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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 없으리라 생각한다. 헤밍웨이의 장편 중 가장 단편에 가까운 <태양은>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미 모든 파괴가 일어났고 그 폐허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몽롱한 이들의 사건 없는 방황을 그리고 있다. 헤밍웨이의 다른 장편들과 비교했을 때-<노인과 바다>처럼 분량 짧은 글과도 비교해보라-<태양은>에는 유독 사건이 없으며, 거세된 주인공이 자신의 앞에서 모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주변으로부터 뭔가 활력을 받아보려고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만을 보여준다. 사람이 어떤 소설을 좋아하려면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 안의 서사에 붙들리거나, 혹은 그 안의 정서에 붙들리거나. 그리고 헤밍웨이의 단문은 이 정서를 강하게 표출한다. <태양은>에서 주인공의 묵묵한 태도는 큰 폭발음으로 인해 귀가 망가져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먹먹함과도 같아, 그 먹먹함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태양은>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서는 지금 우리에게 꽤나 낯설다.
<예수의 아들>이 표현하는 정서도 사실 낯설기는 상당히 낯설 것이다. 약에 취해 몽롱한 이들이 둔감해진 감각으로 자기 상처를 천천히 후벼파며 뭔가 건질 만한 것이 있는지 뒤지는 모습. 무너진 삶과 피로 얼룩진 폭력이 그리 극적이지 않은 형태로 제시되며, 그 안의 사람들은 전부 정상이 아니다. 사실, 약물중독자를 다루는 다른 글들과 비교했을 때 그 인간군상이 유독 특이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윌리엄 S. 버로스의 <정키>에서 느껴지는 쾌활함이, 휴버트 샐비 주니어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느껴지는 음울함이, 필립 K. 딕의 <스캐너 다클리>에서 느껴지는 편집증이 특이한 것처럼, <예수의 아들>에는 다른 글과는 비교되지 않는 마비감이 있다. 술을 마셨을 때 화가 나거나 슬퍼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느낌을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피부가 말 그대로 껍데기가 된 것처럼 굳어져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둔감함.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전혀 없는, 굳어진 손가락 사이로 흘러 지나가는 시간.
그러나 그럼에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많다. <예수의>에 등장하는 이들은 전부 마비된 상태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개인적 애환이 드러난다. 품고 있던 미련, 삶의 마지막 희망, 그 밖의 다양한, 비슷한 정서를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만 이 딱딱한 껍질 아래에서 포착하는 느릿한 정동. 대체로 폭력적이고 마구잡이식의. 예전에 미국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자주 읽던 사람이 반 농담-곧, 반은 진담으로-식으로 한 말이 있다. 한국의 불우한 과거사나 인생이 망한 이야기는 대체로 크게 달라지지 않아, 625 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늙은 기업인의 이야기가 아니면 지방 주변인의 야반도주, IMF 이후 갑자기 달라진 가정사 같은 이야기로 대략 요약할 수 있다. 주위로부터 소외되거나 소외되지 않은 척 연기하는 삶. 그러나 미국 이야기에서 망가진 인생은 주변과의 비교가 필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사라졌고 어머니는 알콜 혹은 마약 중독자에 쓰레기장처럼 방치된 방에서 자라며 주변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직업은 하나 같이 길거리에서 총 맞아죽기 딱 좋은 일이다. 한국인이 한국인의 삶이 무너진다고 이야기하는 방식이 그리 과장적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이런 서사도 미국에서는 흔한 과거사인 것 같다.
거기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헤밍웨이가 자신의 글쓰기를 빙산과 같다고 이야기한 것에는 장단점이 있다. 문체가 줄 수 있는 정서가 있고, 서사가 줄 수 있는 정서가 있다. 끝부분만이 드러나 내부의 일이 묘사되지 않는 서사는 어떤 의미에서 셀프 서비스, 키오스크처럼 작가의 외주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내부 사정이 드러나지 않는다기보다는, 소설이라는 것이 어느 수준으로 깊게 인물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인물의 삶과 비슷한 일을 경험해보지 못했더라도, 그 인물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추측하거나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인형탈과도 같기 때문이다. <태양은>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에도 그런 막막함이 있다. 내가 헤밍웨이의 글 중 <태양은>을 가장 좋아하는 것처럼 <예수의>를 좋아했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운 막막함이다. 자기가 한때 살았던 집을 좀도둑처럼 뒤지며 구리를 뜯어내는 사내와, 연에 매달려 하늘을 날고 있는 옛 아내를 보며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고 끝나면 안 되는 일일 테니까.
대신 내게 익숙한 장면은 아마 이런 것들이다: 한밤중 가로등 아래에서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다단계로 싸우는 노인들, 확실하게 죽기에는 애매하게 높은 7층 건물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피가 바닥에 서서히 타고 흐르지만 몇 달 뒤에 다시 붕대를 감고 보이는 사내, 한손에 마른 대파가 든 쇼핑백을 메고 이름도 못 들어본 종교 단체의 말씀을 전하는 아주머니. 아마 그래서 한국 문학만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걸 테고, 반대로 그래서 한국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거겠지만 나는 둘 다 아니다. 바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친숙한 인물과 장면을 보고 싶지도 않고 아예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다.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글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는 좋은 글이다. 약간 아쉬운.
P. S. 책 디자인이 상당히 놀랍다. 거의 시집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들어졌는데, 덕분에 읽을 때 훨씬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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