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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보통 '길'에 비유된다. 시간 속에서 수고를 들이며 어딘가로 나아가는 여정,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을까? 우리의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길 끝에 영원한 행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가 은연중에 잘못된 길로 향하고 있거나, 올바르게 걸어보았자 그 끝에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생이란 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정말 질 나쁜 장난일 뿐이다.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기 직전의 파우스트는 지식의 정점에 이른 뒤에 쇠락해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해, 신의 질 나쁜 장난을 스스로 끝낼 생각까지 품는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새로운 길을 보여주자, 파우스트는 곧바로 새로운 인생으로 뛰어든다. 파우스트는 새 여정에서 자신이 그간 포기했던 기회비용들을 다시 체험한다. 그레트헨에게서 사랑과 연인의 쾌락을, 궁정에서 권력과 명예를, 헬레네에게서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부정한 힘을 빌려 얻어서일까? 기껏 손에 쥔 행복의 실마리는 금방 손에서 달아나거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져도 내면의 공허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들에는 분명 의미가 있었다. 그레트헨의 죽음으로 파우스트는 행복과 쾌락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헬레네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파우스트는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인식할 수 있게 됐다. 간척지에서 근심에 눈이 먼 것은 결정적인 호재였다. 그동안 눈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던 탐욕들이 통로를 잃었으니, 이제 감각의 세계에서 한발치 떨어져 정신만으로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야욕을 실천하던 존재가 이제 내면에 있는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존재로 거듭났으니, 마치 인간에서 성인(聖人)이 되는 듯한 전회였다. 파우스트가 최후에 느낀 '보람의 형태를 한 행복'은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걸어둔 지옥의 족쇄였지만, 파우스트의 우화(羽化)를 알아본 신은 그 행복을 천국의 열쇠로 바꾸어주었다.


파우스트는 쉽게 옹호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실 파우스트의 모든 과오는 오만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기 전까지 인생의 모든 여력을 학문에 쏟아 넣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만큼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존재인 메피스토펠레스 앞에서 그간 쌓아 올린 지식의 탑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완전히 이해하기는커녕 접해보지도 못했을 신의 섭리를 안다고 주장하니, 메피스토펠레스의 눈에는 파우스트가 귀여워 보였을지도 모를 지경이다. 또한 자신의 쾌락을 그레트헨이 짊어져야 할 짐과 바꾸고 말았다. 마법으로 한 국가를 홀려서 붕괴 직전으로 만든 것은 변호의 여지조차 없다. 단순히 멍청한 황제만이 짊어질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이 함께 짊어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일단 그곳에 이르기 위해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했다. 자신이 세상과 이치의 중심에 있다는 식의 오만이 끝까지 그를 궁지로 몰았다. 물론 본인도 양심의 가책을 종종 느끼기는 했지만, 끝내 과거를 쉽게 털어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파우스트를 보면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어디까지나 파우스트의 이야기다. 처음부터 올바른 목표를 인식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기껏 목표를 정한다 해도 그곳에 이르는 길을 모른다. 민담과 연극이 결합한 형식에 맞추어 파우스트의 행로 또한 극단화하기는 했지만, 파우스트의 방황은 우리네 인생의 일반화라고 볼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긴 여로에서 상처 없이 올바른 길을 찾는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기적인가? 메피스토펠레스는 계속 걸음을 뗄 여력을 주었을 뿐, 메피스토펠레스의 지혜로도 파우스트가 걸을 길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힘만 가득한 무지 속에서 파우스트가 겪은 방황은 결과가 파멸적이었을 뿐, 우리네 삶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체험이었다.


무엇보다 파우스트가 단순히 시간과 쾌락 속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선사하는 쾌락의 선물을 순순히 먹었지만, 결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았다. 항상 파우스트는 목표를 스스로 정했다. 그리고 쓰디쓴 실패 끝에 목표가 옳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파우스트는 결코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지향을 바꾸어가며 여행을 지속해갔다. '자신이 갖춰야 할 모습'을 이해하고 성취하기 위해 그가 쏟았던 모든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 앞서 파우스트가 오만, 즉 자기애에 빠져 죄를 저질렀다고 고찰했다. 파우스트가 최후에 이른 길은 탐욕의 통로를 닫은 채 자신의 간척지에서 살 백성들을 보살피고 헌신하는 것이었다. 자기애가 인류애로 진화했으니 그는 정말로 변신 끝에 바른 모습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그에게 관용을 베풀고, 천사들은 "언제나 갈구하며 노력하는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결국 삶을 선(善)으로 이끌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더라도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관철한다. 따라서 피상적인 행복에 머무르지 않고 그 어둠을 체험하면 곧바로 다른 길로 향한다. 미숙하게 쌓은 경험들은 반성의 계기가 되어 더 나은 길을 가르쳐 준다. 올바른 길을 찾기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길이 나타날 것이다. (물론 이 말을 '실수를 마구잡이로 해도 언젠가는 바른길로 갈 것이다'라는 식의 낙관주의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전제는 '올바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다.)


「파우스트」를 읽고 용기를 느꼈다. 최근 개인적으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릴 일들이 많이 있었다.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일들이 잘 풀린다고 해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크게 들었다. SNS를 믿지 말라는 격언은 수차례 들었지만, SNS 속의 내 또래들은 돈을 벌기 시작한 지는 오래고 그것들을 지불해 행복을 쓸어 담는 듯 보였다. 반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보람이 있기는 해도 장래가 불투명하며 벌이는 기대해서는 안 되는 수준이다. 내가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여정을 보면서 일을 긍정적으로 보게 됐다. 인생은 단 한 번이라지만, 그 길이는 생각보다 꽤 길다. 물론 실패가 누적됐다면 무시하기 어렵겠지만, 단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결말을 확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걸을 길이 내게 맞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 그것을 깨닫게 되면 나는 파우스트가 그랬듯이 원점으로 돌아가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내게 남은 시간은 줄어들겠지만, 내가 보내온 시간은 그만큼 늘어갈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들은 줄어들겠지만 해본 것들이 늘어났으니 여생 동안 할 일들이 그만큼 뚜렷해질 것이다. 그동안 심신이 쇠하더라도 진정 행복한 인생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고 올바른 길을 찾아 의지껏 걸으면, 파우스트가 최후에 천국에 이르렀듯이 나도 행복의 이상향에 도달하리라 믿어보기로 했다.


생명의 본분은 의식주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흔드는 시간과 운명이라는 시련에서 끝없이 모습을 바꾸어가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해가는 것이 생명의 본분이다. 좋은 일은 알아서 찾아오지 않지만, 대신 생명은 좋은 것을 위해 행위하는 힘이 있다. 이 생명력을 최선으로 발하여 끝내 자신이 꿈꾸던 모습으로 우화하는 것이 참다운 생(生)이다. 파우스트는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참다운 생으로 돌입했다. 신은 그런 파우스트에게 보상으로 천국을 열어주었다. 나는 신을 그렇게 분명하게 믿지는 않으므로 천국의 열쇠를 진지하게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생명이 다할 때 그간 내 삶이 참된 삶이었다고, 나는 생명으로서 본분을 다했다고 지금까지 걸었던 모든 길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기쁠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보상일 것이다.


「파우스트」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계기이자, 내 삶과 생명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 체험을 선물한 괴테에게 경의를, 그리고 을유문화사 판본들을 추천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