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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어제, 내가 학부생으로서 치르는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졸업식까지는 2개월 정도가 남았다. 그동안 자취방을 옮기는 문제로 부산에 상주하지는 못할 것 같다. 대신 나를 가장 오랜 시간 품어준 도서관에서 끝까지 오랫동안 추억을 남길 작정이다. 오늘은 토머스 핀천의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었다. 누구의 추천도 받지 않고 선택했다. 그냥 제목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대학 생활, 아니 인생 전체를 볼 때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었다. 적응력이나 센스가 남들보다 떨어져서, 무언가를 배우는 데 남들보다 확실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대단한 핀천도 나와 같은 유형이었을까? 그래서 습작 선집의 제목을 '느리게 배우는 사람'으로 지었던 걸까? 내심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넘겼다.


사실 핀천에 대해서 그리 잘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끝까지 읽은 책은 「제49호 품목의 경매」 한 권이고, 얼마 전에 「바인랜드」를 각색한 영화를 감상했을 뿐이다. 단 두 작품만으로 성급하게 일반화를 해 보자면, 핀천의 작품 세계의 매력은 '은밀함'에 있는 것 같다. 사건 뒤에는 항상 더 커다란 사건이 있다. 주인공들은 거기에 나름의 방식대로 저항할 수 있지만, 끝내 불가해한 불가항력에 떠밀려 새로운 고생길을 열게 된다. 음모론, 나폴리탄 괴담 식의 전개. 어찌 보면 철저히 대중적인 패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핀천의 작품은 우리 대중들이 사는 현실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느리게 배우는 사람」에서는 핀천이 처녀작 「브이.」를 쓰기 전부터 일찍이 이런 매력을 연마한 흔적이 드러난다. 첫 작품인 「이슬비」에서는 시시콜콜한 일상으로 애써 외면하려 해도 비집고 들어오는 죽음의 무게가 느껴진다. 「엔트로피」에서는 우주의 열역학적 죽음이 일상 속 상황과 공간을 덮치는 것이 느껴진다. 「언더 더 로즈」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연상케 하는 '반전을 잇는 반전'이 뒤통수를 때린다. 「은밀한 통합」은 애당초에 음모를 꾸미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핀천은 일찍이 자신의 사상을 만들었던 듯하다. 남은 것은 이를 문학적으로 잘 짜인 긴 이야기 속에 집어넣는 것뿐이었다.


첫 작품 「이슬비」(1959)로부터 첫 장편 「브이.」(1963)가 나오기까지 4년이 걸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내게는 꽤 짧은 시간으로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길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대학 생활 4년의 끝자락에 서있는 나를 돌아보면 더욱이 그렇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자평은, 적어도 서문을 볼 때 독자를 기만하는 처사라고는 전혀 볼 수 없지만, 아무튼 진실보다는 겸손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장편이 나오기까지 4년이 걸렸을 뿐, 핀천만의 생각이 작품에 투영될 수 있을 만큼 무르익기까지는 출생(1937) 이래로 22년이 걸렸다. 어쩌면 핀천이 지칭한 배움은 창작의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치면 나도 핀천과 비슷한 속도로 배워가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몇 년 전부터 삶 내내 연마해온 나의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나름의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슬비」를 발표한 핀천보다 네 살이 더 많으니 엄밀히는 더 느리다고 봐야겠지만, 여하튼 핀천도 이 기술을 느리게 배웠다면 나도 은근한 동지애와 위안을 멋대로 느껴도 되지 싶다.


한편 「느리게 배우는 사람」에 실린 작품들은 아무래도 단편이다 보니 그리 깊지는 않지만, 충분히 참신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도시 문명에서 자기 삶은 자기가 통제한다는, 그리고 세상의 참모습은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그러나 삶 뒤에는 방대한 양의 상호작용들이 전제된다. 심지어 우리가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은밀한 상호작용들이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우리 삶을 뒤흔들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대개 '음모론'이라 불리며 진지한 주제로 대우받지 못한다. 하지만 상호작용들을 파악하기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보이는 것만 믿으면 우리는 눈뜬 장님이 되어 점점 주체성을 잃을 것이다. 물론 망상에 잠기는 것도 경계해야겠지만,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무엇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끄는지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이끌리는 곳, 자신을 이끄는 것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핀천의 역량이 완전히 만개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시선도 살짝 좁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작품집에 있으면서도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배후의 무언가'에 대한 갈피를 미약하게나마 잡고 나름대로 싸우려는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랜 숙고 끝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리게 배웠으니, 이제 그것과 싸우는 방법을 느리게라도 배울 차례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느리게 배우고 있는 핀천의 인물들을 보며 세상을 다르게 볼 필요가 있음을 배운다. 나중에 '조금 더 배운' 핀천의 캐릭터들을 만나면 싸우는 방법까지 배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을 하나 꼽자면 「로우랜드」를 꼽겠다. 사실 「로우랜드」는 수록된 다른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삶의 거대한 불가항력에 치이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결이 같지만,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결말이 훨씬 더 몽상적이라고나 할까. 집시가 플랜지를 데리고 간 곳이 과연 올바른 곳일지 모르겠고, 솔직히 신디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나는 신디와의 관계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비밀스러운 낙원이라는 소재가 신비하고 낭만적이어서 큰 매력을 느꼈다. 쫓겨난 곳에서도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다면, 마냥 슬픈 추방은 아닌 셈이다.


이상으로 「느리게 배우는 사람」에 대한 감상을 마치려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창비 세계문학 전집에 수록된 핀천의 작품들은 박인찬 교수가 번역했는데, 번역이 대체로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사실 핀천의 원서를 구경한 적도 없고, 모든 부분을 꼼꼼히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평가할 자격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경우는 읽으면서 특별히 지장을 느꼈던 부분은 없었다. 과학 잡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을 별다른 주석 없이 「과학적인 미국인」이라고 직역한 부분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작품 전체에서 중요한 소재도 아니어서 금방 잊었다. 번역에 대한 소문 때문에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읽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해설도 자세한 편이고, 원문과 다른 뉘앙스로 번역된 문장이 있을지는 몰라도 '못 알아들을' 문장은 없다. 어차피 단편선일 뿐이니 편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