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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그 시기엔 새로운 것들이 태동하려 했다.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하며 예술을 전복시키려 했었다. 그들은 새로움을, 즉 '낯섦'을 원했다. 브레히트는 소격 효과로 연극의 새 지평을 열었고, 조이스는 율리시스로 소설의 형식을 파괴했다. 이 가운데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관습적 이해가 가진 피상성을 폭로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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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가 이미지의 배반에서 한 말이다. 언뜻 파이프처럼 보이는 그림에 파이프가 아니다란 말은 모순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관해 이것은 그림일 뿐이지 실체적인 파이프가 아님을 역설한다고 설명하는 등 해석이 다양하다. 그러나 이 해석들은 하나의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작가 마그리트의 설명, 즉 해석에 말이다. 이 해석에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즉 해석을 위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해석은 작품의 인식을 바뀌게 하며, 해석이 필요가 없다고 외치는 작품이라도 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 기초해 이 해석-불가능성에 관해 역설하고 싶어하나 정작 그것을 알아챌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 반항은 마치 아이의 것과 유사하다. 아이는 화가 나면 토라져 말을 안 하지만, 그 실상은 알애채주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이 반항이 단순한 아이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보기엔 20세기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무시하다. 그들의 이 반항으로 기존의 인식을 뒤엎는 작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낯섦"에 기초한다. 마그리트나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들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그 때문이다. 그 기괴한 이미지들이 단순히 종이 쪼가리가 아닌 작품이라 평가를 받는 데엔 이런 연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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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몽 루셀은 그 초현실주의자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기괴한 상상에서 비롯된 낯섦은 당대는 물론, 지금도 충격을 준다. 달리가 그의 '아프리카의 인상'에 영감을 받아 동명의 그림을 그린 것엔 그 이유가 적잖이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의 작품 중 '로쿠스 솔루스'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로쿠스 솔루스(외딴 곳)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작품은 그곳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의 서사는 묘사 후 벌어지는 일련의 해석에 불과하다. 

 로쿠스 솔루스는 일종의 전시장이다. 그곳의 사물들과 인물, 생물 그리고 현상 등이 그 전시장의 작품이다. 앞서 말했듯 그 묘사와 해석이 작품의 전부라 봐도 무방하다. 그는 말하자면 글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는 프루스트와 대조된다. 프루스트는 이미지를 한 폭의 글로 아름답게 묘사한다면, 그는 글을 이미지로 치환하려 한다. 정리하자면 글을 위한 이미지냐, 이미지를 위한 글이냐는 차이다. 그렇기에 프루스트는 상상력을 요하기 보다는 음미를 요하고, 루셀은 그 반대다. 이는 우리에게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일종의 전시회를 텍스트로 그려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상상력을 전면으로 마주칠 수 있게 되고 으레 예술 작품을 보고서 그 의미를 묻는 것처럼 자연스레 해석을 요한다.

 루셀은 순순히 해석을 내놓는다. 작품 각각에 얽힌 그 과거에 관한 설명이 상상의 인물과 허구와 현실을 섞어 만든 서사를 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루셀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시도한 해석-불가능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 

 작품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해석을 요구한다. 바틀비의 행동이나 그 부조리함을 우리는 견딜 수 없다. 우리는 그 의도를 원하는 것이다. 마그리트가 내보인 표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하나의 해석으로써, 파이프란 해석을 막으나, 그 문구에서 파생되는 해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루셀은 자신의 작품이 글임을, 따라서 서사를 담을 수 있음에 집중했다. 그것이 하나의 해석을 대체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해석하려는 시도는 루셀의 서사에 가로막혀 그것의 의도를 파악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서사에 집중한 뒤로는 그것의 해석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해석-불가능성이다. 우리는 그렇기에 작품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마그리트의 '겨울비'에서 나타난 사내들의 연속성은 무얼 의미하는가 같은 생각이 아닌 그것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기에 그의 '낯섦'을 본연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된다. 하나의 메세지로 전환이 된 이데올로기가 아닌 예술 그 자체의 본질을······.





이 정도면 월독감임? 개똥철학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근데 내가 두 번이나 투고를 했는데도 월독 분량 모자라면 진짜 존 바스 키메라 읽고서 3번째 투고를 해야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