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나의 블루스를 훔쳐 달아났지 


내 몸에 누군가, 아니 그들이 빨대를 꽂고 있다 

그 빨대를 통해 나를 빨아마신다 

내 몸의 지도가 우그러진다 

나무들이 쓰러지고 대지의 주름은 부서져 

모래 언덕이 치솟는다 


이미지 도둑들 

내 몸에서 엑스레이 사진 찍듯 뼈를 발라가는 것들 

기회만 있으면 말의 벽돌을 뜯어가는 것들 

화등잔같이 눈을 켜고 

주둥이가 빨대처럼 길어진 것들 


사막이란 무엇인가 

이제 텅 빈 시인의 몸이 

전대륙에 걸쳐 죽음을 공급하는 곳 

거기 한 채의 누더기 집이 있고 

걸레 커튼이 휘날리고 

죽음의 모래들이 부서져 날리는 곳 

부디, 이 모래들마저 들이마셔주시길



지평선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붉은 가위 여자


저만치 산부인과에서 걸어나오는 저 여자

옆에는 늙은 여자가 새 아기를 안고 있네


저 여자 두 다리는 마치 가위 같아

눈길을 쓱 쓱 자르며 잘도 걸어가네


그러나 뚱뚱한 먹구름처럼 물컹거리는 가윗날

어젯밤 저 여자 두 가윗날을 쳐들고

소리치며 무엇을 오렸을까

비린내 나는 노을이 쏟아져 내리는 두 다리 사이에서


눈 폭풍 다녀간 아침 자꾸만 찢어지는 하늘

뒤뚱뒤뚱 걸어가는 저 여자를 따라가는

눈이 시리도록 밝은 섬광

눈부신 천국의 뚜껑이 열렸다 닫히네


하나님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나님이 키운 그 나무 그 열매 다 따 먹은

저 여자가 두 다리 사이에서

붉은 몸뚱이 하나씩

잘라내게 되었을 때


아침마다 벌어지는 저 하늘 저 상처

저 구름의 뚱뚱한 붉은 두 다리 사이에서

빨간 머리 하나가 오려지고 있을 때


(저 피가 내 안에 사는지)

(내가 저 피 속에 사는지)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저 여자

뜨거운 몸으로 서늘한 그림자 찢으며

걸어가는 저 여자


저 여자의 몸속 눈창고처럼 하얀 거울 속에는

끈적끈적하고 느리게 찰싹거리는 붉은 피의 파도


물고기를 가득 담은 아침바다처럼

새 아가들 가득 헤엄치네



첫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 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속으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 속으로 기러기 떼 지나갈 때 같은 간지러움. 지금 당신이 나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고 있으므로, 당신의 첫은 살며시 웃고 있을까? 사진 속에서 더 열심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엄마 뱃속에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가던 당신의 무서운 첫 고독이여. 그 고독을 나누어 먹던 첫사랑이여. 세상 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 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 첫. 첫. 첫. 첫. 자판의 레일 위를 몸도 없이 혼자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 개, 당신의 첫과 당신. 뿌연 달밤에 모가지가 두 개인 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며 찾고 있는 것. 잊어 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죽었다. 당신의 첫은 죽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오늘 밤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 다가가서
나는 첫을 잃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럼 손 잡고 뽀뽀라도?
그렇게 말할까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첫은 끝, 꽃, 꺼억.
죽었다. 주 긋 다. 주깄다.
그렇게 말해줄까요?


쌍비읍 징그러워

쌍비읍 징그러워 못 살아. 아빠오빠 징그러워 못살아. 꾹 짜서 꿀 받아먹어라,
아빠가 보내주신 선물, 벌집 뚜껑을 여니 육각형 들어찬 벌의 유충들 굼실굼실,
아아아아 쌍비읍 구멍마다 들어찬 아빠오빠 유충들 보이는 것 같아.
갓 결혼한 제자 둘이 남편들을 데리고 나타나서는 한 사람은 제 남편을 오빠라 하고,
한 사람은 제 남편을 아빠라 부르니, 나는 그만 징그러워. 얘들아 촌수 시끄러워 나 먼저 간다,
할수밖에 없었어. 나는 쌍비읍 무서워서 기뻐 예뻐도 말하기 싫어.
그저 기분이 좋아요! 좋아요! 손뼉은 치지 않지만 허공은 깨물어.
나는 아마 날마다 웃음을 매달고 살아야 왕국이 평안한 실없는 공준가 봐.
나는 쌍비읍 싫어서 빨래도 싫어. 세탁기는 윙윙 돌아가고,방망이는 옷 위로 철퍼덕철퍼덕 떨어지고,
엄마의 비명이 세탁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엄마가 세탁기 속에서 이쁜 아가들을 끄집어내어 바닥에 팽개치는 꿈.
그 꿈꿀 때마다 나는 그만 젖은 빨래 같은 아기를 배고 있는 기분이야. 한참 있다가
이쁜 오빠랑 이혼한 제자가 찾아와서는 선생님 이혼하고 정신병원 갔다 왔어요.
오빠가 자꾸 때려서 이혼했는데,이혼하고 나니까 분열증 생겨서
이번엔 幻視의 오빠한테 맞느라 하루 24시간 비명을 질렀어요,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맞기만 했어요.
나 쌍비읍 너무 싫어. 아빠오빠 부를 때마다 마치 벽이 다 부서져
바닥에 가득 쌓인 앙코르 와트 폐허 앞에 서있는 것처럼 숨이 가빠.
화상 입은 상처에 검은 깨뿌린 것보다 더 징그러운 쌍비읍. 내 두 눈동자를 넣고 다물어버린 입속처럼 깜깜한 쌍비읍.
아빠나빠오빠가빠, 뽀뽀보다 더 숨 막히는 쌍비읍

내 창문 앞에는 환하게 불 켠 아파트 나무 한 그루
밤이면 아파트 계단으로 세탁기 속 빨래처럼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아파트나무에는 수천 개의 입술이 달렸네
그 입술마다 냄새나는 이빨이 몇십 개씩 숨어 있네
아파트나무 사시나무처럼 떨며 노래하네
아파트나무에는 수천 개의 귓바퀴가 달렸네
귓바퀴 속에는 냄새나는 모음으로 만든 비명들 가득 곪아 있네
저 아파트나무의 마개를 빼지 마세요
마개를 빼면 불 켠 방마다 눈물에 젖어 돌아가던 빨래들 사시나무 낙엽처럼
쏟아져 내리면 어떡해요


당신의 눈물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세상의 모든 이야기 

그 집에서 이름을 부르는 건 금기! 이름 대신 아빠엄마오빠동생 이렇게 불러야 했죠. 네 엄마 이름이 뭐니? 하고 물으면 모두들 화들짝 놀랐죠. 그 집에선 제일 먼저 할머니가 사라졌죠. 안 그래도 정신이 자주 집을 나가더니, 몸마저 영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담엔 여동생이 사라졌죠. 이불을 동그랗게 말아놓고 온데간데없었어요. 아빠엄마삼촌이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천장에도 송전탑 위에도 여동생은 없었어요. 꿈속에서 만나려나 지붕 높이 안테나를 세웠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어요. 그 오랜 잠적에 아빠엄마삼촌은 입술이 탔어요. 그담엔 삼촌이 물속으로 사라졌죠. 유서를 남겼지만 너무 추상적이라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담엔 아빠. 여동생이 사라지자 술만 마시더니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어요. 소리 질러도 소용없고,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죠. 엄마는 울지도 않았죠. 사람들은 흉가라고 손가락질했죠. 그담엔 누구 차례일까요? 남동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졌어요. 이 집에서 사라짐을 살 아 지 게 해주세요. 엄마는 자기를 풀어, 목도리를 짜고 또 짰지만 자신마저 목도리 속으로 사라져버렸죠. 아빠엄마삼촌동생은 아마도 사라질 사람들에 붙이는 멋진 별명인가 봐요. 어쨌든 그 집에선 그렇게 다 사라져갔지만 아빠엄마삼촌동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아이는 고모가 되고, 처녀는 새색시가 되고, 독자는 작가가 되었으니까요. 새아빠새엄마새삼촌새여동생이 새 목도리를 두르고 태어났으니까요. 그 집에선 대대로 이름을 부르는 건 금기! 숲 속에서 아빠엄마삼촌동생의 관을 짤 나무가 씩씩하게 자라고, 제재소는 씩씩 씩씩 그 나무를 다듬었죠. 그리고 옛날에 옛날에 오빠와 예쁜 여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소설가들은 책상에 엎드려 똑같은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써내려갔죠.


핏덩어리 시계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에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한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걸까

태양 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닷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네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오후 세시의
뚝딱거리는 말,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 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계 바늘을 멈추어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네 가슴속에 귀를 대보면 
핏덩어리 시계 저 혼자 쿵쿵 뛰어가는 소리
시간 맞춰 잘도 울린다


비에 갇힌 불쌍한 사랑 기계들 

화가가 세필을 흔들어 
자꾸만 가는 선을 내리긋듯이 
그어서 뭉그러지려는 몸을 
자꾸만 일으켜세우듯이 
뭉개진 몸은 지워졌다가 
또다시 뭉개지네 

카페 펄프의 의자는 욕조처럼 좁고 
저 사람은 마치 물고기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입술 밖으로 퐁1퐁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네 
저 사람은 마치 
비 맞은 개처럼 욕조마다 붙은 
전화기를 붙잡고 혼자 짖고 있네 
전화기는 붉은 낙태아처럼 말이 없고 
나 전화기를 치마 속에 감추고 싶네 

나는 내 앞에 있으면 좋을 
사람에게 말을 거네 
—한번만 다시 생각해봐요 
더러운 걸레 같은 내 혀로

있으면 좋을 그 사람의 
젖은 머리를 닦네

탐조등은 한번씩 우리 머리를 쓰다듬고
나는 이제 몽유병자처럼
두 손을 쳐들고
물로 만든 철조망을 향해
걸어나가네
쇠줄에 묶인 개처럼
저 불쌍한 사랑 기계들
아직도 짖고 있네

날개

아아 너는 너무 가벼워 껴안을 수가 없어 
육십억 인구를 담은 무거운 지구가 
저 암흑 천지 속 
스쳐가는 행성을 향하여 가볍게 손짓하듯 
이별의 가장 무거운 슬픔 속에서 끄집어올린 가장 가벼운 손짓 
내장을 가득 담은 내 무거운 슬픔이 
널 만나 눈빛만은 그래도 가볍게 흔들어주듯 
파르르 떠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깃털 한 닢 
못 떠나 못 떠나 바람 공중에 떠오르다 
다시 내려앉고 다시 떠오르는 
한없는 숨막힘의 머리카락 
억울하게 뿌리쳐져 가장 땅 깊은 곳 
그곳, 암장의 지옥에 묻힌 내 혼령이 
서늘하게 피워올린 헐떡이는 목울대 
숨막힌 내 가슴 밖에서 저 혼자 휘날리는 옷고름 
팽팽한 밧줄에 묶인 검푸른 죽지 
아아, 너는 너무 가벼워 껴안을 수가 없어


엄마란 무엇인가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나를 낳아서
두번째는 세상에 나를 두고 가버려서

엄마가 죽기 전 나는 이미
배신자의 배신자가 되어 있었다

배신자의 기저귀를 갈아드린다
두 팔에 안고 진정제처럼 안아드린다

팬티를 치켜올린다
엄마! 왜 이래? 이건 아니야! 소리친다

눈물을 닦아드린다
떼쓰지 마! 꾸짖어드린다

이제 무게밖에 남지 않은 배신자에게
쓰라린 내 가슴을 한 술 두 술 먹여드린다

이제 이 배신자를 키워서 시집도 보내야지 마음먹는다
아빠에게는 두 번 다시 안 보내 단호하게 생각한다

마주 앉아 서로에게 뿌리를 내린 채
나뭇가지를 얽었으니 한정 없이 매년 이파리를 쏟았으니

(새는 알을 낳을 때 통증을 느낄까?)
(새는 날개를 펄럭일 때 통증을 느낄까?)

배신자의 배신자가 되어 엄마엄마 불러보니
엄마라는 단어에는 돌고 돈다는 뜻이 있다

(시계 안에서 째깍째깍 엄마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엄마는 축지법을 쓴다 엄마가 초침처럼 나를 찌른다

그렇게 엄마는 내 앞에 괘종시계처럼 늘 있었다
시간은 나를 늘 엿봤다

나를 낳지 말란 말이야
내가 시간의 손깍지를 푼다

노을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내가 내 따귀를 갈긴다

결국 엄마는 나를 두 번 배신했다
첫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낳아서
두번째는 세상에 죽음을 두고 가버려서

(왜 신생아는 태어나서 새끼를 빼앗기고 만 어미 새처럼 울까?)

이윽고 나도 엄마를 두 번 배신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엄마 조심히 가 하고 죽은 엄마를 낳아서
두번째는 나만 남아서


피어라 돼지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져겨 알록달록 싸
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
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
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려치는 손바닥
을 깨무는 듯
내 입 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분홍 코끼리 소녀

우리 엄마가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을 때
나는 방학하면 시골에 내려가서
아이들의 받아쓰기 나머지 공부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아이는 오직 내가 무엇을 부르든 간에 코끼리
라고만 썼다

어머니 하고 불러도 코끼리
아버지 하고 불러도 코끼리
선생님 하고 불러도 코끼리

소녀의 꽉 움켜쥔 연필 아래 손목에는 코끼리의 
영혼처럼 붉은 반점 붙어 있고
책상 아래 양말은 코끼리의 코처럼 늘어져 있었
는데
내가 머리를 한번 빗겨준 다음엔 나를 보면 빗을
내밀었다

공중화장실에서 소녀가 제 몸에서 분홍 코
끼리를 꺼내고 있다
제 몸보다 더 큰 코끼리
소녀의 몸통에 긴 코를 붙이고 숨 쉬던 아
기 코끼리
코끼리의 숨통을 이빨로 끊고 있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렸을 뿐인데
코끼리가 들러붙다니
얼굴 정중앙에 시체가 매달린 듯
죽음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으니

나는 지금도 내 영혼을 둘로 나누어 가지겠다는
코끼리가 내 몸에 척 달라붙던 그 순간으로 발을 헛
디딜 때가 있는데
울지도 않으면서 내 몸에서 종유석을 떼어내려 할
때가 있는데

내가 한 소녀가 혼자 공중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
다는 신문기사를 읽다 말고 늙으신 엄마에게 그 코
끼리 아이의 안부를 물었더니
그 아이 엄마는 죽고 그 아이 아빠는 탄광에 다녔어
하나도 잊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날개 환상통이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슬픔치약 거울크림 그리고 다른 시집들은 아직 안 읽음
<당신의 첫>이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가 타율이 제일 높았음
혜순쌤 시는 이해 못하겠던 시도 강렬해서 좋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