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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에 국문학에 관심이 가서 박태원, 이태준같은 묵은지 작가부터, 임철우, 최인훈같은 현대 작가, 황정은, 정영문같은 겉절이 작가들까지 한번씩 읽었다. 외국의 고전들도 좋지만 국문학의 그 자연스러움이 끌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인성 작가의 낮선 시간 속으로는 국문학의 자연스러움과 모더니즘의 실험성, 깊은 주제의식까지 들어있는 상당한 걸작이 아닐까 싶다.


그때, 그가 돌아오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여전히 돌아가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절실함,

-9p, <길, 한 이십년> 


이 작품은 4개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서대로 

<길, 한 이십 년> (1973년 겨울, 1974년 봄) - <그 세월의 무덤>

(1974년 여름) - <지금 그가 내 앞에서> (1974년 가을)

<낮선 시간 속으로> (1974년 겨울) 순이다.

각 작품들을 읽을 때, 작품 사이의 연결성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아마도 중요한 상징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거나 꿈과 현실, 주인공의 생각을 넘나드는 서술적 특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징과 행동, 각종 묘사들은 4번째 작품인 <낮선 시간 속으로> 에 와서 완벽히 표현된다. 표제작을 읽다 보면, 각 작품들의 연결성이 딱 맞아떨어지고 치밀하게 설계되어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상당히 복잡해보이는데, 의외로 이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남자는 극단의 배우로 활동했고, 그 활동 중 알게 된 여자와 연애를 이어가다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 (NTR) 그는 군대에서 의가사 전역을 했고, 그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상실을 겪는다.

그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고, 1974년 겨울 해안도시인 미구시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서사는 아니다. 이 소설에는 너, 남자, 그 같은 대명사가 많이 나오는데, 추측해보건대 이러한 대명사들은 분열되는 주인공의 여려가지 자아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각 대명사들은 작품 속 여러명의 주인공처럼 작용한다. 서서히 자아가 분열되어가는 주인공은, 실연과 가족의 상실을 겪은 불완전한 젊은 청년이다. 


소설 속에서 그가 살아왔던 삶의 행적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되짚고,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단서? 들을 찾아간다. 과거의 대화, 현재의 행동, 꿈 속의 상징이 한 데 모여 뒤섞인다. 그것들에게는 명확한 경계란 없다. 시간과 공간을 수차례 넘나드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채워간다.


주인공은 자신을 감각한다. 과거에 있었던 과오, 삶을 겪는다. 이를 통해 공상은 한층 더 넓어지고, 주인공과 독자는 심한 혼란을 느낀다. 이 작품은 친절하지 않다. 여러 자아의 삶들은 그저 그대로 과거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고, 주인공과 독자는 자연스레 그것을 따라 갈 뿐이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작가의 안내도 없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불친절하게 작품을 설계함으로서 독자와 주인공을 동일시하게끔 해서 몰입도도 높이고, 내면의 탐구와 성찰, 방황이라는 키워드를 더 마음에 와닿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모더니즘 소설이고, 읽기에 굉장히 어렵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연극을 관객이 되어 바라보는 부분에서는 진한 베케트의 향이 풍겼다. 힘들었다. 

문단을 나누지 않거나 기호들로 문장이 범벅이 되어있거나 온점이 없거나 하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참신하면서도 최인훈의 광장에서 느낄 수 있는 리듬감이 약간씩 보이기도 했다.


다시 내용으로 돌아와서, <낮선 시간 속으로> 에서는 그동안 보였던 것들이 한 데 모여 주인공의 내면 더 깊은 공상과 환상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상술한 불친절한 작품 설계를 통해, 독자는 주인공의 진정한 내면적 현실을 본다. 그와 동시에, 현재의 주인공이 과거의 일들에 개입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간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볼 때, 낮선 시간 속으로는 천천히 진행되는 한 편의 성장소설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독자는 청년의 고통이 서서히 치유되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느낀다.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던 어느 순간? 이제, 그것은 지나간 매순간이었으며 다가올 매순간이다. 이제,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일을 받아내겠다.
-313p



이렇게 긴 감상문은 처음인데, 하필 모더니즘이라 내용이 산으로 간 건 아닐까 걱정이 되네요.

작품을 읽으면서 정말 제 취향이라 재미는 있었는데, 진짜 어려운 부분들이 중간중간 있었어서 좀 힘들었네요… 저번에 읽은 구운몽보다는 이게 훨씬 더 재밌었어요.

진짜 문장도 섬세하고 너무 좋은 작품이니까 읽어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