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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포스러운 것에 이끌리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공포는 기쁨보다는 혐오를 불러 일으키며, 사람들은 혐오스러운 것을 피하려 든다. 사실 이 논제는 공포보다는 비극의 문제로 자주 다뤄졌는데, 간단하게 정식화하자면(Aaron Smuts) 다음과 같다. 


  1. 비극과 공포물은 부정적 감정을 야기한다.
  2. 사람은 부정적 감정을 피하려 한다. 
  3. 사람은 비극과 공포물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가치를 논한 이후에도 이 주제는 줄기차게 논쟁에 휘말렸다. 흄은 1번 전제를 부정하며 비극과 공포는 창작물이기에 애초에 부정적 감정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일상적으로 비극과 공포물을 피하는 사람들은 3번 전제를 의문시한다. '부정적 감정'이라는 것이 워낙 모호한 분류이기에 애초에 2번 전제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 이들도 많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정식화 자체를 의문시하기도 한다. 왜 비극과 공포물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한가? 나야 양쪽 모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쪽 의견에 가장 가깝지만, 이렇게 간단히 넘기기에는 양쪽 모두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도 참 많고, 동시에 양쪽 모두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린다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다. 아마 이 문제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보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 공포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를 토대로 탐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밤보다 긴 촉수>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책인데, 유진 새커의 전작인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와 같은 맥락으로 공포의 철학이 아닌 "철학의 공포"를 다루기 위해 철학이 다룰 수 없거나 다루지 못한다고 저편으로 밀쳐놓은 영역을 공포라는 소재를 통해 탐색한다.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이 세상을 사유하는 학문이라면, 철학의 공포는 이 인간중심적인 사유가 인간이 거주하고 있는 실제 세계와 얼마나 일치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사소한 반례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다고 여기던 근본적인 공리를 뒤흔들어놓는 반례와의 직면. 토도로프가 <환상문학 서설>에서 논했듯, 환상성은 세계와 어긋나는 지각이 만날 때 생긴다. 잘못 보았거나, 아니면 잘못 생각하고 있었거나. 공포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새커가 공포에 집중하는 이유다. 스티븐 샤비로가 <탈인지>에서 SF를 철학과 비교하며 철학이 어떤 전제가 옳은지를 검증하는 대신 SF 문학은 그 전제가 옳다고 가정했을 때의 세계를 보여주는 가치를 지닌다고 논했듯, 새커는 공포물이 인간의 세계와 실제 세계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논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공포물을 통해 그 안에 가정된 철학적 공포를 분석한다.


그 대상은 크게 나눠서 세 가지로, 단테의 <신곡>을 포함한 수많은 악마 관련 매체, <말도로르의 노래>를 위시한 고딕 주제, 사람의 세계와 너무나 다른-지구조차 인간이 생각하는 지구와 실제 지구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듯-우주다. 삶과 죽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고 무엇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한한 것들의 몸체와 구분될 수 있는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우리의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낯선 것이 의식보다도 실제 세계와 더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면 의식을 고평가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등의 주제들이 다양하게 뒤섞여 있고, 실제로 분석 대상이 되는 매체 혹은 장르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많다. 머리카락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왜 이 몇 만 가닥의 기생체들을 달고 있는 '나'를 하나의 개체로 여겨야 하는가? 지옥의 공간이 시대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면, 어떻게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이 실제 지옥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질문에 그저 낙관적인 용기를 내는 것 이상으로 무엇에 기댈 수 있는가? 귀신이 없다는 믿음이, 아무리 봐도 귀신 같은 무언가를 보았을 때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특히 그 믿음이 극소수의 반례로 깨질 수 있는-흄의 기적에 대한 반박처럼-통계적 추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철학과 철학의 공포가 나뉘는 부분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있을지도 모른다. 칸트는 일종의 공포 경험에 대한 이론을 세워두었는데, 도저히 하나의 표상으로 갈무려지지 않고 폭력적으로 압도되는 감각 앞에서 사람은 숭고함을 느낀다. 거대한 폭포를 보고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 크기를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며 아찔한 두려움을 느끼다가도, 자신이 이러한 '감각의 한계'를 경험했다는 하나의 표상을 정리해낸다. 이제 그는 숭고한 대상 앞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철학의 공포는, 바로 그 대상과 맞부딪혀야 하는 상황에서 두드러진다. 그 폭포가 자기 앞으로 무너져 내리는 상황 속에서, 내가 이 경험을 종합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다못해 어디까지 움직여야 살 수 있다는 계산조차 해내지 못할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 호러는 숭고의 벽 너머로 들어가야 하는 이들을 그리고 있으며, 더 이상 숭고함으로 포장할 수도 없는 경험의 무력함, 오성의 무력함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심리를 포착한다. 그의 사고는 더 이상 이 낯선 우주를 헤쳐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경험만은 정직하냐면 그것 역시 아니다. 공포물이 즐겨 사용하는 소재 중에는 이상한 감각을 하는 것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감각할 수 없는, 제대로 감각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공포가 있다. 분명 사람의 얼굴을 하고 말하고 있는 사람인데도 전혀 사람 같지 않다고 느끼며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른다. 자기 바로 앞에서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지는데도, 그 이외의 어떤 수단으로 그 누군가를 찾아낼 수가 없다. 너무나 얕은 감각. 사람을 우주의 존재 중 하나로 볼 때 이 경험이 의미를 갖는데, 인간중심적 사유에서 보장하던 벌거벗은 감각의 특별성은 이제 모든 물리적 감각 기제가 다 그렇듯, 그저 특정 현상을 인식하고 정보를 만들어 전달하는 것만 할 수 있는 감각기관으로 전락한다. (물론, 꽤나 기능이 좋은 기관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순 없지만.) 그 공포는 어떨 때는 그저 미묘하게 사람의 '육감'만이 포착할 수 있는 귀신 같은 존재로, 어떨 때는 매우 예리하게, 사람의 각 감각기관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거창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모기의 비행을 곁에 있는 고양이가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라. 이런 물리적 유사성 속에서 공포의 역학은 사람보다 낫거나 사람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 비교될 수 없는 어떤 비틀린 위계 속 존재를 발생시키고자 한다.


공포가 발전해나가는 과정은 결국 이 무력함의 역사와도 같다. 귀신이나 악마를 논할 때 사람은 다른 모든 점에서는 사람과 같지만 그저 죽어 있고 고통받으며 악한 신통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상상했지만, 사람 안에서도 세계 밖에서도 사람의 의식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구조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거대함 앞에서의 숭고한 공포가 <소송>처럼 부조리하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처럼 우습게 표현될 수도 있지만, 그 표현 아래에는 이 동작에 자신이 전혀 관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무력한 공포가 담겨 있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한바퀴 꼬아, 이미 이 거대한 현대 사회의 구조 속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공포물 속에서 공포를 해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쫓아오는 살인마, 귀신 같은 인간적인 존재로 그 공포를 의인화시켜, 결과적으로는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공포물은, 이토 준지의 <소용돌이>처럼 결국 끝까지 사람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어떤 형용하기 어려운 형상을 남겨두는 것이리라. 바로 그런 것을 포착하기 위해 공포물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