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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20세기. 분명 두 말 할 것 없이 격동의 시대였다. 과학, 문학,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들이 변화를 이루는 시대였다. 정정하자. 실제로 겪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굳이 그때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20세기에 관해 각종 매체며 문학 같은 수단으로 접할 일은 있다 못해 차고 넘치기 마련이다. 우리가 배워왔던 그 어떤 지식도 20세기의 급변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격변의 20세기. 그 끝자락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소설들은 시대상을 따라 변화하기도 했지만, 늘 그래왔듯이 과거부터 논의해오던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세 스콜라 철학이 유행하던 시절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토의를 이어오던 자유의지와 결정론 역시 그 주제임이 명백하다.
결정론은 어쩌면 허무에 관해 답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부조리가 다가오는데, 왜 자1살하지 않는가. 익숙한 어구들이다. 결말이 정해져있는 이상 우리의 삶은 시작과 동시에 끝난 것과 같다. 결말이 죽1음 하나로 귀결된 이상, 그 안에서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정말로 모든 일이 결말까지 이미 결정되어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달리 할 여지가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모든 일이 적혀있다는 세월의 책이라도 뜯어 해부한다쳐도, 그리스 로마 신화의 비극처럼 그로 인해 다시 일어나는, 압도적인 불합리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아. 정말로 살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독보적이라 불러야할진 모르겠지만, 이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또한 그러한 질문에 답변하는 종류의 것일텐데, 그렇다면 이 소설은 다른 작품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공존 가능성만을 제시하는 작품이라면, 단순히 철학을 소설로 옮긴 것과 다름이 없기에 구태여 이 중편 작품에 집착하여 다룰 이유는 딱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다만 이 작품에서 다루는 자유의지는 어딘가 아름다운 구석이 존재하기에, 이 작품은 따로 감상을 적어낼 필요가 발생한다. SF에서 표현하고 느끼기 꽤나 어려운 감정인 모성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의지는 그 자체로 존재하여 논의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숭고하게 표현되거나 다른 무언가로 비유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룬다하여도 부차적으로 다루는 것에 지나지 않지, 소설의 중심축으로써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모성애는 지극히 인간답고 개인다운 감정이니만큼, 자유의지라는 주제와 응당 엮일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헌데, 그게 전통적으로 자유의지와 늘 다퉈오던 결정론의 양립과 함께 일어난다면. 이건 사뭇 다른 이야기로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목적론이라면 대체 왜
<네 인생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중편이지만 읽기가 꽤 녹록치 않은 작품이다. 일단 소설의 기법 자체가 굉장히 특이하다.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오가며 서술하는 방식이 그러한데, 이는 초반부엔 크게 두드러지지 않으며 독자에게 적당한 양의 혼란과 긴장만을 안겨주지만,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헵타포드라는 외계 종족을 만나며 그 역량이 강화되기에 이른다.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헵타포드는 기존 SF 작품들의 적대성을 띄거나 코즈믹호러적인 이해불가능함을 수반하던 외계인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은 인간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자신들의 문물을 스스럼 없이 내보이고, 언어를 가르쳐주며 지지부진한 의사소통이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우호적인 관계로 소설 내에서 그려진다.주인공이 언어학자로써 그들의 언어를 배워나감에 따라, 그녀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 자체에 그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들은 문자의 선형을 바꿈으로써 문장과 단어의 뜻을 수정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는 그들의 특이한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들의 사고 방식은 페르마의 원리처럼 이루어져있다. 페르마의 원리란 빛의 굴절율에 관한 이야기다. 빛은 물에 닿기전까지 일직선으로 나아가다 물의 굴절률이 공기와 다르기 때문에 수면에서 경로를 바꾸게 된다. 신기하게도 이 바뀐 경로는 거리상 가까운 다른 굴절보다 빨리 도착함에 따라 늘 최단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빛은 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안다는 듯 최소 시간의 거리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빛은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물에 닿아 굴절되었다는 인과관계에 따라 운동하는 것일까. 그냥 놓고만 보면 뭔가 싶은 이 그림은, 결론적으론 목적론이냐 인과론이냐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러한 변분 원리를 동료인 개리와 함께 토론하며, 이게 어딘가 목적론처럼 느껴진다는 결론을 내린다. '네 목표로 갈 때는 도달시간을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할지어다.' 하는 식의 계명을 받아 빛이 활동하는 것 같다는 개리의 말에 그녀는 깊은 동의를 표한다.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빛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상이란 인과관계로 이루어져있다. 어떤 일이 어떤 일을 낳고, 어떤 사건이 어떤 사건을 낳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세계관인 인과론이 우리 세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목적론을 따르는 헵타포드에겐 과거와 미래는 동시에 이해가능한 이야기다. 모든 일이 결정되어있기에 과거 또한 결정되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의 사고체계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언어를 공부해오던 그녀는 이제 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를 한순간에 볼 수 있다. 시간을 오가던 서술방식은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일이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과거. 아이를 떠나보낼 미래. 이를 서술하고 있는 지금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는 그녀 인생의 끝마저도. 그렇다면, 왜 절망하지 않는가?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이미 결정되어있다면, 최소한 응당 울부짖으며 그를 바꾸려 노력해야하지 않는가. 왜 당신은 네 인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이제 잠깐 맨 앞 페이지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아이를 가지고 싶냐고 묻는 남편의 질문을 통해 이 작품의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 그 제안을 수락하고 아이가 태어난다는 간단한 이야기. 이 서사는 무엇보다도 결정되어있다. 인과관계적으로 요구와 허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저 일어났어야하는, 결정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결정되어있다면 딸의 태어남이 죽1음으로 이어지던지, 아니면 그 역이던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그럼 이제 왜 이 일을 선택해야하는지가 남는다. 도대체 왜 그녀는 결과를 알면서도 다시 고통으로 찬 길을 걸어나가려 하는가. 그리고 이 이야기는 왜 아름다울까. 이미 전부 결정되어있는 이야기라면, 대체 어디서 무엇으로 아름다움은 느껴져야하는가. 이제 비로소 한 가지 이야기가 남는다.
2. 자유의지 : 모성애
이 소설이 테드 창이 아니라 다른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면, 가령 PKD에 의해 적혔다면 아마 우리는 페이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알면 미래를 바꾸는게 옳다고 그리 생각할 것이다. 헌데 이 서사는 특이하게도 미래에 순응하며 한 층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눈길이라는 소설이 있다. 문체도 딱히 특별할 것이 없고, 분량도 짧으며 내용도 평이하다. 국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이청준이 썼다고 하기엔, 어딘가 아쉽게만 느껴지는 특징들로 이루어진 단편이다. 헌데 이 소설을 실제로 읽어본다면 그런 감상이 들 틈이 없다. 흐르는 눈물에, 벅차오르는 마음에 감동을 부여잡고 페이지를 넘길 뿐이다. 이 소설의 어떤 점은 이토록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모성. 어머니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모성은 숭고하다. 우리가 모두 아는 이야기고 감정이다. 그렇기에 감동한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 <네 인생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인 작품이다. 결정론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을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이 소설 역시 모성을 다루고 있는 작품임에는 변함이 없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대화의 일부를 살펴보자.
"그이와 나는 차를 타고 침묵으로 가득 찬 긴 노정을 함께하게 될 거야. 신원 확인을 위해 가는 길이야. 온통 타일과 스테인리스뿐인 시체 안치소. 냉동 장치가 웅웅거리는 소리와 방부제 냄새를 기억해. 직원이 시트를 걷어 네 얼굴을 보여줄 거야.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겠지만, 네 얼굴이라는걸 나는 알겠지. "예. 맞습니다." 나는 말하겠지. "제 딸입니다."“
(p.157)
"나는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유대 관계의 증거, 네가 내 뱃속에 있던 자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양감을 느껴. 설령 너의 모습을 직접 본 일이 없다고 해도, 나는 수많은 갓난아이들 사이에서도 단번에 너를 찾아낼 수 있을거야. 저쪽은 아녜요. 아, 재도 아닙니다. 잠깐, 저기 저애예요. 예. 그 아이가 맞아요. 제 딸입니다.“
(p.228)
주인공은 작품의 첫 문장부터 독자를 너라 부르며 2인칭으로 소설을 이어나간다. 소설을 읽어나감에 따라 우리는 '너'가 주인공의 딸임을 깨달을 수 있다. 작품 초반부, 그녀는 이미 헵타포드의 사고 방식을 통해 딸의 죽1음을 예지한다. 그리고 후반부엔 탄생을 예감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목적지도, 자신 인생의 일부인 딸의 목적지도 전부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체의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부모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결정에 의해 이미 정해진 이상. 발버둥이라도 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순응할 것인지. 인과론인지 결정론인지. 사람이라면 응당 어떤 행동을 한다해도 틀리진 않을테니, 어느 하나 이 쪽이 옳다고 답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 그녀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는건 아이다. 기실 인간이란 생명체가 그렇듯, 아이는 양측의 특성을 띄고있다. 인과에 따라 등장하고 결정으로 인해 소멸한다. 오직 결정론을 통해 해석해도 좋지만, 여기서는 인간다운 인과론이 필요할테다. 주인공은 그 두 가지 모습을 한 번에 깨닫는다. 부모는 아이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지만, 아이는 부모에게 깨달음을 선사한다. 극히 다른 일이며 극히 비슷한 일이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늘상 그렇다.
그녀는 단순하지 않다. 사고는 복잡히 섞여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외계인으로 생각이 혼재되어 있다. 그녀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모성애를 가질 수 있었던건 그녀가 혼합적인 사고방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헵타포드였다면 그녀는 그런 감정을 취득할 수 없었으리라. 아마도 그녀는 전자 쪽에 더 많은 힘을 실었으리라. 이제 그녀는 모성이라는 이름의 자유의지를 얻는다. 결정론을 단순한 허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고귀한 자유의지를. 이 자유의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얻으려 했던 이유도 모두 그녀의 딸이였다.
결국 결정되어있는 일이다. 그저 있는대로 흘러가는 시나리오이며, 바꾸려 노력한다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그 인과관계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무용지물의 무언가. 심지어 헵타포드들에겐 이건 단순한 사실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의 사고는 그녀 스스로가 서술했듯 인간과 외계인의 혼합물이다. 인간인 우리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과정을 깊이 사랑한다. 그렇기에 인간인 그녀가 딸의 이야기를 펼쳐보는 일은 그 고통과 기쁨을 모두 포함하여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제목은 '루이스 뱅크스의 딸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인생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딸을 위해 써내려간 아름다운 소곡집이자 지극히 인간다운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동시에 내 인생의 이야기와도 같다. 어느 자식도 부모에게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고, 어느 부모도 자식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누구보다 끈끈하게 이 길에 묶여있는 존재들이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그렇다. 익히 아는 비극적인 결말로 달려가는 그녀를 보면서 다들 어떤 감상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어리석다. 안타깝다. 여러 감상이 있겠다만 내 경우엔 숭고함이였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고통을 걸어나가길 선택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겐 숭고함을 느끼게했다. 허무 밖에 남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네 인생의 이야기를 위해, 현재를 위해 과거와 미래를 살피고서도 다시 택하는 이 모습은. 구태여 덧붙일 것도 없이. 눈물 한 톨로 지불할 수 있을만한 값진 이야기다. 네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기도 하다.
3. 네 인생의 이야기, 우리 인생의 이야기
길게도 써왔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작품 내의 대화 하나로 정리가 가능하다.
"그러면 너는 책장을 손으로 누르고 나를 제지하지. '원래대로 읽어줘. 엄마!' '난 여기 나와 있는 대로 읽고 있는데?'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지." "아냐. 엄마가 한 애기는 진짜하고 달라." "벌써 무슨 애긴지 알고 있는데 왜 나더러 읽어달라는 거야?" "애기를 듣고 싶으니까!"
그런 말이다. 이미 인과를, 원인과 결과를 다 알고있는데 왜 다시 이야기를 하려는거야? 이 말에 답하는 이는 내가 아니다. 딸인 네가 답한다. 듣고 싶으니까. 당신이 내 인생을 어떻게 펼쳐주는지 당신만의 방식을 알고 싶으니까.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그리 엮여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내용이 어떻게 적혀있는지는 중요치 않을지도 몰라. 우리 인생이 결정되어있다한들 결국 결정하는건 우리일테니. 그 시나리오가 어떻든 간에 우리 인생은 가치로 충만하거든.
그렇기에. 어쩌면, 적어도 오늘은. 네 인생의 이야기를 해야겠지. 이 길이 분명 아플걸 알면서도 걸어나가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훨씬 즐거울테니까.
결정론에 관한 긴 토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태어난 이래로 결정론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크게 없었다. 결국 언젠가는 죽1어야할텐데. 구태여 그런 주제에 관해 그다지 긴 시간을 할애해야하나 싶었지만, 어쩌겠나. 삶의 과정이 이러한 것을. 하여서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이 일이 어느정도는 정해져있는 일이길 바래 마지 않는다. 해야하는 일이라면, 어딘가에 이미 쓰여 완성된 글이기를. 그렇다면, 청컨대 남은 기한 동안 내가 이 글을 조금 더 좋게 완성할 수 있기를.
또한 다분히 인문에 속한 이 글을 너무 노여워하지 않길 바란다. 내 과학 등급은 7이였기에,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서술을 적고자하면 기한에 맞추지 못했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물론 글을 못써서 서술이 어려워진 것도, 그리고 아예 빼놓지는 않으려하나 시간 관계상 놓친 부분이 많았던 것도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바란다. 연장 덕분에 이제는 아니지만. 이 글을 바삐 적던 한 시간 전까진 그랬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과학에 관한 내용을 깊게 다룰지는 미지수다. 세월의 책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리도 용서해야할 일이 많은 까닭은, 그저 내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결정되어있는 일이 아니기에 발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어딘가에 종속되어있는 무용지물의 무언가라 한들, 이미 모든 일이 결정되어있는 일이든. 그 목적지로 도달하는 길이 부디 아름답기를. 그리고 내 모난 글솜씨와 미사여구들로 마무리하기보단, 아무래도 소설의 문장으로 맺음하는 것이 이 초고를 위한 길이고 이 작품의 구조를 맞추는 일이기에.
"이런 의문들이 내 머리에 떠오를 때, 네 아버지가 내게 이렇게 물어.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면 나는 미소 짓고 '응'이라 대답하지. 나는 내 허리를 두른 그의 팔을 떼어내고,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너를 가지기 위해."
월간독갤 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다행히 기간 연장이 이루어져서 천천히 쓸라고 일단 쓴것까지 올림
큰 틀은 이렇게 가져갈 것 같고. 너무 감상적인 면은 좀 쳐낼까 고민중임. 특히 모성애 파트랑 마무리 부분은 이 작품도 다시 한번 읽고, 눈길도 다시 한번 읽은 다음에 수정해보고 싶기도 함. 일단 부모님한테 한번 읽어보시라고 드린 상태라서 좀 천천히 써야할 것 같긴한데 그래도 매일매일 조금씩 쓰다보면 금방 되지 않을까? 하는 나태한 생각이 들고있음
내가 바부라 글이 좀 부족해도 이해바랍니다..
이거 읽을 때 어렴풋이 느꼈던 건데, 누가 정확하게 지적하더라. 초기작이라 테드 창이 아직 소설을 제대로 쓰는 법을 잘 몰라서 외계인들을 주인공이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도구로만 설정해서 소모했다고. 외계인들이 왜 왔는지도 모르고 왜 갑자기 떠났는지도 안 알려줌. 아마 테드 창 본인은 중요한 게 아니니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하고 싶은 이야기(언어가 사고방식을 지배한다는 이론)에만 몰두하느라 미쳐 그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했거나 서술할 생각을 못했거나. 어떤 이유든 간에 작가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건 맞음. 두번째 단편집부터는 일취월장해서 이런 실수는 없어졌다고 하던데 내가 아직 안 읽어봐서 평가할 수가 없음
그럼에도 이야기하고 싶은 테마가 탁월한 건 사실임. 이 탁월한 테마를 좀 더 필력이 원숙해진 다음에 집필했다면 ㄹㅇ 갓갓작이 나왔을지도 모름
@ㅇㅇ(220.74) 외계인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지 않은건 아마 전자의 이유였을것 같긴한데, 개인적으로 해석한 여러 주제랑 생각해보면 그래서 좋았던 것 같음. SF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딸을 키우고자 하는 부모' 의 입장에선 외계의 이야기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을테니까. 그 주제만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으로써 더 좋았기에 일종의 미니멀리즘처럼 느껴지기도 했음
개잌적으로 영화도 서술트릭연출이나 마지막연출이 좋앗음... 글로는 표현힘든 부분인지라
불립문자적인게 있지 ㄹㅇㄹㅇ
당연히 수정을 거치긴 하겠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런 형식으로 투고해도 될까요? 좀 감상적이고 감성적인 면이 많은것같아서..
@PKD 학술논문 같은게 아니라, 비평과 감상문들의 집합이니 괜찮을 것 같아염 창작글도 아니니 걸리는 것도 없고, 정 마음에 걸리시면 퇴고할 때 감정을 덜어내는 것도 선택지일 듯?
@UntermRad 오 그럼 안심이네요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수정해봐야겠어요!
고맙다 너무 좋은 글이야 도움 많이 됏어!!
도움이 됐다니 좋구만 이번에 월독에 수정한 글 올라올테니 그것도 보면 좋을듯!