903년 시간관념의 역사 강의(국내 정발로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
1903-1904년 기억이론의 역사 강의
1904-1905년 자유문제의 진화 강의
이렇게 총 10권의 강의록이 있다.
이거 말고도 더 있다는데 출판된 건 저게 끝이다.
현재 국내 번역 출판된 건 시간관념의 역사 하나뿐이다.
그 활발한 미국도 아직 자유문제 강의랑 플로티노스 강의록만 따로 뽑아서 번역되었다.
베르그송이 죽기 전에 자기 출판물을 관리 감독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지속과 동시성>은 빼버리고(베르그송은 당대 나왔던 과학을 정신이 쇠약해질 정도로 찾아서 공부한다음 저술 한다. 개정판을 내려면 또 다시 공부를 해야되는데 말년에 류머티즘으로 공부가 버거웠던지 그만 두었다.) 강의록과 편지글, 그리고 끄적였던 노트까지. 전부 불태우거나 관리해달라고 했다.
실제로 많은 게 소실되었고, 기록의 분량이 다른 철학자들에 비하면 굉장히 적다. 하지만 지인들의 소장품까지는 건드릴 수 없었는지 열렬한 애청자였던 샤를 페기가 속기사 불러서 기록을 남긴 1901년 이후 강의가 지금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느지막하게 1990년~2019년까지 뜬금없이 툭툭 출판된 강의록들은 당연히 소은 박홍규 쌤도 읽어보시지 못한 귀한 자료다. 그런데 소은쌤은 굳이 필요 없으시지 않았을까. 베르그송 강의록에 무슨 말이 들어있을지 이미 아셨던 것처럼 80년대에 강의해버리셨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를 보고 소은 박홍규 전집을 보면 박홍규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실려 있는 부분도 있어서 진짜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이 비슷한 결로 흘렀으니 감동이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출판물을 관리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왔으면 본인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버리고 태우라고 지시했다. 이건 <시론>-<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 <두 원천>으로 이어지고 확장된 사유만으로 충분하고 <사유와 운동>, <정신적 에너지>에 실린 논문으로 보충설명을 끝냈으니, 나머지는 중언부언이라고 생각해서 베르그송 본인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했다고 여긴 게 아닐까. 아님 말고.
이제 다시 <시론>으로 돌아와서
27p 하단~ 29p
희망-기쁨 / 절망-슬픔을 설명하고 있다.
28p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부분.
베르그송 철학은 비결정론이기 때문에 뭐든지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 내일 지구는 여전히 있다. 뭐 물리학이나 뭐로 보건대 한순간에 빵하고 터질 일은 없다~. 하지만 가봐야 알 수 있다. 확률이 소수점까지 낮거나, 수치로 몇이라든가 이런 건 예견이다. 우리 인간은 얼마든지 예견을 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예견이 곧 실재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일 지구가 터지지 않을 거라는 걸 난 '안다.' 내일이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나. 아는 게 아니라 '예견'하는 것이지. 지구가 터지고 말거야 같은 생각은 내일이 오면 한 곳으로 좁혀져 실재(아무 일도 없는 날)를 겪는다.
즉 미래에 대한 생각은 (주어질) 미래 자체보다 풍부하다. 잠깐 예견에 대한 말이 나왔는데 그렇다고 베르그송이 인간의 예견은 아무 '쓸모 없다'고 한 적이 절대 절대 결코 없다.
예견과 실재는 다르다는 것일 뿐 나중에 보겠지만 오히려 이런 예견이 있어야 살 수 있고, 주어져 있고 주어질 실재에도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시론>에서 쓰인 절망과 슬픔은 앞서 말한 대로 양과 질이 다름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니까 여기선 그런 용도로만 쓰였다고 축소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0p ~38p 상단
미적 감정에서 양과 질을 설명하고 있지만, 베르그송의 예술론이 담겨있는 글이다.
이 짧은 페이지를 길게 늘려 쓴 책이 있는데 바로 1934년에 쓰인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 예술>이다.
베르그송 책을 다 읽고 이 책을 읽으면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 책이 미국에서 워낙 인기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떠나서 베르그송과 윌리엄 제임스 그리고 동갑내기이자 생일도 이틀밖에 차이 안 나는 존 듀이와의 연관성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짙다.
비록 듀이 본인이 1925년 <경험과 자연>에서 베르그송을 헤라클레이토스에 빗대는 그 흔한 오해를 했음에도, 정작 훗날 다른 저서에서 베르그송을 벗어날 수 없었던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추가로 <경험으로서 예술> 몇 가지 문구를 소개하면
<경험으로서 예술> 1권 27p
"모방 이론은 사물이나 사건을 문자 그대로 복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주요 제도들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으로서 예술> 2권 22p
"사람들은 물질적 대상들은 일정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테두리 내에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그 결과 사람들은 경험은 경험의 대상이 고립되고 일정한 범위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확하고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적 경험은 모두 무한한 전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경험하는 사태나 대상은 무한히 뻗어 나가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초점이 되는 부분일 뿐이다."
이건 뭐 그냥 <물질과 기억>이고
<경험으로서 예술> 2권 67p
"우리가 조각이나 건축을 볼 때 눈이 보는 것은 순간적으로 단 하나의 지각이 일어날 때 공간에 있는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은 베르그송의 <지속과 동시성>에서 아예 가져온 것 같다.
아무튼 <경험으로서 예술>은 전혀 어렵지 않고 박철홍 선생님이 기가 막히게 번역해 주셨으니 추천한다.
다음
38p~40p 상단의 도덕감에 대한 설명은 카미유 리키에가 풀어 쓴 해설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우니 적어놓겠다.
<연민은 '먼저' 타자의 고통을 피하게 만드는 공포와 반감 속에서 발견되어, 그것들이 우리의 고통을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통해 계속되고, '다음으로는' 마치 자연이 커다란 부정의를 범했기에, 그래서 자연과의 공범 혐의를 모두 벗어야 할 것만 같은 욕망과 공감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감정이 시간을 들여 피어날 수 있도록 그 자유로운 흐름에 내맡겨 두기만 하면, 연민은 감각적 재화들로부터 초연하여 낮아지려는 열망을 갖도록 하는 겸허함으로 완성된다.>
이런 질적인 진전을 거쳐서 즉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의 이행에서 성립한다는 것.
각주 38번에 써놓은 로쉬푸꼬처럼 약삭빠른 예견으로 감정의 질적 진전을 무시하고 그 정지점들 가운데 하나를 특권화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
자세한 도덕에 대한 논의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 나온다.
<시론>에서 말하는 도덕감은 설명을 위한 예시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다만 저급한 형태의 연민과 다른 무언가 질적으로 다른 영웅적인 연민이 있는 것 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도 이어지는 논의다.
43p에 윌리엄 제임스를 언급하며 원심적 / 구심적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원심은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것을 말하고, 구심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아주 쉽고 간략하게 설명하면
원심적인 건 안에서 바깥으로 즉, 내 몸 안의 세세한 신경들을 내가 직접 느끼고 조절해서 바깥으로 표출. 움직이는 것이다. 힘을 쓰고 노력하는 중심은 나(안)에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너 따위 상대로는 내 10퍼센트 힘만으로 충분하다'라는 만화 캐릭터가 있다고 하자. 이때 자신의 근육과 힘의 정량을 정확하게 수치화해 10퍼센트 만큼 본인이 '통제'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원심적인 것의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구심적인 건 바깥에서 안으로 즉, 바깥의 무언가의 영향, 사물의 움직임으로 '나도 모르게' 내 신체가 움직인 것이다. 여기서는 가려져있던 반대편 눈동자가 사물의 위치를 따라 함께 움직인 것.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대로 우리는 우리가 몸속에서 내보내는 힘을 정확하게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수치화하고 양적인 계산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천천히 쥐면 쥘수록 신체에 영향을 주는 면적이 넓어지는 걸로 느낄 뿐이라는 말.
구심과 원심 관해서 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베르그송이 다음 작품까지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여기서도 잠깐 알 수 있다. <시론> 44p 상단을 보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사실 노력의 느낌이 중앙으로부터 오는지 주변으로부터 오는지 하는 것이 아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쓴 이유는 베르그송 본인의 철학에서 사실 구심이나 원심으로 나누는 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나중에 <물질과 기억> 초반부터 튀어나온다.
그러니 여기 <시론>에서 구심과 원심을 들먹인 건 결국 또 또 앞서 말한 대로 그저 양과 질이 다르다는 걸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두자.
다음 주는 1장 끝(95p)까지 읽어오시면 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미지(적인 사유) 잘봤습니다. 글의 양이 중요한게 아니군요.
독회 안하는데 왤케 유용함... 개추를 참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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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베르그손=꿀벌 드립은 참 이래저래 악감정이 실려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올만에 베르그손 책 꺼내서 51p까지 읽었네.. 이미지(아무튼 심상이란 뜻임)를 차주에도 잘 올려줬음 함.
퍄 해주는 사람이 있구나아아ㅠㅠㅠㅠ 아무도 안 해서 다음주 해야되나 싶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