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에 감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저도 본문에 남기겠습니다



저번 독회 시간에 깜빡하고 짚고 넘어가지 않은 게 있어서


50p를 먼저 살펴보고 이번 독회 분량으로 넘어가자


50p에 대뜸 허버트 스펜서라는 이름이 나온다. 내가 알기로 국내 번역된 철학사에 램프레히트랑 틸리 코플스턴 철학사 말고는 설명된 책이 없는 걸로 아는데 (다른 곳에도 있었으면 알려주셈.)

이 양반은 베르그송이 공부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다.

베르그송도 시론을 작업하려고 마음먹었던 초기에는 스펜서 철학의 기계론에 심취해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한계를 느끼고, 이게 맞나? 의구심이 계속 들어서 시론을 작업하면 작업할수록 스펜서 철학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배경이 있다.


여기에 스펜서 철학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베르그송 본인 저서에서 말하는 스펜서 철학의 대부분은 기계적 진화론이란 단어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계적 진화론이란 무엇이냐. 이것도 창조적 진화 독회 때 어차피 알아서 책에서 튀어나오니 지금 설명할 필요 없다. 다만 여기 50p에서 스펜서가 말하는 공포에 대한 걸 왜 까고 있는지는 짚고 넘어가자.

스펜서는 다양한 학문 그중에서 심리학을 생물학의 하위 분과로 보았다. 이것만 봐도 느낌이 올 것이다. 인간 의식은 생물 현상의 요인에 따라 변하는 흡사 기계에서 나사 하나 빠지면 덜컥거리면서 고장 나는 것처럼 변화의 양상에 명확한 요인이 있다고 본다.

강한 공포. 공포의 요인을 또박또박 정의 내린다.  비명, 숨거나 도망가려는 노력, 두근거림 그리고 전율로 표현.

이러한 요인에는 세기가 존재하며, 약한 공포, 강한 공포처럼 구별할 수 있다. 마치 전기를 얼마나 주냐에 따라 기계 돌아가는 게 달라지는 것처럼. 당연히 외부 자극은 신경적 운동을 거쳐서 의식의 반응으로 나아가는 기계적 순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베르그송이 까는 것



이제

51p

하단 각주 60번은 저번 독회에서도 말했지만 정말 중요한 역주니 챙겨가자.


그리고

~정조적 감각 - 예컨대 아픔, 시원함, 따뜻함 등의 쾌/불쾌의 감각

~표상적 감각 - 소리의 높낮이, 색의 차이 등


52p 하단에서 53p 원문 25 전까지 우선 정조적 감각에 대해 나와있다.

문단을 아주 간단하고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역주에도 나와있지만)






엉덩이를 찰지게 때렸다.

이때 몸의 분자운동(엉덩이가 흔들리고, 빨개지고, 바들바들 떨리는 등)은 곧이어 있는 그대로의 분자 운동 흔들린다 등으로 느끼지 않고 '아픔'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이걸 아! 미친 새끼 더 쎄게! (쾌-오르가즘) 즉 정조적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나도 설명하려고 아픔-정조적 감각으로 나눈 것이지 베르그송은 당연히 이런 걸 부정한다. 맞자마자 그냥 딱 정조적 감각이다)

즉 분자운동에서 이어진 아프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고 우리가 의식하는 건 정조적 감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왜 그런 스팽킹이 개쩌는 쾌감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조적 감각은 분자 운동/진동의 폭과 같은 보이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본문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보는 사람의 편의상 전부 그대로 인용하겠다.


-진동이 의식에 대해서는 그것과 거의 닮지 않은 감각의 모습을 띠게 됨으로써 (분자)운동으로서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진동이 어떻게 그 자신의 크기에 속하는 뭔가를 감각에 전달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반복하거니와 가령 진동의 폭과 같은 겹쳐 볼 수 있는 크기와 전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감각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이 이렇게 분자운동의 번역에 불과하다면 그 진동의 아무것도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공간의 움직임이었던 분자운동이 질적 감각으로 변해버리니까 기존의 본질이었던 공간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54p를 보면 (이미 역주65번에서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지만)

이런 정조적 감각은 미래로 향하는 행동의 필요에 따라 생겼다는 것이다. 생명은 선택이 필요한 곳에서 감각이나 감정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건 미래로 향해 있다.

그러므로 몸속의 분자 운동(공간)과 정조적 감각(질)의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감각이나 감정의 본성을 잊고 있다는 설명이다.


55p ~59p

반복된 설명을 다시 풀어서 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다. 베르그송은 책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역주 72번에서도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고통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운동하라는 명령

쾌락은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라고 한다.

앞서 말한 엉덩이 때리기는 학교 체벌, 혹은 알지도 못하는 변태의 손길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즉시 피하라는 고통의 정조적 감각일 것이다.

그에 반해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은 따로 벗어나지 않고, 본문을 인용하면 '모든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더 때려줘 더~) 신체의 무기력'이 일어난다.


이건 '앞으로' 행동할 것을 염두에 둔 미래로 향하는 행위이자 선택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애초에 양으로서는 포섭할 수 없는 질적인 것일 터.


다음



59p 하단부터 표상적 감각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편의상 정조적 감각과 구별해두었던 정리를 다시 옮겨놓겠다.

~정조적 감각 - 예컨대 아픔, 시원함, 따뜻함 등의 쾌/불쾌의 감각

~표상적 감각 - 소리의 높낮이, 색의 차이 등


당연하지만 표상적 감각은 온전히 정조적 감각과 떨어진 감각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베르그송답게 설명을 위해 정조적 감각만 따로 떼어 (본문에도 이를 명시해두었다. 59p 하단 첫 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것뿐이다.


또 예를 들어보자.



모텔에 갔는데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정확히 말하면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 어떤 소리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모텔이라는 특성상 '신음 소리'일 거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걸 구별하기 위해 나는 '주의를 모은다' (여기서 주의를 모은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리고 이 표현은 물질과 기억에서도 나오는데 그때도 말 그대로의 의미니 어려워할 것 없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철학에서 신조어를 최대한 배제한다. 그래서 지속이라는 단어를 쓴 거였는데... 이건 나중에 설명하겠다.)


작은 소리가 조금씩 뚜렷해진다. 이건 우리의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점점 벽에 귀를 가까이 대는데 갑자기

'아~!!!!'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심장이 두근거린다.



난 신경 쓰지 않고 잠이나 자려고, 불을 끈다.

그래도 옆방의 뜨거운 밤은 끝나지 않고 계속. 간헐적으로 이상한 소리가 귀를 맴돈다.


옆방 커플이 외국인이었는지 드문드문 신음 소리에 섞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유독 귀에 꽂힌다.


' 아~ 퓌땅ㅏ 퓌탕 쀠타앙~'



이게 59p 하단에서 63p까지의 설명 끝이다.

읽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4p 중단에 핵심이 나온다.


'최초의 의식의 빛과 함께 시작되었고 우리의 생존 기간 내내 계속되는 매 순간의 경험은 자극의 일정한 가치에 대응하는 감각의 일정한 색조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때, 나타난 결과의 어떤 질에다 원인의 어떤 양의 관념을 결합시킨다. 그러고는 결국 모든 획득된 지각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그러한 관념을 감각에, 즉 원인의 양을 결과의 질에 집어넣는다. 정확히 바로 그 순간에, 감각의 어떤 색조나 성질에 불과했던 강도가 크기로 된다.'


이어지는 바늘의 예시를 그대로 가져와 풀어보면


바늘의 깊이 (원인-양)에 따른 고통(결과-질)이 나오는데 이때 고통은 세기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질적인 차이이다.

그런데 우리는 원인의 양을 결과의 질에 집어넣어서

바늘의 깊이(원인-양)에 따른 고통(결과-양)으로 변해 고통의 세기를 단순한 크기로 환산해버린다.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저번 독회부터 줄곧 이어져 왔던 논의를 중요한 문장으로 되짚어 주고 있을 뿐이다.

이 문장을 뼈대로


65p~68p 소리 감각의 예로 설명

69p~70p 열감각

71p~72p 중량감각

72p~82p 빛의 감각으로

양과 질은 다르다는 걸 각각 다른 예로 반복 설명하고 있다.

델/페의 실험도 잴 수 없는 것을 재려고 했다는 것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

그래서 따로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다만 71p 중간에

'~습관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는 주의해야 될 부분이다. 이때 아직 <물질과 기억> 습관 기억에 대한 논의는 없었기 때문에 이때의 습관이 그 습관 기억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다고 라베쏭이 말한 습관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 그냥 확대해석할 필요 없이 우리가 평소에 알던 그 '습관'이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83p~84p

에서 나오는 여러 기호들은 그냥 무시해도 된다. 진짜로.

85p 첫 문장만 유심히 보면 된다.

'페히너는 두 개의 단순한 상태, 즉 두 감각이 같은 크기라는 것과 또 그것들을 더한다는 것을 우선 정의하지 않으면 심리학에 측정을 도입할 수 없음을 이해했다.'


측량, 재는 행위를 하고 싶어서 감각을 크기로 계산할 수 있다는 가정을 넣지만 당연히 이건 질을 양으로 말하니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




86p 첫 문단

'간단히 말해서 다른 두 감각은 그들의 질적 차이를 제거한 후에도 어떤 동일한 기반이 남아 있을 때에만 같은 크기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한편 그러한 질적 차이야말로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해 버린 후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지 알 길이 없다.'


베르그송은 87p의 하단~에서 다시 정리해 주고 있다.


미분 S를 S 합계로 생각한다는 것이 오류다. 어떤 감각은 경험하고 자극을 받으면 S가 아니라 S'로 변하는 것이다. S에서 S'로의 이행이 산술적 차이로 비교될 수 있으려면, 1차적으로 내가 S와 S' 사이에서 일종의 간격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게 의식하고 감도가 S에서 S'로 정확하게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다.

가만히 반성해 보면 실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직 실재는 거쳐온 상태 S와 S'뿐이다. S에서 S'쪽으로 1만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감각에서 1은 어디서 어디까지 쪼개진 것인가. 애초에 쪼개면서 빈자리를 만들었기에 온전한 S'로의 전환이 불가능했음에도 끝까지 따져가 보자. 계속적인 순간들이 길게 늘려진 도미노처럼 (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ㅣ)나열된다고 했을 때, 각각은 다른 원인을 가지게 되니,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베르그송이 '더 쎄게. 좀만 더 쎄게.' 이런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또또또또또 말하지만 양과 질은 다른 것인데 질을 양으로 보는 '편안한' 착각이 있는 것이고 이런 착각에서 온전한 전체를 탐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


'두 상태의 계기를 두 크기의 차이와 동일시한 당신의 사유 행위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즉 질을 양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89p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지 간에 우리는 중간 눈금법(사실상 똑같은 이치의 최소차이 측정법 포함)이 정신물리학을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했다고 믿지 않는다.'


즉 델뵈프와 페히너는 둘 다 똑같이 91p '상식에 친숙한 개념을 정확히 공식화하여  극단적 귀결로 밀고 나간 것에 불과하다.'


92p는 중요한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사유하기보다는 말하기 때문에'

역주를 편의상 옮겨본다. "말을 구성하는 단어 자체가 사물을 하나하나 끊어서 거기에 대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 사물과 같이 공간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베르그송은 우리가 나중에 볼 <사유와 운동>에서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을 한다.

페이지 수를 기록해 둘 테니 미리 읽고 싶은 사람은 읽어봐도 무리 없는 내용이다.

<사유와 운동>100~114p


그때 가서 할 말이지만 독해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베르그송은 절대절대절대 반지성주의자가 아니다. 위에 적어둔 페이지를 찾아가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베르그송은 공작인(제작인 호모파베르)과 지성인(호모 사피엔스)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바~라는 말이 나온다.

과학을 배척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 그저 베르그송이 싫어하는 것은 언어인 (호모 로쿠악스)이다. 여기서 언어인은 뭐냐~ 하는 자세한 내용은 좀 기니까 <사유와 운동> 독회 시간으로 넘기겠다.


다시


92p

'공통의 영역에 속하는 외부 대상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주관적 상태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상태들에 외부 원인이 표상을 가능한 한 많이 도입함으로써 그것들을 객관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이롭다.'


베르그송은 확실히 인정하고 있다. 수치화하고, 측량하는 것이 어찌 안 이롭겠는가.

다만 그러다 보니


'우리의 인식이 증가할수록 더욱더 우리는 강도의 성격을 띤 것 뒤에서 외연적인 것을, 질 뒤에서 양을 보며, 또한 전항에 후항을 집어넣고 감각을 크기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과학이 환상을 가져오는 순간이 있었는데 계속된 양과 질을 혼동하는 걸 '당연하게'여긴 것이다.


그리고 95p에는 1장 끝에는 드디어 다음 장부터 지속을 설명하겠다는 예고가 나오며 글이 마무리된다.


여기까지 독회하신 분들 모두 어렵지 않게 읽으셨으리라 장담한다. 베르그송 책은 원래 쉽게 쓰여있다.



2장에 들어가기 전에 베르그송이 과학을 어떻게 보는지 잠깐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여기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소감문을 짧게 인용하는 걸로 가볍게 짚고 넘어가겠다.


<19세기는 기계 발명에서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지만, 이러한 발명품들이 인류의 도덕적 수준을 높일 것이라고 너무나 자주 가정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사회의 기술 발전이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도덕적 완성을 '자동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물질적 수간의 증가는 상응하는 정신적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들자면, 증기와 전기의 사용은 거리를 줄임으로써 그 자체로 민족 간의 도덕적 화해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으며, 영적 진보, 즉 형제애를 향한 더 큰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적대감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심화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르그송은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지만, 언제나 단숨에 부정적인 것이 찾아올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의 철학은 비결정론이자 가능성, 소은 박홍규 선생님 식으로 말하면 기능주의니까. 잘 살던 인간은 계속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고 한순간에 죽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고. 과학에 대한 베르그송의 관점도 이와 같다. 과학이 가져올 기능은 새롭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그것이 오롯이 유익할지, 아니면 크나큰 공포를 가져다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가봐야 아니까.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훗날 2차까지)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기능이 자동적으로 낙관적인 미래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노력해야 된다. 무엇을? 그건 나중에 <창조적 진화>와 <두 원천>으로...



퀴리의 위대한 발견에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이 베르그송이다. 당시 최신 생물학에 박수를 치던 사람도 베르그송이었으며, 비록 <창조적 진화>에서 비판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만 영사기가 처음 나왔을 때 확장된 지각 운동이라고 감탄하고, 현대 과학의 발전은 분명 좋은 일이라 <사유와 운동>에서 빨았던 사람도 베르그송이다.

<지속과 동시성>에서는 상대성 이론이 '그가 우리에게 단지 새로운 물리학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방식들까지도 제공한다고 확신했던 점'이라고 말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겠다. 아니 상대성 이론 이해도 못 한 놈이 무슨 칭찬을??

잠깐 아인슈타인 이야기를 할까. 그 양반은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지속과 동시성>을 읽고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는다.


'어제는 상대성과 시간에 관한 베르그손의 책<지속과 동시성>을 검토했다. 그에게는 유독 공간이 아닌 시간만이 문제가 되니 이상한 일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의 심리학적 깊이보다는 언어적 능력이다. 그는 심리적 요인을 객관적으로 논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엄밀하지 못하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는 실체를 파악하고 있고 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지도 않다.' 철학자들은 늘 심리적인 실재와 물리적인 실재 사이의 이분법을 맴돈다. 다만 이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만 다를 뿐이다. 즉 이것을 ‘단순한 개인적 경험’으로 보거나 아니면 ‘단순한 사유의 구성물’로 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베르그손은 후자에 속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객관화한다.'


우선 간단한 오해는 풀렸기를, 자세한 철학적 검토는 <사유와 운동> 독회 시간에 하기로 하자.



어쨌든 지성이 반드시 있어야 우리가 다음 독회에서 보게 될 지속에 대한 직관을 행할 수 있다. 어라? 이거 누구 해석이냐고? 해석이 아니다 그냥 베르그송 책에 다 나와있는 말이다. 어 그런데 러셀은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반지성주의에 모호한 신비주의자 새끼라고 했는데? <서양 철학사>에서 베르그송은 지성과 본능을 동화책에서 나오는 나쁜 놈이랑 착한 놈이라는 식으로 구분했다고 써놨는데?

난 잘 모르겠다. 분석철학으로 쓴 철학사라고 알려져 있는데 분석철학=책 안 읽고 말하기 이건가?

이건 오히려 러셀 쉴드 쳐주려다가 분석철학 싸잡아 욕먹이는 짓이다



다음 독회는 <시론> 135p까지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